리노의 도박사, Hard Eight, 1996 Flims




나는 사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과거와 현재의 모든 감독을 통틀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사심과 팬심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너무 힘든 일이라서, 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칭찬 일색으로 들릴 것 같아서이다. 또 그런 나의 'PTA 찬양'이 막연한 거부감이나 부정적인 편견을 듣는이에게 심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 나만의 공간에서 마음 편하게 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장편 영화 데뷔작을 쓴다. 장편 영화라고 굳이 지칭하는 것은, 1993년 단편 영화 <담배와 커피>라는 단편작품으로 선댄스에 데뷔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의 명백한 패러디 작품인 이 짧은 필름에서 그는 오랜 배우 커리어 기간 동안 주연보단 조연 배우였던 필립 베이커 홀을 캐스팅했다. 그리고 이들의 인연은 장편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에서도 타이틀 롤로 이어졌다. (원래 영화의 제목은 '시드니'였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필립 베이커 홀의 극 중 이름이다.) 이후 필립 베이커 홀은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에까지 PTA와 작업을 같이 한다.

미국인의 시점에서 느끼기에 미국 사회를 가장 냉정하고 냉철하게 바라보는 감독 중 한 명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그래서 아카데미에도 밉보였다는 루머까지 있는데... 그건 그냥 <데어 윌 비 블러드>가 모자랐어 서가 아니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만만치 않았었기 때문이겠지. 또한 흥행 성적까지 같이 고려하는 미국 아카데미 특성상 PTA에게 오스카는 조금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무튼 폴 토마스 앤더슨은 미국에서보다 유럽, 특히 베를리날레가 특별히 사랑하는 감독이지 않은가. 

점차 관록이 쌓여가며 차츰 주목을 받다가 어떤 계기로 이름을 알리는 감독이 있지만 또 어떤 감독들의 그 천재성으로 아주 특별한 데뷔작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잠깐 생각해봐도 타란티노, 자비에 돌란, 이냐리투 등등. (아직 데뷔작뿐이지만 찰리 카우프먼도 이 명단에 이름을 넣을 수 있지 않을까) <리노의 도박사>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불과 26살에 만든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의 느와르적 분위기, 그리고 선댄스를 통해 데뷔했다는 배경과 영화의 개봉 시점에서도 많은 면에서 <저수지의 개들>과 비교되었다. 그래서 폴 토마스 앤더슨은 데뷔 이후부터 종종 쿠엔틴 타란티노와 함께 거론되는 적이 많았다. 보통은 제2의 타란티노라고 불렸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노선을 확실히 달리하면서 그런 말을 요즘은 찾기 어려워진 분위기다.

사실 이 영화 <리노의 도박사>를 <저수지의 개들>과 비교하는 것도 나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오직 느와르의 몇몇 공식들이 중첩될 뿐이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는 일차원적으로 타란티노와 같은 유머가 정제돼있다. 필립 베이커 홀 뿐만 아니라 존 C.라일리, 기네스 펠트로, 그리고 사무엘 L.잭슨까지 출연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향후 자신의 영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분을 차지할 유사 가족 관계, 혹은 대체된 가족 관계에 대한 테마를 이 데뷔작에서 일찌감치 드러냈다. (또한, 그가 꾸준히 영화들 속에서 서사 해 온 구원의 테마도 벌써 이 영화에서 엿보인다.) 그는 가족 관계에서도 특히 부자(父子) 관계에 대해서 집중한다. 이제는 그의 대표작이 된 <매그놀리아>, <데어 윌 비 블러드>, 그리고 <마스터>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들은, 혹은 유사 아버지와 아들은 비슷한 상황들을 계속 변주한다.



계속하다간 너무나 긴 이야기가 될 수 있어서, 이 글을 다시 <리노의 도박사>에게로 돌려야 될 것 같다. 시드니(필립 베이커 홀)는 영화의 시작에서 생면부지의 젊은이 존(존 C.라일리)에게 커피를 사주고 담배를 주면서(PTA의 단편 데뷔작 이름이 다시금 떠오른다) 갑자기 강림한 신처럼 그의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말한다. 존에게 이 중년의 접근은 당황스럽고 경계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내 경계를 푼 존은 시드니가 시키는 대로 라스베가스로 가서 순식간에 그의 일차원적인 돈 문제를 해결해준다. 여기서 이 '도박사'가 존에게 시키는 방법은 정작 도박이 아니다. 그는 그가 잘 파악하고 있던 카지노의 허점을 파고드는 방법으로 존의 돈을 불러준다. 아버지가 없던 존에게 나타난 시드니는, 어리숙한 존이 돈을 모두 잃었다는 바로 그 카지노(시스템)에서 별다른 힘과 운을 들이지 않고 손쉽게 유사 아들의 입에 돈을 떠먹여 준다. 아들을 돌보는 아버지처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하지만 아들의 눈에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던 시스템을 통째로 좌지우지하는 마치 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시드니와 존의 유사 부자 관계는 계속된다. 여기에는 돈뿐만이 아니라, 존이 시드니의 마시는 것, 입는 것까지 따르게 만들 정도의 연결고리가 생성되어있다. 클레멘타인(기네스 펠트로)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존을 시드니는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려고 한다. 아들의 혼사를 책임져주려는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리고 정말 시드니는 이 어리숙한 아들과 모자란 며느리가 저지른 실수까지도 침착하고 냉정하게 해결해준다. 그는 끝까지 존에게 좋은 아버지,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슈퍼맨 같은 아빠로 남는다. 자칫 존의 인생을 망쳐버릴 수 있던 인질극, 혹은 살인사건으로까지 번질뻔했던 납치극으로부터 존과 클레멘타인을 탈출시켜 신혼여행을 보낸 시드니는 리노에 남아서 아들의 안전을 끝까지 책임져준다. 아버지가 없던 존에게 시드니의 존재는 완전한 대체 아버지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까지도 도대체 이 시드니라는 남자는 왜 존에게 이토록 잘해주고 거의 아들처럼 대해주는가에 대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게다가 존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시드니가 사실 오래전에 존의 아버지를 죽인 남자라는 사실은, 존이 리노를 떠나고 난 뒤, 존의 불량한 친구였던 지미(사무엘 L.잭슨)의 입에서 처음 언급된다. 그리고 시드니도 영화를 통틀어 처음으로 감정을 가장 폭발시키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거액을 요구하는 지미앞에서, 그는 이 부자 관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리노의 도박사가 아닌 과거 애틀랜타의 살인자로 일순 돌아간다. 살인과 피와 죄로 다시금 봉해진 비밀은, 여전히 존에게 시드니를 좋은 아버지로 남게 해준다. 그러나 이미 시드니의 재킷 안쪽 셔츠 손목 부분에는 지미를 죽이며 묻은 핏자국이 남아있고, 시드니는 존을 처음 만났던 그 카페에서 홀로 앉아 그 손목을 혼자 감추며 영화는 끝난다.

시드니가 존을 대하는 마음은 사랑, 그 진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가로 시드니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감정을 받았을 것이다. 무슨 이유였건간에 존의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어떤 젊은이가 아버지를 잃었다는 걸 안 그는 사실 처음부터 존에게 접근해 그의 아버지를 무작정 자처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의 안전과 안위, 또 자신의 비밀을 존으로부터 숨길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남자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친아버지를 죽여놓고 양아버지를 자처하며 죄책감을 덜한 이 남자의 사랑을 순수한 인류애에서 발현된 사랑이라고 하긴 힘들겠지만, 어쨌든 진실을 모르는 한 존은 시드니 아래에서 행복할 것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는 이렇게 자신의 치밀하게 짜놓은 판에 아들을 가두려는, 그리곤 굴복시키고 아들들의 결핍을 구원해주려 드는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각각의 영화들에서 억압받는 아들들이 취하는 행동들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끝내 화해하고 돌아오지만(<매그놀리아>), 누군가는 끝까지 맞서 싸우다 파국으로 치닫고(<데어 윌 비 블러드>), 누군가는 아버지의 시스템으로부터 탈출한다(<마스터>). 그리고 이 영화, <리노의 도박사>에서의 아들의 위치에 있는 존은 그중 가장 수동적인 아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향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치 프롤로그처럼 맨 앞에서 장식한 이 영화의 연출 시기를 고려해본다면, 이 영화 <리노의 도박사>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세계에서 아버지에 의해 억압되어 이를 벗어나고픈 아들들과, 그 아들들을 마치 전능한 신처럼 복종시키고 구원을 내려주려는 아버지들의 끊임없는 영원 회귀의 훌륭한 시작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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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시리우스 2018/01/22 08:49 # 답글

    크...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 저같은 영알못들에게는 넘나 어려운 것 ㅠㅠㅠ 그런데도 챙겨보게 되요 그의 영화는. 레비님 글 정독하며 공부하고 갑니다. 잘 읽었어요. 그나저나 이번주부터 다시 한파라는데 건강 조심하시길 :)
  • 레비 2018/01/31 02:41 #

    감사합니다 :) 이번주는 다시 조금 풀린다고하네요! 오늘 눈오고 나니까 좀 덜 추운것 같기도해요. 시리우스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 2018/01/29 06: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1/31 02:5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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