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문, Moon, 2007 Flims


최근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의 후속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개봉함에 따라 다시금 이 SF 영화계의 고전이 덩달아 재조명받고 있다. 안개와 조명으로 빚어낸 디스토피아적 미래 사회의 풍경과 80년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륙해낸 미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예언, 그리고 필립 K. 딕의 원작 소설이 갖고있는 주제 의식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메인 테마, 그리고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혁신적이었을 반젤리스의 신디 음악까지. 그렇게 이 영화는 그대로 SF 영화계의 클래식이자 걸작의 반열에 올랐고 지금까지도 그 지위과 퇴색하지 않고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는 인간을 위해 제조된, 인간과 외형적으로 거의 똑같은 레플리칸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겉으로는 인간과 유사하지만 모델이 발전할수록 그 유사함이 높아져 뚜렷한 자의식과, 어떤 이들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완전히 착각하기도하며, 또 주어진 4년이라는 수명을 자각하고 이를 연장하기 위해 싸우기도 한다. 사실 이들의 투쟁과 이를 저지하려는 비밀 경찰 데커트(해리슨 포드)의 싸움이 주된 스토리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인간' 해리슨 포드와 레플리칸트 사이의 경계(blade)를 단정 짓기 어려워진다. 더 오래 살고자하는 욕구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기도하며, 슬픔도 느끼는 것은 영락없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이다. 영화속 개발자들은 이 레플리칸트들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망각시키기 위해 마치 인간처럼 평생의 기억을 갖고있는 것처럼 미리 준비한 기억을 주입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기억이라는 것은 곧 고유한 단일 개체의 과거, 개인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추억이라고 믿는 복제 인간들에게는 누군가 일깨워주기 전까지는 이 방법은 꽤 효과적으로 묘사된다. 기억만큼 스스로가 의존하고 믿을 수 있는 근원을 우리가 조작하거나 다룰 수 있다면 복제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이 복제 인간이라는걸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기 실로 충분해 보인다. 그렇지만 명제가 성립한다고 그 역도 성립할까? 복제 인간과 진짜 인간 사이의 인간성의 간극이 고유한 기억과 주입된 기억의 차이로 충분히 채워질 수 있을까?

(이하 영화 스포일러 있습니다)


던칸 존스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로부터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았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내겐 마치 그의 자신의 첫번째 장편영화 <더 문>에서 이러한 논의를 확장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빚어낸 인공적 기억이 그 복제 인간의 '인간성'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으로 복제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으로 믿게 만드는게 충분할까. 미래의 지구에서 에너지 확보를 위해 쏘아올려진 달 기지에 홀로 외롭게 3년째 근무중인 샘(샘 록웰)에게는 이것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는 <블레이드 러너>의 레이첼과 (그리고 어쩌면 데커트까지) 일맥상통한다. 물론 이 영화가 다루려는 테마의 범위는 <블레이드 러너>에서의 경계만큼 넓다고 하진 못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는 '사람' 캐릭터는 오직 한 명뿐이다. 나는 앞서 <블레이드 러너>를 꺼내며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열고자했지만, 솔직히 인정하자면 이 영화가 더 가까이에 두고 있는건 <블레이드 러너>보다는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일 것이다. 특히 인간과 인공 지능간의 첨예한 차이는, 이 영화 <더 문>에서는 갈등이 아닌, 우리가 한번쯤 심사숙고 해봐야할 소재로 등장한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과 인간이 느끼는 물리적 거리의 한계는 심리적 거리의 장벽이 더 이상 되지 않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도 보여주듯 이는 발전한 화상 채팅과 무선 통신망 덕분이다. 실제로 같은 행성, 지구 안에서 느끼는 심리적 거리는 요즘 시대에는 더이상 실제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통신망은 달과 지구를 영화처럼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 과학이 심리적 거리를 아무리 좁혀놨다 하더라도 물리적 거리가 극복되지 않은 한 우리의 심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영화는 비록 우주라는 극단적으로 먼 곳에 우리의 불쌍한 주인공을 데려다 놓았지만, (비록 거짓이라 할지라도) 기억과 자아, 그외 살아가는데 모든 것이 충족된 환경에서도 물리적 거리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독과 외로움을 표현하고 싶어서 달에서 혼자 고립된 복제 인간을 설정해놓은게 아닐까. 이쯤되면 샘이 정말 복제 인간이었는지 진짜 인간이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를 보다보면 샘이 복제 인간이라는걸 알고도 그 어떠한 위화감도 우리 마음속에선 점차 희미하게 되어버리니 말이다. 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샘이 달 표면에 나가 흐느끼며 지구를 바라보면서 집에 가고싶다고 우는 장면은 정말 심금을 울리는 장면이다. 

케빈 스페이시가, 마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에게로부터 들었던 것과 똑같은 톤의 목소리로 연기하는 로봇 '거티' 역시 넓게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그렇지만 이 프로젝트에서 커티의 역할은 모든 '인류'를 이롭게하는 것이 아니라 달 기지에 있는 '복제인간 샘'을 돕기 위해 존재하고 그것이 이 따듯한 로봇의 단순하지만 명료한 첫번째 존재 이유였다. 샘보다 낮은 차원의 인공지능이나 로봇, 혹은 몇 세대 이전의 '우리가 알고 있는' 통속적인 인공지능 로봇인 거티를 영화에 미리 등장시킴으로서 샘이 복제인간이었다는 깜짝 효과를 더했다. 그리고 실제로 거티는 끝까지 단순하지만 명료하게 움직이면서, 비록 인간도 아니며 인간성이 프로그램화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단순한 임무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휴머니즘, 즉 '인간적'이라고 느끼는 장면을 여러번 연출해낸다.

나는 이 영화 <더 문>이 질문하고, 그 답을 우리에게 일임한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과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진짜 인간들보다, 보다 더 'humanity' 한 장면들은 오히려 조작된 기억을 가진채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던 복제인간 샘과, 그 샘을 오직 돕도록 프로그램화된 로봇 거티 사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로봇이나 비非인간에게도 허락된다면 그걸 '인간만의 것' 즉 인간성이라고 더이상 할 수 없지 않을까. 결국 이 글을 시작하면서 가져온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대사로 돌아가자면, 어차피 4년밖에 못사는 레플리칸트를 불쌍하게 생각한들 인간은 뭐 영원히 살 수 있겠는가. 영화 <더 문>은 그렇게 점점 더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구분이 사라져갈 수 있는 미래에서의 우리 인간만이 가졌다고 자신하던 '인간성'이라는 가치에 대해 고찰하게 만드는 좋은 영화다. 데이비드 보위의 아들이라는 후광에서 벗어나, 재기넘치는 젊은 감독으로 필모를 채워나갈 던칸 존스 감독의 차기작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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