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 Whiplash, 2014 Flims



다미엔 차젤레의 2014년 영화 <위플래쉬>가 국내에 공개되었을 때, 상대적으로 적은 상영관에 비해서 관객과 평단에서 제법 크게 일어났던 다양한 목소리들을 기억한다. 이 영화가 ‘음악 영화’로서의 예술적 쾌감이 비난보단 칭찬 받아 마땅함에는 이견들이 없었지만, 주제가 다루고 있는 ‘교육’에 관한 방법론은 이 영화를 본 사람들로 하여금 다들 한마디씩 하게만들고 싶기에 충분하리만큼 파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극중 ‘스승’ 플래쳐(JK시몬스)와 ‘제자’ 앤드류(마일즈 텔러) 두 사람의 관계가 영화의 주된 갈등선이 되는만큼, 플래쳐의 교육방식과 그에 맞추어 대응하는 앤드류의 변화가 영화의 뼈대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 이러한 강도높은 훈육의 사례가 보다 더 일어나기 쉬울 ‘실기’ 위주의 교육 현장이라는 특수성조차 가볍게 무시될수 있을정도로, 둘 사이의 팽팽한 갈등은 보는 이에 따라서 ‘일반론’으로까지 논의될 여지가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앤드류가 마침에 플래쳐에서 역습을 가하고 어떤 경지를 완성해내는 씬을 보고, 그가 결국 플래쳐의 ‘채찍론’에 순응 혹은 응답하여 플래쳐의 버디 리치가 되어주었다는 해석은 영화 전체가 결국 부정적으로 바라보는듯하던 그의 훈육 방식을 결국 옹호하는 결말이 아닌가하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반면에, 플래쳐의 엇나간 교육방식에 결국 견디지못했던 앤드류의 자기 파멸에 집중한다면, 앤드류의 마지막 껍질을 깨는 듯한 장면을 앤드류와 플래쳐의 ‘화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악마같은 플래쳐마저도 감회시키고 납득할 수 밖에 없게만드는 어떤 통쾌한 반격으로 보는 시각이다. 어느쪽이든 마지막 씬은 그 가슴 시원한 드럼 솔로 소리 뒤에 여러가지 말들을 남겼다. 심지어 감독인 다미엔 차젤레조차 이 부분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쪽으로 의견을 남겨둔 바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플레쳐와 앤드류와의 관계에 집중하며 말했다. 물론 <위플래쉬>는 앤드류와 플레쳐 둘만의 영화다. 여기에 앤드류의 아버지나, 앤드류의 여자친구인 니콜 등의 조연들이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이 두 사제간의 영화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게 보였다. 만약 플래쳐라는 이 개성넘치는 캐릭터를 어떤 상징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온전히 앤드류만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플래쳐는 단순히 앤드류가 음악학교에서 만난 어느 한 선생이 아니라 앤드류에게 있어 어떤 개념이나 추상적 존재로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불이 모두 꺼진 어두운 건물 복도를 카메라가 지나 끝 방에 닿으면 그 안에 마치 무대에서 솔로 연주를 위한 조명을 받으며 드럼 연습에 몰두해 있는 앤드류가 있다. 마치 꿈 속에서 자유롭게 누구의 시선도 구애도 받지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플래쳐가 어둠속에서 악마같은 그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을 조명 아래로 서서히 드러내며 앤드류에게 나타난다. 그러고보면 그는 처음부터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온 우리(카메라)의 시선과 동선을 그대로 유명같이 따라왔다. 플래쳐는 모르지만 앤드류는 한눈에도 그가 누군지 아는 눈치다. 이 프롤로그가 그 둘의 첫만남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그래서 영화의 시간상 가장 처음에 놓였다봐도 무방하지만, 사실 이후에 밴드 연습실에서 플래쳐가 앤드류를 ‘스카웃’하는 장면에서 마치 둘은 전에 만난적 없다는듯 다시금 첫 조우를 반복한다. 그래서 영화의 이 첫 장면은 마치 독립된 에피소드처럼 이후의 모든 영화 내용중 어디와도 연결되지 못하는데,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이 마치 앤드류가 앞으로 겪게될 모든 일의 시작, 즉 드럼 연주에 있어서 셰퍼 음악학교, 뉴욕, 그리고 세계 최고가 되고자하는 내면의 욕망이라는 존재를 플래쳐라는 인격화 된 실체로 앤드류가 처음 감지하고 인식하기 시작하는 그 출발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메피스토를 만난 파우스트의 첫번째 꿈 속처럼 말이다.

그래서 플래쳐는 분명 실존하는 인간이지만 앤드류에게 있어서 최고가 되고하자는 심각한 욕망, 그리고 점점 커져서 스스로를 잠식해가는 강박의 응집체이자 실체로서 존재한다. 플래쳐가 앤드류를 자신의 밴드로 합류시킬때, 그는 아침 6시에 오라고 하였지만, 알람을 놓쳐 허겁지겁 달려간 앤드류를 기다리는건 늘 9시부터였다는 스케쥴표와 정말로 9시 정각에 들어오는 학생들과 플래쳐였다. 그것이 의도적인 플래쳐의 장난이었다고 하기에는 영화는 다른 특별한 힌트나 코멘트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지않은가. 잘해야겠다는, 잘하고싶다는, 잘해야만한다는 지나친 의욕이 때때로 불필요한 과욕과 실수들을 불러일으킨 경험 말이다. 플래쳐는 사실 9시에 오라고 말한것이지만 그것을 6시로 기억한 것은 앤드류의 지나친 의욕이었을지도 모른다.

강박은 점점 앤드류를 잠식해가는데, 그는 먼저 플래쳐의 밴드에서 메인 드럼 주자였던 앞선 선배와, 뒤따라오는 또 다른 후보인 코넬리와 같은 경쟁자들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겪는다. 첫번째 무대에서 선배가 잠시 맡겨둔 악보를 잃어버리고 그걸 계기로 악보를 다 외워둔 앤드류가 드럼의 메인을 차지하는 일도, 정황상 잃어버린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이후에도 진짜 그 악보에 대한 행방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로 선배를 앞지르기 위해 앤드류가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부정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또한 뒤따라 나타난 코넬리에게도 명백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앤드류는 자기 자리를 지키기위해 안절부절한다.

후발주자인 코넬리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놓이자, 더욱 광적으로 연습에 몰두하던 앤드류는 그 위기의식을 자신이 좋아서 다가갔던 여자친구인 니콜에게 엉뚱하게 분출하는데 그 이유가 참 구차하기까지 하다. 그가 가진 자신의 원대한 계획가 위대한 여정에, 애인은 그저 방해만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어처구니 없다는 항변에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앤드류의 집착은 오직 그 길 이외에 다른 것들을 보는 시야를 빼앗아 가버렸다. 니콜과의 첫 데이트에서부터 사실 이미 조짐은 보이기 시작했다. 셰퍼 음악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앤드류가 니콜이 다니는 학교를 물어보고, 그 학교의 수준과 니콜이 아직 전공도, 무엇을 하고싶은지도 정하지 않았다는 말에 약간 무시하거나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목표가 뚜렷이 없다는 니콜에 비해 자신은 목표가 있다는 보이지않는 우월심리는 그때부터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이런 강박은 본인을 성장시키는데에 큰 동력이 되었다. 앤드류는 이후 드럼을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연습과 연습을 거듭하여 밴드내에서, 그리고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최고라는 위치에 대한 강박을 심화시켜 나간다. 거의 광기에 가까워지는 그의 집착과 강박은 다른 모든것을 포기해서라도 사수할만한 분명한 동기유발과 목표의식을 간직하게 해주었지만 결국 중요한 순간 그의 강박은 거꾸로 그의 발목을 잡는다. 대회 전날 두 경쟁자들를 장시간에 걸친 심사에서 모두 제치고 플래쳐 앞에서 파트를 따는데 성공한 앤드류. 그러나 대회 아침 급작스러운 사고로 드럼 스틱을 잃어버리고 나서, 이어진 자동차 사고로 심각한 부상까지 당한 상태에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채 무리하게 무대에 올라간다. 플래쳐와 언쟁을 벌이고 주위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가면서까지 무대에 오르고만 그의 강박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 기회를 잡아야한다는 눈 먼 판단 때문에 저지른 크나큰 실수로 드러난다. 당연히 그는 정상적인 연주를 할 수 없었고, 그 좌절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무대 위에서 플래쳐를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극한의 방식마저 택한다. 그렇게 그와 플래쳐의 악연을 끝내고 드럼에 핏자국을 남기며 퇴장한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듯 했다.


드럼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듯하던 앤드류와 우연히 다시 만난 플래쳐가 벌이는 영화 후반부의 이야기는, 자신의 강박에서 한발 물러나 일상으로 돌아온듯한 앤드류가 다시 잊지못하고 꿈틀대는 내면의 욕망, 언젠가 오르리라 올려다봤던 그 나무를 다시 올려다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럼에 빠져살다가 사고로 드럼을 두번 다시 보지 않게된 그가 어느날 재즈바에 가서 누군가의 연주를 보고 과거에 함께했던 자신의 욕망을 떠올리는건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닌가. 오르지 못했던 나무가 언젠가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험을 누구나 해보지 않는지. 그래서 자신이 극복하지 못했던 플래쳐라는 이름의 강박을 학교 밖에서 재회한 앤드류는 다소 멀리 돌아와 못다했던 자신의 연주를 끝낸다.

얼핏보면 플래쳐의 훈육 방법에 당위를 부여하는 듯한 이 영화는, 그래서 채찍론을 옹호하고 있진 않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플래쳐는 영화속에서 찰리 파커의 사례를 한번 이상 인용하면서, 아무리 엄한 교육 방식도 피어날 꽃은 그 정도에 꺽이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변호해왔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서 이것이 맞다고 충분히 느낄 수도 있었으며, 이 영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지적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만약 당신이 플래쳐의 비합리적인 채찍과 자극이 결국 앤드류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폭발시켰는다는 증거가 이 영화 <위플래쉬>의 마지막 연주였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 마지막 연주는 플래쳐의 방식에 견디고 견디다 못한 그가 짜릿한 복수를 완수했던 것이 아니라, 앤드류가 플래쳐의 지휘를 더이상 받지않고 자신만의 연주로 자신의 욕망과 강박을 마침내 통제할 수 있게된 피날레라고 말하고 싶다. 앤드류가 훗날 세계 최고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강박은 멀리 달아나는 것만으로는 잠시 잊고 지낼수는 있을지언정 극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위플래쉬>의 마지막 10분이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











덧글

  • 리퍼 2016/05/15 14:52 # 답글

    이런 해석은 처음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레비 2016/05/31 22:13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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