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 2008 Flims





내가 이 영화를 처음봤을때, 나는 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만났다. 종종 어떤 영화들은 당혹스럽게도,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우리에게 사전 준비를 요구해 올 때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그 준비라는 것은 보통 시간의 축적, 인생에서의 경험인 경우가 많다. 처음 보았을때 전혀 이해가 안 되던 영화가 수년 뒤 두번째로 보았을때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눈물을 흘리게까지 하는 경험은 분명 흔한 경험은 아니지만, 역시 그래서 말도 안되는 일도 아니다.

만약 <시네도키, 뉴욕>을 한번 보고 좋은 영화라고 말하려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간 내 주위에는 이 영화를 봤다고 말하기는 커녕 제목조차 처음듣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영화는 두번, 세번은 반복해서 봐야하는데 그건 이해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영화의 깊은 풍미를 단 일견에 맛보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기 때문이다. 와인의 첫 잔에서 이미 어떤 맛인지 파악했다하여 우리가 병에 든 나머지를 쏟아버리진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 케이든을 연기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에서 언제나 1순위였던 배우다.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그가 불과 2년전 뉴욕의 자택 아파트에서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나는 뉴욕에 있었을때 그가 사망했다는 아파트에 가 보았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의 겨울 어느 날이었다. 물론 세상이 주목하던 배우였음엔 분명하지만, 세이무어 호프먼은 가진 것에 비해 더 주목받았어야할 배우라고 주장하고 싶다. 조금 더 나의 팬심을 드러내자면, 나는 그가 동년배의 배우들 사이에서 영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 배우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영화는 인간의 모든 것을 담고 안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 중 특히, 인간의 인생이 담겨있다. 인생이라는건 굳이 영화로 느끼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충분히 난해하고 버거운 화두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처음 마주한 우리가 위축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시네도키, 뉴욕>(이 영화의 제목에는 두 단어 사이에 쉼표가 있다)을 처음 보았을때, 나는 금방 겁을 집어먹었다. 이해를 포기시킬만큼 어렵고 난해한 영화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달랐다. 이 영화는 나를 겁주고 있는게 아니라, 내가 지레 겁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다 끝날때까지 나는 이 영화를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평가할 자격조차 얻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시의 나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깊이에 도달하기 어려웠고, 그렇게 7년을 묵혀두었다. 그건 옳은 선택이었다. 

영화 감독보단 아직도 '각본가'라는 수식이 더 자연스러운 찰리 카우프먼은 자신의 첫 영화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전까지 그의 각본들은 감독 스파이크 존즈와 미셸 공드리를 만나 <존 말코비치되기>, <어댑테이션>, <이터널 선샤인>, <휴먼 네이처>라는 기발한 영화들로 세상에 선보였다. 위의 영화들을 잠시만 떠올려보자. 감독들은 다르지만 카우프먼의 각본하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모두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들이 있었다. 정신, 꿈, 환상, 이상... 그는 인간의 정신 세계와 현실 세계의 상호 관계를 다뤄왔다.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직접 연출까지 도맡은 데뷔작, <시네도키, 뉴욕>의 주인공 케이든(필립 셰이무어 호프먼)의 극중 직업이 '연출가'라는 점은 그가 얼마나 작정하고 현실과 가상, 연극과 실제라는 두 세계를 은유할지 어떤 각오가 엿보이는 부분이 아닐까.

하지만 극중 케이든의 직업은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인다. 그리고 영화 속의 형식적 배경이 '뉴욕'이라는 점도, 이 영화에선 하등 중요치않다. 영화속 배경은 그저 이 세계의 어느 곳이기만 하면 되며, 서사는 철저히 비현실적이다. <어댑테이션>에서, 영화와 우리가 진짜로 살고있는 이 현실을 이어보려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했던 그의 전적을 고려해보면 오히려 <시네도키, 뉴욕>에서의 비현실성은 충분히 묵인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다. 날짜와 시간은 영화 초반부부터 상식에 들어 맞지 않으며, 조만간 영화는 영화속의 현실과 비현실, 연극무대와 극중 실제 세계를 뒤섞는다. 하지만 아무 법칙도 없이 뒤섞이기만 한 이 세계에도 한가지 섞이지 않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가 시작된 직후의 시점부터 마지막까지의 사이에 놓인 케이든의 인생과 그의 시간들이다.

'제유법'이라는 뜻의 시네도키 Synecdoche는 확실히 낯익은 단어는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 ‘제유법’이란 부분으로 전체를 묘사하는 방법을 뜻한다. 돈과 시간으로부터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케이든은, 연극연출가인 그의 직업 답게 자신의 남은 모든 시간과 돈을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하나의 연극으로 옮기는 것에 투자하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삶을 모사하고 있는 연극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그저 자신과 똑같이 말하고 숨쉬고 생각하는 도플갱어를 하나 곁에 두는 것으로 만족될 수 없다. 실제 삶의 케이든에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무심히 지나친 인연들마저 모두 그들의 ‘역할’을 수행해야할 ‘엑스트라’ 배우들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 영화는 모든것이 은유다. 그래서 케이든이 이런 거대한 연극을 실현하기위해 필요한 돈이나, 공간적 제약은 우리가 걱정할 사항이 아니다. 그런 것 하나하나를 걸고 넘어지기엔 이 영화는 너무 거대하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자신의 인생을 그림자처럼 반복하는 또 하나의 연극을 인생과 동시상연한다는 발상과 그 실현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하는 그 연극의 또 다른 자신, 즉 그 연극속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할 또 다른 자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순서대로 연극에서의 비중도 동일하게 배분된다. 자신의 실제 연인들을 연기하기 위한 또 다른 연기자들이 필요하고, 그들은 그렇게 현실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현실과 평행선을 달리는 연극을 하루하루 수행 해나간다. 이쯤되면 인생과 연극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하지만 케이든이 주인공이 되어야하는 그 연극과, 실제로 케이든이 몸담고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과는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조연배우들의 유무다. 우리 인생에서 나를 제외한 조연들은, 모두 각자의 인생이라는 연극에서는 모두 주연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에서 경계가 무너져내리는 인생과 연극의 분계선을 유일하게 그어내는 선은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타인들을 모두 우리 인생의 조연들로서, 우리 임의의 기준으로 분류하고 나누고 그들을 무수한 괄호들 안에 밀어넣는다. 실제로 그들의 연극안에서의 그들의 모습이 어떤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실수를 하고 오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그들의 인생에선 나름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모른다. 그것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거대한 연극을 실현하고도 절대로 알 수 없는, 외려 더더욱 알 수 없을 일이다. 엑스트라들의 삶에도 그들 각자의 사연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는 것 말이다. 케이든이 자신을 연기하던 연기자의 장례식 장면을 연출하면서, 목사의 설교를 듣다 자신이 이러한 연극을 꾸미고도 절대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공허의 결핍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해내던 그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났다. 내가 케이든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영화가 나를 친절하게 감싸안는 기분을 느꼈다. 왜 우리는 이미 인생에서 각자의 주인공으로 살고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는지에 대한 해답이 거기 있었다. 이런 영화가 세상에 있기때문에 나는 영화를 보는걸 멈출 수가 없다.






덧글

  • 2016/04/10 20:4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5/08 02:2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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