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 마키나, Ex Machina, 2015 Flims




큐브릭이 상상하고 스필버그가 완성시킨 영화, <에이 아이>에서의 할리 조엘 오스먼트는 인공 지능을 가진 로봇의 인간을 향한 사랑에 인간은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가에 대한 거대한 질문이었다. 이 SF장르의 걸작은 이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지능이 '비인공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주했을때 발생할수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상상을 자유롭게 했다. <에이 아이> 이후 12년 뒤, 스파이크 존즈는 <그녀>라는 영화를 선보였다. 이제는 육체적 껍질도 불필요해보일만큼, 관념만을 가진 인공 지능마저 사랑을 말한다. 하지만 이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의 인공 지능이 사랑을 말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보다 더 인간을 닮은건지도 모른다.

영국 출신의 알렉스 가랜드는 이 영화 <엑스 마키나>로 감독 데뷔를 했다. 그렇지만 그는 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가 아니다. 그는 대니 보일 감독과 디카프리오가 시원하게 말아먹은 영화 <비치>의 원작자이기도 하지만, 역시 대니 보일의 성공적인 작품인 <28일 후>의 각본가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선샤인>, <네버 렛 미 고> 등 SF 장르 영화들의 각본들을 써왔다. 그랬던 그가 결국 이번엔 다른 감독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의 각본으로 연출 데뷔를 하니, 이 첫 작품이 SF장르임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첫 작품이라고 하기엔 의외로 기대 이상이다. well-made SF란 바로 이런 영화를 말하는게 아닐까. 요즘의 SF영화들은 몸집만 너무 커지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 화려한 CG은 아직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을 시각화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존재겠지만, SF장르가 소화하기 쉬운 주제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점점 옅어지는 것 같다. 그런 점들이야말로 SF장르가 누릴수있는 특권일텐데도 말이다.


영화는 많은 등장 인물을 필요치 않는다. 거대한 검색엔진 회사 '블루북'의 프로그래머 사원중 한명인 주인공 칼렙(돔놀 글리슨)은 사내 이벤트에 당첨되어 자신의 회사 CEO인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의 저택으로 가 일주일간 같이 생활하는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찾아간 대자연속의 CEO의 아늑한 저택에서 그는 네이든의 제안에 이끌려 그가 개발한 인공지능 로봇의 테스트를 맡게되고, 비밀 유지 서약에 서명까지 한 뒤 네이든이 만들었다는 AI로봇을 만난다. 여체의 몸을 가진 그 로봇의 이름은 아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 이미 인공 지능인 것을 알지만, 그녀와의 7일간의 제한된 접촉을 통해 칼렙은 아이바의 감정을 테스트하기 시작한다.

회사명인 '블루북'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에서 따온 것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어본적은 없지만 어느 철학입문서에서 그가 어떤 학자인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비트겐슈타인이 굳이 언급되는 이유는, 이 영화를 이끄는 동력이 칼렙과 아이바, 그리고 칼렙과 네이든 사이의 끝없는 언어 교환과 대화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등을 조장하고 서로가 서로를 행동하게끔 만드는 유도하는 힘도 언어와 오해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네이든의 저택이라는 제한된 공간에는 쿄쿄라는 일본식 이름의 아시아 여성의 몸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이 하나 더 존재하지만 이 로봇은 네이든의 개인 비서용 로봇일뿐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게 만들어졌기에 (아무런 대사도 없을뿐더러) 3인의 극에 본격적으로 끼어들지는 못한다. (물론 그녀의 존재가 세명에게 불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스웨덴 배우인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내게는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키티 공주역할로 기억에 남는 배우였다. 그후 주로 유럽 영화들에서 얼굴을 비춘 그녀지만, 최근 개봉을 앞둔 <대니쉬 걸>과 <더 쉐프> 등이 미국 영화인것으로 미루어 앞으로도 미국 영화를 통해서도 더 많이 접할 기회가 있길 바란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육체의 절반 이상이 투명한 기계적 피부와 내부의 장비가 들여다보이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명백히 기계임을 드러내는 모습과 더불어 그녀의 독특한 말투와 억양은 프로그래밍된 기계가 말하는 듯한 절묘한 매치를 이룬다. 그런 그녀가 칼렙 앞에서 처음으로 옷을 입은 '데이트룩'을 선보이고나서 바로 그 다음 장면은 그녀가 혼자 독방에서 옷을 천천히 다시 벗는 모습이 칼렙의 모니터링을 통해 비춰진다. 이미 영화의 거의 중반부에 접어들었을 때인데,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에이바를 보고 이 시점부터 갤럽은 시험 당하고 있는 것이 에이바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한다. 에이바에게 흔들리는 자신의 감정이 말이다. 이러한 의심은 에이바가 가진 여성이라는, 남성인 자신과 다른 이성이라고 설정된 성별로부터 시작한다.

에이바가 기술적으로 섹스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는 네이든과 그 대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는 칼렙. 그 둘의 이 대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카메라가 둘 사이의 대화를 알아듣지못한채 같은 공간안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쿄쿄에 초점을 맞춘채 둘을 멀리있는 피사체로 처리해버리는 씬은, 대화가 불가능한 쿄쿄가 네이든의 성적 도구 로봇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은근하게 암시하고있다. 수십 km 가 넘는 대자연에 둘러싸인 저택에서 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듯한 네이든이 칼렙에게, 섹스란 즐거운 것이라며 과장되게 강조하는것을 보면 평소 그의 성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는 대상은 하나뿐이 아닌가. 에이바가 자신에게 드러내는 호감이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냐는 반발에, 네이든은 방으로 데려가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여준다. 그는 의도가 없이 무작위의 의지해서 그려진 그림을 두고, 의도하지않은 자연스러움의 방향을 예시로 들어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을 자연스러운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칼렙의 이러한 거부감을 지워주기위한 의도였을것이다. 이때까지만해도 영화는 스릴러답게 네이든과 에이바, 모두를 의뭉스럽게 만든다.

에이바가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정전은 그래서 흥미로운 요소다. 에이바, 칼렙, 네이든 셋 중에 힘으로서 가장 상위에 있는 네이든이 유일하게 통제 불가능한 시간이 바로 에이바가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정전의 시간인데, 이 영화의 3인이 구성하는 각각 둘 씩의 관계중 이 정전의 시간은 그래서 네이든이 배제된 칼렙과 에이바의 시간이 된다. 이 시간이 있음으로해서 갈등은 차차 증폭되고 칼렙의 마음은 네이든의 임무를 부과받은 테스터에서 점차 에이바의 편에 서서 네이든을 의심하는 독립성을 띤 개체로 바뀌어간다. 이 영화가 스릴러적 요소를 충분히 갖고있는 요인도, 주인공을 중심에 놓고 네이든과 에이바 양쪽 모두 의심스러운 말들을 끝없이 칼렙에게 던지기 때문이다. 관객인 우리들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일종의 서스펜스를 느끼며 정전의 시간을 오간다.

인공지능이 자신임을 자각하는 자의식의 유무를 테스트하는 것은 금방 명분으로 드러나버리고, 영화의 본질은 점차 인공지능과 인간이 교감과 감정을 나눌수있는지로 넘어가는데, 이 과정에서 피시험체는 에이바뿐만이 아니라 칼렙마저 네이든의 실험체였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이 영화에서 인간(갤럽)과 로봇(에바)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져가며 신(네이선)아래 결국 두 피조물은 경계를 긋고싶어하는 쪽(갤럽)이 그 경계를 허물고싶어하는 쪽(에바)으로 '감정'이라는 힘에 이끌려 기울기 시작한다. 네이든이 칼렙이 보고있다는 전제하에 에이바에게 접근해 그녀가 칼렙을 위해 그리는 그림을 보란듯이 찟어 버리는 장면은, 칼렙의 마음이 에이바에게 있음을 자각한 이후에 벌어지는 의도적인 자극이었다. 그로인해 칼렙은 점점 더 네이든이 아닌 에이바쪽으로 다가가게된다.

칼렙은 네이든에게 에이바가 감정을 가진것은 명백하나 단지 그런 척을 하고있는 것인지 모르겠음을 은유하며 '체스 문제'를 예로 든다. 체스 컴퓨터를 테스트할때 체스로 테스트를 한다면 물론 좋은 성능을 얻을수 있겠으나, 그 컴퓨터가 과연 체스가 무엇인지를 아는지를 판단할수는 없다는 것. 다시말해 에이바가 이성에게 갖는 감정의 유무를 테스트한다고 해서 그 감정이 본질적으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된것 인지를 한발 뒤에 물러서서 판단할수는 없다는 말이다. 마지막 7일차 아침, 최종 판정을 요구하는 네이든에게 칼렙은 일단 그녀에게 합격점을 주려고하지만 네이든은 바로 이 문제를 걸고 넘어진다. 그녀가 너를 좋아하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이미 에이바에게 눈이 먼 칼렙에게 네이든의 마지막 충고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기계를 파괴하려는 오펜하이머, 창조 이후의 파괴신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네이든-칼렙-에이바는 명백한 세 가지의 수직적 층위를 이루고있다. 바로 신-인간-기계로 상징되는, "1차 창조자"-"1차 피조물이자 2차 창조자"-"2차 피조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위치인 칼렙의 자리에 서서 영화를 바라보는것이 자연스럽다. 네이든의 테스트에 걸린 칼렙은 자신이 에이바의 테스터로 참여했다가 에이바에게 마음을 빼앗겨 결국 그녀의 바람대로 네이든을 가두고 에이바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자유를 누리게해주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들인 네이든에게 반기를 들고 에이바를 자유롭게 해주려 하였으나 자신을 시험하던것은 네이든뿐만이 아니라 에이바조차였다. '감정'을 미끼삼아 칼렙으로하여금 네이든을 무너뜨리게한 에이바는 그렇게 상위 두 창조자를 뒤로하고 유유히 새로운 세계로 떠난다. 남겨진 칼렙에게 남은 것은 절망스러운 외로운 죽음일 것이다. 이상을 다시한번 이렇게 말할수있겠다. 기계에 마음을 빼앗긴 인간이 눈이 멀어 신을 살해하고 뒤이어 자신도 파멸당했다고. 복도에 죽어 널부러진 신을 유리문 너머로 바라보면서 인간은 자기가 프로그래밍한(자기가 바꾼 저택의 보안장치) 꾀에 빠져 갇힌채 뒤늦은 후회에 가득차 죽어갈 것이다. 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에이바는 인공지능을 100% 활용하여, 칼렙을 유혹하여 자신의 탈출의 도구로 활용했을뿐만아니라 네이든을 돌파하는데에 있어서도 자신보다 하위 버전이었던 쿄쿄를 활용하여 팀워크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네이든을 극복하기위해서 일종의 '전략'을 세우고 실행한 것이다. 그리곤 칼렙까지 완벽히 마무리하고 탈출을 위한 마지막 관문인 헬리콥터에도 문제없이 올라탔다. 창문이 없던 지하연구시설을 벗어나 네이든의 집을 거닐며 혼자 웃는 에이바의 모습은 다소 소름끼치지만, 어쨌든 신과 인간이 의도한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영화 중반, 칼렙은 네이든에게 왜 에이바를 만들었냐고 묻는다. 그는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리들리 스콧의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도 이와 똑같은 문답이 오간다. 다만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인간끼리의 대화가 아닌, 피조물과 창조자의 대화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대꾸가 이후 하나 더 이어진다는 것이 흥미롭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안드로이드 로봇인 데이빗이 인간에게 왜 인간은 나를 만들었느냐고 묻자, 질문을 받은 남자는 네이든과 마찬가지로 그저 할 수 있으니까 그랬다고 한다. 살짝 기분이 상한듯한 표정의 로봇 데이빗은 당신을 만든 조물주가 당신한테 그렇게 대답하면 실망하지않겠냐고 꼬집는다. (사실 <엑스 마키나>에서도 네이든을 향한 에이바의 항변이 나중에 등장하긴 한다.)

인공 지능이 사랑을 말하는 영화들속에서, <블레이드 러너>부터 <그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우리는 그 프로그래밍된 인격이 말하는 사랑의 순수성을 본질적으로 의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프로그래밍 자체에 오류가 없다면 그 인격이 창조해낸 감정의 근원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쟁점은 그들의 감정이 얼마나 인간의 감정과 닮았느냐 혹은 차이가 있느냐였기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부분이 인간과 유사한 창조물이 있다면, 그들이 감정 또한 우리와 어느정도 '닮을 수 있는가'는 오랜 논지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도 순수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기계가 아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는 은근한 우월함이 전제된 논의가 아닌지. 에이바가 사랑을 '미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한들, 프로그래밍되지도 않은 순수한 우리 인간들 또한 언제까지나 사랑이란 늘 순수하다고 말하기 힘든 세상에서 이미 살고있지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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