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크 쉘터, Take Shelter, 2011 Flims





빌 머레이 주연으로 유명한 <사랑의 블랙홀>로 연기 데뷔한 마이클 섀넌은 20년이 넘도록 많은 영화와 TV를 오가며 얼굴을 비춰왔지만 의외로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는 타입의 연기자는 아니다. <진주만>이나 <8마일>을 본 사람들은 많지만 그 영화에서 마이클 섀넌의 얼굴을 기억해내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연기 경력의 꽤 많은 시간을 주연의 위치에서보단 조연으로 보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고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맨 오브 스틸>을 본 관객들이라면 그를 '조드 장군'으로 기억할 것이겠지만.) 그는 약간 정신적 이상을 가지고 있는 이웃의 젊은 아들로 아주 인상적인 연기를 했다. 영화 <테이크 쉘터>는 그런 마이클 섀넌이 주인공 커티스를 연기하는 영화다. 

영화 초반부엔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이 떠오르기도 했다. 정신적 장애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은 많지만 그 초점을 줄곧 일관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주인공과 그가 갖고있는 문제점, 그리고 그 대척점에는 보통 사회나 주위 사람들이 서있지만 이 영화에서의 마찰은 그 둘 사이의 거리를 변화무쌍하게 조절하고 있다. 많은 정신병력을 가진 영화 속 주인공들이, 외부 세계와의 싸움과 내면의 싸움을 병행하는 반면, 영화는 커티스 개인보다 그와 그의 아내 사만다(제시카 차스테인)와 귀가 들리지않는 어린 딸 한나를 묶어 한 가정으로 초점을 확대한다.

커티스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평화로운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는 주위 동료들이 부러워할만한 행복한 가족을 갖고있다. 현명한 아내와 함께, 또한 장애가 있는 딸을 수화로 교감하는데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커티스가 사는 마을, 그리고 그가 살고있는 집은 아주 부유해보이지는 않지만 평온하고 평화롭다. 이 영화에서 행복한 가정이라는 시작점은 꽤 중요한데, 그것은 영화가 진행됨에따라 커티스의 모든 행동 양상을 발생시키는 핵심적인 동기이자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혼자 미쳐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병이 확정됨으로서 이 행복한 자신의 가정을 잃게 되는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이 영화 <테이크 쉘터>가 단순히 다른 정신병과 주인공의 사투에서 머무는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커티스의 세번의 악몽 속에서 모두 딸이 등장하기도하며, 같은 증상으로 어머니를 격리시킨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신도 마치 그 업보를 물려 받듯이 자신의 가정으로부터 격리 당할까봐를 걱정하는 남자다. 그래서 아내 사만다와 딸 한나를 곁에 둔 이 가족의 유지와 보존은 커티스에게 가장 큰 동기가 되고있다. 다시말해서, 그는 자신의 병을 걱정하기도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의 병이 진짜 병으로 진단받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한밤중에 경기를 일으켰을 때, 그것을 본 사만다가 앰뷸런스를 불렀을 때에도, 그것을 황급히 취소하려는 커티스의 행동 역시, 자신이 정말 정신분열증으로 판정이 난 이후의 불안함에서 기인하는것이 아닐까. 그리고 정말 그러하였을 때 자신도 자신의 엄마처럼 가족과 떨어진채 살아야한다는 공포가 더 큰 것이다. 그날 밤 처음으로 사만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때, 커티스는 다가오는 자신의 병을 치료해 내겠다는 말보다, 가능한 지금을 지키고 떠나지 않겠다며 거의 자기 결심에 가까운 말들을 늘어놓는다. 여기서도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병으로 스스로를 잃는것이 아니라, 자기가 일궈온 것들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격리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영화에는 커티스의 불안과 공포, 공황이 먼 하늘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과 폭풍의 전조로 시각화되어있다. 그가 꿈속에서 불안을 느낄때, 혹은 현실에서 공황에 빠질때 늘 폭풍과 천둥의 이미지가 활용되었다. 섀넌의 삶의 가장자리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는 그 폭풍은 그대로 섀넌에게 다가오는 정신적 공포의 심리적 거리감을 상징할 것이다. 커티스의 증상은 악몽을 겪으면서 심화되는데, 키우던 개에게 팔을 물리는 꿈, 그리고 빗길 운전중에 사람들에게 공격받고 딸이 납치 당하는 꿈, 그리고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 집안에서 딸을 지키려다 집이 통째로 추락하는 꿈을 꿀때마다 그는 심리적으로 점차 궁지에 몰리게된다. 단지 개가 꿈에서 자신의 팔을 물었으면 개를 격리시키는 방법으로 대처했다면, 점차 꿈속에 등장해 자신을 죄어오는 사람들이 친한 직장동료, 그리고 (영화가 제시한) 마지막 악몽에선 아내로 등장했을땐, 이미 그는 자신의 불안을 통제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그의 정신분열 초기증상은 그로하여금 아내와 상의도없이 집과 차를 담보로 위험한 대출을 감행하고, 직장에서 실직할 위험도 무릅쓰고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공사 장비를 멋대로 가져와 집 마당의 지하 방공호를 만드는데 몰구하게끔 한다. 그는 공포와 강박에 사로잡혀 더이상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른다. 정신분열증이 자신을 파탄내기 이전에 자신의 이런 이상 행동들이 자신이 유일하게 지키고자하는 가족을 파탄 위기로 내모는 아이러니가 펼처진다. 이런 커티스의 괴리와 한계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친구에 의해 폭발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커티스가 터트리는 이 일갈은 그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의 병을 병이라고 생각해오지않았듯이 자신은 정말 다가올 폭풍에 대비하고 있었다며 도리어 어리석은 자들은 당신들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분노를 쏟아낸 직후 그가 딸과 아내를 바라볼때,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파서 이렇지만 그것을 가족 외의 사람들에게 표현할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눈물로 대신하려할때, 이 현명한 아내는 그것을 읽어내고 커티스를 끌어안고 나간다. 영화의 하일라이트 지점에서 정말로 폭풍은 온다. 그러나 그 폭풍은 커티스가 우려했던 만큼의 폭풍은 아니었다. 몇시간의 방공호안의 대피 이후, 사만다는 커티스의 손으로 방공호의 문을 열고 나가게끔 시킨다. 자신이 직접 문을 열고 폭풍우가 지나간 맑은 하늘을 보여주어도 되지만, 그녀는 커티스의 손으로 직접 이 악순환을 끊기를 바랬다. 그녀는 커티스가 자신과 딸, 그가 떠나지않으려고 그토록 몸부림치는 가족안에서 계속 살기위해선 해야할 일이라며, 그가 가장 최우선에 두었던 가족의 보전을 가치로 내세워 그를 설득한다. 이 장면이 사실상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온 가족의 포옹. 자 이제 모든것이 해결되었을까? 커티스는 자신의 강박을 극복하였고, 이 가족은 행복하게 살게되었을까. 그러나 영화는 이 후에 두개의 시퀀스를 더했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 마침내 보건소 상담의가 아닌 보다 전문적인 정신과 치료의를 찾아간 커티스와 사만다 부부는, 약물 치료에만 그치지않고 보호시설에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결국' 듣는다. 커티스는 그 말을 듣고 '내가 가족을 떠나야한다는 뜻이냐'고 되묻는다. 놀랍게도, 결국 그는 그가 우려해온대로 가족을 잃게 될것이다. 자신의 엄마처럼. 그가 그토록 피하고싶었던 결말이, 영화의 최종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놓인 이 영화의 진정한 마지막 시퀀스는, 커티스와 그의 아내와 딸이 해변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단언컨데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논란과 혼란을 야기할 문제의 마지막 5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마지막 논란의 5분 때문에 이 영화가 반전영화의 부류에 포함되어버리지 않길 바란다.) 혹자는, 원래 취소될 예정이었던 그 가족의 해변에서 보내는 여름 휴가가 앞서 두번이나 언급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해변이라는 이유로 그 마지막이 현실이 아닌 커티스의 악몽 속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영화 그 어디에도 예정대로 여름 휴가를 가게 되었다거나, 혹은 그 마지막 장면의 시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장면은, 처음으로 커티스가 아닌 타인이, 다시 말해서 한 공간에 있던 딸과 아내가 모두 커티스가 '보고있는' 공포와 불안을 그녀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장면임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커티스의 불안은 커티스만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는 놀랍게도, 커티스의 불안이 더이상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남편이 미쳐간다고 걱정했던 아내 사만다조차 그 폭풍을 함께 목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장면에서 영화 내내 "우리도 미치지않았어"라고 생각하며 주인공 커티스보단 '정상인'인 사만다의 입장에 동화되어 영화를 보고있던 모든 우리들로하여금 우리의 시선을 공유하던 그녀가 마지막에 폭풍을 볼 수 있게 함으로서, 감독이 의도적으로 '불안과 공포'로부터 한발 떨어져있다고 생각해온 우리들도 안전하진 않다는 경종을 울리려한 시도였다고 믿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커티스가 정말로 정신분열증이 있는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이 사실이었는건지 판별하는것은 의미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마치 예언자처럼 그의 말이 실현되었다하더라도 그가 겪어온 불안과 공황은 그를 괴롭혀왔다. 그리고 불과 몇분전 장면에서 사람들에게 소리치는 커티스를 보고도, 정말로 폭풍이 크게 오리라 짐작한 관객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정신적으로 힘겹고 약해진 사람의 처절한 절규 정도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대비하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면서 불안과 공포는 꼭 정신병을 겪고있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중 누구라도 언제든지 느낄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을, 영화의 마지막 5분을 기하여 조용한 충격을 가하려는게 아닐까.  

+

이 영화 <테이크 쉘터>가 미국 중산층가족의 불안을 은유한다는 대다수의 평도 확실히 무리는 아니다. 아내는 딸을 위해서라도 더 좋은 환경과 집으로 이사하길 원하다. 그러나 커티스의 수입은 당장 빠듯한 상황이다. 그리고 영화속 그는 그 빠듯한 돈을, 자신의 가정을 외부의 거대한 힘으로부터 지키기위해 무리한 지출에 소모하여 갈등을 고조시킨다. 게다가 영화 중간에 커티스의 친형이 한번 등장하여, 방공호 만드는 일에 빠져있는 동생에게 뼈있는 조언을 할때, 그는 불경기에 뭐하는 짓이냐며 신용카드는 쓰지말라는 말까지 해준다. 형이 주로 언급하는 것은 커티스의 정신적 건강보단 그가 자칫 잘못되었 때 벌어질수 있는 경제적 죽음에 무게가 실려있다.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모두가 믿어왔으나) 정말로 닥쳐온 재앙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확실히, 당장의 먹고 사는 일에도 빠듯한 경제적 이유로인해 언제 닥쳐올지 모를 진정 큰 위기로부터 가족을 지킬 투자는 정신나간 일로 치부되고 손가락질 받는 경제적 한계를 가진 계층과 그들의 불안을 대변한다고 할수도 있겠다. 영화 중반부에 커티스가 보고있는 어느 TV뉴스를 통해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큰 사고로부터 목숨을 건진 한 남자의 소식이 언급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사연의 남자는 가족을 구하지 못하고 혼자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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