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2014 Flims








크로넨버그의 <맵 투 더 스타>와 자비에 돌란의 <마미>와 함께 놓고 한해의 마지막 영화로 무엇을 볼지 고민했다. 여러편의 영화중에서 한편을 골라봐야만할 때, 시놉시스나 공개된 예고편, 혹은 네티즌 평점에 의존하고 싶지 않은 내겐 애용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언젠가 술을 좋아하는 어느 친구가 내게 그랬다. 수백, 수천병의 와인의 맛을 다 맛보고 기억하려고 애쓰기보단 내 입맛, 내 취향을 알고있는 소믈리에 한명을 알고 지내면 된다고. 그래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 사이에서 방황할때 가장 신뢰하는 방법은 같은 방법이다. 나와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많은 부분 일치하는 영화평론가 몇명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 사람들의 평가를 따라간다면 위험부담이 적다. 그렇게 한해를 마무리하는 영화로, 선택된 것이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였다.



줄리엣 비노쉬, 크리스틴 스튜어트, 클로이 모레츠의 얼굴을 나란히 삼등분하여 내세운 한국판 포스터를 보았을땐 적어도 '남자들의' 이야기는 아니겠다 싶었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보기전 인터넷에 우연히 보게된 리뷰 제목, 여배우들의 삶에 관한 영화라는 평은 아마도 포스터만 보고 쓴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클라우드 오브 실스마리아>에는 흥미로운 여러개의 중첩된 서사들이 있다. 첫번째는 극중 가상의 연극인 '말로야 스네이크'의 이야기다. 이것은 이 영화 속에 존재하는 또다른 '이야기'이다. 영화가 진행됨에따라 우리 관객들은 이 '말로야 스네이크'의 내용이 과연 어떤 것인지 캐릭터들의 대사를 통해서 점차 구체적으로 알아간다. 이것은 '어린 여자'인 시그리드와 그녀의 연상 상사인 '성숙한 여자'인 헬레나 사이의 이야기로서, 회사 상사인 헬레나가 자신의 여비서인 시그리드의 젊음과 자유에 반하고 시그리드 역시 그런 헬레나를 자신에게 매혹시켜 결국 실연당한 헬레나가 자살하고 마는 이야기이다. 이 첫번째 서사는, 영화속 완숙한 여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 개인의 시점으로서 그녀는 과거 그녀를 스타의 길로 인도했던 역할로서 시그리드를 연기했으나, 2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이 속편의 연극에서 이번엔 헬레나의 배역을 제안받는다. 지금의 마리아가 20년전의 시그리드였다면, 그 당시 헬레나 역할이었던 '완숙한' 또다른 배우가 있었을터. 하지만 그녀는 이 연극 직후 정말 헬레나처럼 자살했다고 마리아는 우울하게 회상한다. 마리아는 이 헬레나를 연습하면서, 자신의 과거(20년전의 시그리드)와 자신의 현재(지금의 헬레나)가 서로 충돌하는 경험을 한다.

두번째는 마리아와 죠앤(클로이 모레츠)의 서사다. '현재의' 젊은 여배우 죠앤은 새로운 시그리드로서 캐스팅되어 이제는 헬레나가 된 마리아 앞에 나타난다. 죠앤은 마리아의 대칭에 서있는, 그야말로 시그리드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20년전의 마리아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 트러블메이커에 이슈와 가십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즐기는 통제불가능한 헐리우드 악동의 모습으로 말이다. 풍문을 듣던 마리아는 죠앤에게 비호감을 느끼지만 실제로 죠앤을 만난 마리아는 금방 그녀에게서 매력 역시 동시에 느낀다. 경계과 매혹 사이에서 마리아는 이제, 시그리드였던 자신의 과거와의 싸움 뿐만 아니라, 지금 눈앞에 나타난 현재의 시그리드와도 맞서야한다. 헬레나라는 캐릭터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헬레나의 위치에 서있어야하는 마리아가 겪는 딜레마이다. 마리아는 자신보다 젊고 에너지넘치는 죠앤의 모습에, 자신에겐 성숙이라는 무기가 있다는 조언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세번째는 마리아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관계이다. 발렌틴은 배우가 아니라 마리아의 개인 비서이자 매니저이다. 따라서 발렌틴은 극중 또다른 연기자로서, 마리아와 대척점에 서거나 그녀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발렌틴은 극중 누구보다도 마리아와 근접하고 밀접한 존재다. 그런데 이 어리고 젊음 넘치는 발렌틴이 속해있는 세계는 마리아, 혹은 헬레나가 아니라 죠앤, 혹은 시그리드의 영역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발렌틴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 한명의 시그리드를 상대해야한다. 이제는 연극 속 헬레나가 아닌, 인간 마리아로서, 그녀는 자신보다 젊은 마인드를 갖고있는 발렌틴에게 점차 의지해간다. 히스테릭한 마리아의 모습에 떠나겠다는 발렌틴을 진심을 다해 만류하는 몇몇 장면들은,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서로 자리를 바꿔과는 주도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리아가 배우이고, 발렌틴은 매니저일 뿐이지만 영화가 진행될 수록 이 둘의 관계는 역전되는 모양새이다. 마리아는 극중 헬레나처럼, 스스로 자신의 시그리드, 즉 발렌틴 앞에서 스스로의 목에 족쇄를 채운다. 연극속의 시그리드-헬레나의 관계가 영화속에서 발렌틴-마리아의 관계로 재구현된다.



장만옥의 전 남편이기도 했던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장만옥과 함께 찍은 영화, <이마 베프>를 보면, 아사야스 감독이 선호하는 그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영화와 현실, 혹은 영화와 그 영화가 안에 품고 있는 또 다른 가상의 이야기를 마구 뒤섞는것을 즐긴다. 극중 마리아가 해리슨 포드와 함께 찍었다고 언급하는 영화. 애니 레보비츠와의 사진 촬영 일정, 샤넬 잡지 촬영 등등. 그런 영화속 디테일들은 마치 그 '마리아'가 실제 '줄리엣 비노쉬'가 아닐까 싶어서 해리슨 포스와 찍었다던 '딱정벌래'영화를 검색해보게끔 만든다. (그런데 줄리엣 비노쉬는 애니 레보비츠와도, 샤넬과도 실제로 촬영해본 적은 없다고한다.) 영화는 그녀가 엑스맨 시리즈에 출연했던것처럼 언급할뿐 아니라, 클로에 모레츠가 연기한 죠앤은 세상 어딘가에 지금 정말 있을법한 문제적 여배우를 떠올리게 한다. (하필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한 발렌틴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나오는 헐리웃 영화들'를 비하하는 뉘앙스의 대사를 할땐 웃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실제와 영화의 경계뿐만 아니라, 아사야스는 영화와 영화속 연극의 경계도 모호하게 만든다. 마리아와 발렌틴이 대사연습을 하는 몇몇 시퀀스를 보면, 마리아와 발렌틴이 주고받는 '연습'들은 그대로 그녀들이 진짜로 내뱉는 본심이라고 해도 대부분 상황에 들어맞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연기 연습이고 어디부터가 진심을 토로하는 것인지,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일종의 짜릿한 영화적 스릴을 느낄 정도였다. 이 영화가 단순히 '서로 다른 두 세대'의 부딪힘이나 갈등을 그린 것이라면, 그 점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더욱 환상적으로 만드는 요소들은, 알프스 산맥의 뱀모양의 구름들만큼이나 몽환적이고 오묘한 감정이 들게 만드는 아사야스 감독의 이런 기술에 있을 것이다. 아사야스는 허무를 통해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다. 발렌틴의 급작스러운 사라짐 역시, 그리고 그 후 에필로그를 통해서도 어떠한 언급이 없는 것은 마치 발렌틴이 처음부터 거기 없던 가상의 사람은 아니었나를 의심케할 정도로 단호하다. 과연 그녀는 자신이 마리아를 떠나간 후 마리아가 죠앤과 연기한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러 나타났었을까? 아사야스는 그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줄만큼 어수룩한 감독이 아니다.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클로이 모레츠와 비교 우위에 있다. (물론 이 둘도 이 영화에선 나쁘지 않았다.) 마리아는 '신세대'를 얕잡아보거나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경하고 그 세대에 자신이 속하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그녀가 발렌틴으로부터 여러번 재차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은 그녀를 통해 자신이 '신세대'에 뒤지지 않음을, 혹은 여전히 그런 요소들을 잃지 않고 있음을 증명받고 싶어한다. 한편으로는 그 젊은 세대를 경계하거나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기억속에 '영원히 어린' 시그리드로 남고 싶기 때문에 후속작에서의 헬레나는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감독의 제의, 이젠 20년전의 시그리드가 아닌 헬레나를 연기해달라는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고, 헬레나를 연습하면서도 몸이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시그리드로 남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제 시그리드의 자리는 새로운 세대, 새로운 젊음에게 양보해야할 때가 왔고 그녀는 시그리드에 비해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평생 느껴온 역할, 헬레나의 자리에 이제 본인이 서야한다. 그런 마리아가, 자신이 더이상 시그리드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이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나의 20대 마지막 날 밤에 보았다. 그날 저녁을 함께한 동갑내기 친구들은 모두 하나 같이 서른이 되는 것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손쉽게 받아들이고 싶어하진 않았다. 그런 대화들을 나누고 만난 영화가 기막히게도 이 영화였다. 물론 마리아의 시그리드와 헬레나의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시간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시간의 연속성 속에 살고 있는 내게 겨우 한살 더 먹은 것에 비유하기는 우스운 일이지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덧글

  • 2015/01/10 22: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1/19 03:0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5/05/07 02:2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375

통계 위젯 (화이트)

315
123
916991

웹폰트 (나눔고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