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후드, Boyhood, 2014 Flims






고백하건데 <보이후드>를 보고나오면서, 사실 나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에게 소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익히 알려진대로 <보이후드>는 12년동안 매년 배우들과 스탭들이 모여 영화를 만들어갔고 결국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2002년부터 찍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비포 선셋>이 개봉한 2004년보다도 전에 이미 <보이후드>는 크랭크인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링클레이터 당신, 내가 그토록 애정하는 <비포 선라이즈>부터 시작한 이야기를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까지 이어 완성한 '비포 3부작'이 결국 다 <보이후드>를 위한 습작이었군- 하는 허탈감말이다. 9년의 시간차를 두고 만든 세 편의 이야기를 두고, 나는 링클레이터 감독이 시간의 영속성을 굉장히 실험적인 시도로서 보여주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뒤에 <보이후드>와 같은 훨씬 더 굉장한 도전이 있었는지는 짐작도 못했다. 나는 그동안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을 좀 얕잡아 보고있었다고 반성한다. <스쿨 오브 락>이나 <버니>가 내 취향이 아니라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비포 3부작'만 취하고픈 감독이라고 마음속 한구석에선 다른 장인들에 비해 몇수 아래에 랭크시켜놨던 것 같다. 그런데 <보이후드>를 보고나서 그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보이후드>는 예상대로 (또는 의도대로) 단 한번의 플래시백이 없다. 어떠한 회상장면도 없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과거에서 현재로만 흐른다. 큰 얼개가 짜여져있던, 다시말해 절대 12년치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12년의 시간이 배우들에게 가한 흔적들은 단순히 외모의 늙음이나 성숙에서만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물론, 이혼한 부모 밑에서 한 남매가 성장하는 과정, 그리고 어머니의 두번의 재혼과 이혼, 같이 살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아이들과 만나는 진짜 아버지라는 설정들은 미리 정해져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2년간 찍으면서 나는 감독이 미래에 다시 찾아올 아주 미세한 복선들이나 조짐들을 세심하게 컨트롤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라 믿는다. 실제로 <보이후드>에는 나중에 다시 언급될것만 같은 것들도 별것아닌양 지나가버리거나, 왠지 극이 고조될 분위기나 사건도 다시 1년이 훌쩍 지나면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링클레이터는 더 명민한 시도를 한다. 시간이 1년씩 훌쩍훌쩍 건너뛰는데도 그는 어떠한 표식을 따로 심어두지 않는다. (해리포터, 레이디 가가, 오바마 대선 등등 그저 그 시대를 짐작할만한 '분위기'만 군데군데 나타날뿐이다.) 심지어 몇몇 장면들은 컷 사이에서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을 인물들의 주변 환경이나 주고받는 대사속 대화들로 알아서 눈치채야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지루하게 말하자면 '12년치 남 인생 구경'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렇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나의 지난 12년을 생각해본다. 고등학교 졸업, 대학 입학, 군대, 휴학, 몇번의 연애들이나 주변인들에게 찾아온 급작스러운 죽음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기점으로 떠올릴 수는 있지만 막상 나의 지난 12년을 이렇게 순간 순간을 모은 영화로 만든다면, 난 절대 그 사건들의 단순나열로 채우고 싶지는 않다. 첫번째 시퀀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더니 다음엔 대학 1학년을 보내고, 몇번의 휴학들과 그리고 군입대와 제대를 하는 식으로는 나의 20대를 편리하게 정리하는 방법이겠지만 정작 생생하게 기억나는 순간들은 절대 그런 '날들'이 아니다. 나의 20대 이력서를 쓴다면 제일먼저 적힐 한줄 한줄들이 아니라 정작 그 리스트에 꺼내놓을 이유가 없을 법한 아주 작은 '순간'들이 오히려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군에 있었던 2년을 돌이켜보아도 입대일이나 전역일보다도 정작 복무기간 중에 있던 몇몇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의 날이 기억나는 것이다. 대학생활을 기억하는데에 있어서도 꼭 입학식과 졸업식을 병치시켜둘 필요는 전혀 없지 않을까. 20대에 했던 연애들도 고백하던 날이나 이별하던 날보다는 연애를 하면서 겪은 행복했던 순간들이 먼저 떠오른다. <보이후드>에서 메이슨이 언제 어떻게 연애를 시작했거나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연인과의 대화, 함께한 행동이 에피소드처럼 극에 삽입되어있을 뿐이다. 메이슨의 엄마 역시 두번의 재혼과 이혼이 관객들의 입장에선 다소 당황스러울만큼 '장면이 바뀌면' 벌써 겪은 일이 되어있다. 링클레이터는 <보이후드>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서 분명히 선언한다. 시간은 순간의 모음, 그것도 크고 의미있는 사건들의 모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지금'들이 모인 모자이크라고. 영화 <보이후드>의 12년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일이 일어났다. 우리도 매일매일 무슨 일이 닥쳐오는듯하지만 그 매일매일이 모여서 여기까지 왔다. 별일없어보였던 소년의 인생을 무심히 보고나서야 깨닿는 놀라운 영화적 경험. 이 영화는 영화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야심이었고 또 그만한 시도로 남을것이다.









덧글

  • 2014/12/26 12:4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2/28 23:4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닥슈나이더 2014/12/26 16:30 # 답글

    개인적으로... 엄청 많은 촬영 필름은 있었을거구...
    배우들의 촬영은 모두 여름방학 시즌에 했을거구...

    여름 한철 찍은 에피소드들을 잘 이어 붙인 영화인듯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되돌려 말하면 12년짜리 2달씩 매일하는 일일 드라마를 편집해서 극장판을 만드는 방식 이었을듯 싶네요...

    덕분에 관객들은 사이의 에피소드들을 채워서 이해해야 하고...
  • 레비 2014/12/28 23:46 #

    맞습니다 ㅎ 어떻게 촬영되었는지를 찾아보니 스탭들과 배우들이 매년 일정 기간씩 만나서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후반 2년동안 편집을 병행했고.. 물론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고하지만 이렇게 느릿느릿, 꾸준히 나아가서 완성된 영화도 참 유일한것 같아요.
  • 2015/01/03 02:2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1/07 06:2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행인 2015/01/03 10:46 # 삭제 답글

    마지막에 엄마가 울면서 "그래도 난 뭔가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라는 대사가 정말 영화/삶 그대로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첨엔 저도 3시간 남짓 되는 이 필름을 보면서 클라이맥스/결론이라는것이 있겠지.. 하면서 기다렸는데 별 굴곡없이 끝나더군요 ㅋㅋ 그러고 다시 영화를 곱씹어보니 정말 저 대사 그대로 삶이라는걸 잘 표현했구나 싶어요 ㅎㅎ
  • 레비 2015/01/07 06:23 #

    맞아요. 사실 메이슨이 주인공이라지만, 그 엄마도 다른 의미에선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싶어요.
    굴곡없이 흘러가는 전개가 사실 이 영화에 참 어울려요 ㅎㅎ 인생이 그런 기승전결의 반복이 아니라 그저 전개와 전개의 연속이니까요 ㅎㅎ 엄마가 우는 장면에선 저도 안쓰러웠지만, 또 결국 메이슨은 다음 시퀀스에서 학교에서 또 다른 새출발을 하잖아요? :) ㅎㅎ 우리 삶도 매번 그런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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