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Medianeras, 2011 Flims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이라는 부담스러운 한국어 제목 선정에 대해선, 마냥 덮어두고 비난할순 없겠다. 원제는 Medianeras. 영어 제목은 Sidewalls. 우리말로하면 (건물 등의) '측벽'이 되겠다. 사실 영화 자체를 위해서라면 측벽이라는 의미를 제목에 살려두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래도 각색한 한국어 제목은 입소문을 타기 유리한 편이 아니었을까.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배경이 되는 영화지만 여타 다른 아르헨티나 영화에서 볼 수있던 지역의 색깔이나 특유의 분위기는 거의 느끼기 힘들다. 사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배경은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아니라, 영화가 갖고 싶었던 배경은 바로 과도하게 급속히 성장해버려 그 부작용으로 꽉 막히고 망가져버린 도시. 바로 현대의 그 어느 도시 자체다. 많은 영화들이 단절, 분리, 개인화 등 도시가 우리 사이에 미치는 악영향을 역설하기 위해 그만큼 발전하고 개발된 현대식 도시를 즐겨 사용하곤하는데, 특히 이 영화에서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높은 인구 밀도와 성급한 도시 개발과 부족한 도시 계획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이런 효과를 톡톡히 해주고 있다. 영화는 한번도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작은 거리, 그들의 동네를 떠나지않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 도시가 주는 답답함과 단절됨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시종일관 착 가라앉은 나레이션과 중간중간 삽입되는 스틸컷들, 그리고 계속해서 연애 전선에 실패하는 두 남녀 주인공들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보기보다 이 영화는 굉장히 사랑스럽다. 아니, 귀여운 영화라고 해야할까. 90여분의 길지않은 시간동안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데다가, 각각 마틴과 마리안느 두 남녀의 각각 두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시퀀스의 낭비없이 영화의 구성이 조밀하고 꼼꼼하다. 덕분에 흡입력도 높은 편.


마틴(하비에르 드롤라스)과 마리안느(피욜라 로페즈 드 아얄라)는 겉보기엔 멀쩡한 도시남녀지만 각각 마음의 병을 안고 있다. 마틴에겐 공황장애를 비롯해 현대 도시인들이 몇가지씩은 의삼해볼만한 신체적인, 정신적인 불안이 있다. 빼곡히 들어찬 좁은 원룸들과 그 안이 닭장 속의 닭처럼 살고있는 그들. 일본식으로 말하면 히키코모리 같은 마틴은 자기 방에 앉아서도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세상이 한쪽 발을 담그고 사는데에 어려움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인터넷으로 생활의 불편함을 줄인다해도 마음 한 구석의 외로움, 아니 그저 누군가를 만나고픈, 사람의 온기와 관계까지 대신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의 곁에는 혼자라는 점을 계속 상기시키듯이 옛 연인이 흔적처럼 두고간 강아지 한 마리가 있다. 마리안느는 4년간의 연애를 끝내고 다시 싱글의 삶으로 돌아온, (영화 대사를 빌리자면) 인생 게임에서 5칸 후퇴한 상태다. 그녀 역시 마틴이 사는 원룸과 크게 멀지 않은 곳에서 비슷한 자신의 공간을 가진채 갇혀있다. 고층 건물들이 가득한 이 도시에서 폐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건 8층에 있는 자기 집이나 20층에 있는 식당에 오르내리는데에 매번 정말 큰 결심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들이 안고 있는 세세한 문제점들을, 자신의 세계로 자꾸 기어들어가려는 습성, 타인과의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막상 진지해지면 도망치고 싶은 그런 아이러니로 크게 확장 해석한다. 꽉 막혀 답답한 도시의 콘크리트 벽들이, 눈에 보이지않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그 주파수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메세지와 영상적 이미지들은 꽤 좋은 시너지를 낸다.


마리안느의 옆집에 어느날 피아노가 들어온다. 그리고 영화 중간중간 총 네번의 피아노 곡이 마리안느가 홀로 집에 있을때 벽을 너머 전해지는데, 이런 작위적이면서도 재치있는 배경 음악이 매번 유효하게 작동한다. 마리안느가 직장 동료의 껄끄러운 데이트 신청을 마지못해 수락하고, 20층이나 되는 식당으로 올라가기위해 계단을 겨우겨우 올랐다가 다 와서 황급히 도망쳤던 날, 집에 돌아온 그녀의 심리 상태를 대신하는 것은 들려오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아름답고 쓸쓸한 '비창'의 2악장이다. 그녀의 불안정과 예민함이 극도로 달해 급기야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머그컵을 던져버려 깨뜨리는 순간까지 연주되던 격정적인 곡은 프로코피에프가 전쟁 중에 작곡했다는 피아노 소나타 7번의 1악장이다. 수영장에서 만난 남자를 두고 '이번만큼은'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또 어긋나버린 후 돌아와 홀로 흐느낄때 옆집에서 들려오는 곡은 쇼팽의 에튀드 작품번호 10의 3. 바로 '이별의 곡'으로 알려져있는 그 곡이다. 매번 가슴을 후벼파는 옆집의 피아노 소리에 벽을 치던 그녀가 안정된 어느날 마지막으로 차분하게 들려오는 곡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첫번째, 아리아이다. 아무 반응도 없었는데 갑자기 뚝 끊긴 그 곡에 그녀는 이번엔 오히려 의아해하며 옆집을 살핀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한듯 곡은 다시 시작된다. 이후 30개의 변주를 시작할 변주곡들의 첫번째. 그녀는 그 후 자신의 방에, 건물의 '측벽'에 창문을 낸다.


마틴은 웹디자이너라고 했다. 그리고 마리안느는 옷가게의 쇼윈도의 디스플레이를 디자인하는 일을 하고 있다. 둘 다 '측벽'이 아닌 정면으로서 남들에게 일차적으로 보여지는 면을 꾸미는 일을 하고있다. 그런데 마틴의 사이트는 아는 의사의 것이고, 마리안느가 꾸미는 가게도 그녀의 건축물이나 가게가 아니다. 둘 다 자신들을 위한 정문은 없는 집에 살면서도 남들을 위한 '드러냄'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건물의 정면이 아닌, (원래는 건축 계획에도 없고, 심지어 불법이기까지한) 측벽쪽으로 자신들의 방을 위한 창문을 내기로 했을때, 그들의 창문은 측벽을 통해 서로의 집을 향해 난다. 정면을 꾸미는 일만 하던 두 주인공이 뚫은 창문은 살짝 엇나간, 그렇지만 기분 좋은 일탈이 되어 그들의 어두운 방이 햇볕을 들게했고, 그렇게 그 창문을 통해 마리안느는 그녀가 그토록 찾지못했던 월리를 찾는다. (엘레베이터를 타지 못하던 그녀의 공포증도 그 순간만큼은 예외다)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주된 모티브중 하나는 우리가 그림북으로 잘 알고있는 '월리를 찾아라'이다. 87년 영국에서 탄생한 이 세계적인 시리즈는 영화에서도 마리안느가 직접 그 책을 갖고 찾아보지만 '도시'그림에서만큼은 절대 찾을 수 없었다며 등장한다. (그녀는 일부 쇼윈도의 마네킹을 월리처럼 코디해두기도 한다) 나도 어렸을때 이 시리즈를 커다란 책으로 갖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렸던 내가 신기해했던 것은, 그 많은 캐릭터들이 모두 그림속 상황에서 각자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월리만큼은 어떤 곳에 있든지간에 책을 보고 찾고 있던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게끔 그려져있다는 점이었다. 더 말할것도 없이 '월리'는 이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에서 군중 속에 숨어있는 나의 연인, 운명을 뜻할 것이다. 마리안느와 마틴은 서로 만나기전까지 각각 몇번의 다른 이성을 만난다. 인터넷 소개팅 사이트나 우연히 마주친 이성과의 원나잇 스탠드.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운명의 서로를 만나기전까진 이별을 계속해야했다. 하지만 크루시픽스 크릭의 노래, 평행세계의 가사처럼, 마틴과 마리안느는 영화속에서 여러번 스쳐지나가거나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 영화를,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있다는 메세지로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의 엔딩이 시시하고 허무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인연은 그렇게 우연스럽고 동화처럼 찾아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서 이 사랑스러운 영화를 믿고 싶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아직도) 너무나도 좋아한다.





영화를 끝까지 다 본 분들이라면, 엔딩크레딧에 등장하는 그 뮤직비디오를 직접 유튜브에서 찾아보셨으리라 믿는다. 같은 검색어로 찾아보면 풀버전을 볼 수 있다. 영화를 못 본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에 링크는 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시고나서 꼭 확인하시길. 어쩌면 이 노래가 영화 도중에 삽입된 네 곡의 피아노곡 보다 더 직접적으로 와닿는 가사를 통해 영화의 결말을 전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덧글

  • 2014/07/03 23: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7/04 00:1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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