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Paju, 2009 Flims








어떤 영화를 말함에 있어서 그 영화의 주연 배우에서부터 들어가는 접근을 선호하진 않지만, 나는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배우 서우에 대한 생각을 꼭 여기에 적고 싶었다. 나는 늘, 배우 서우가 외모를 비롯하여 그 외의 다른 대중들의 눈을 흐리게만들기 쉬울 주변 요인들로 인해 그녀가 갖고있는 연기력이 실제보다 저평가되어 온 배우라고 생각해왔다. 마치 스칼렛 요한슨처럼 말이다. 물론 어떤 배우의 연기력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을 들이대긴 어렵다. 그렇지만 (그녀의 TV 드라마까지는 접하진 않은) 나의 생각은 이렇다. 박찬옥 감독의 영화 <파주>는 이선균보다도 서우의 연기가, 그 어느때보다 돋보이는 영화다.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감독은 <파주>를 내놓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테렌스 멜렉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시네아스트가 작품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었다는 것은 그만큼 과정에서부터 숙성된 영화라는 무책임한 기대를 갖게끔 만든다.






이 영화의 흥미유발용 홍보 전략과는 달리 실제 영화는 형부와 처제의 금지된 사랑보다는, 아내와 언니를 사별한 두 남녀의 모호하고 흐릿한 관계선 위에 놓여있다. 영화는 1996년과 2000년, 그리고 2003년이라는 세가지 다른 시간을 마음대로 넘나드는데다가 각 시점마다 변함없이 잘 드러나지않는 캐릭터들의 감정 때문에 굉장히 답답하고 불투명한 영화처럼 보이기 쉽다. 경기도 파주는 안개가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안개라는 상징은 이 영화에서 매우 은근하지만 광범위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 <파주>에서의 배경 파주는 흡사 영화 <만추>에서의 시애틀과도 상통한다. 영화는 은모(서우)가 파주로 택시를 타고 들어오면서 시작하고, 스쿠터를 타고 나가며 끝난다. 여기에서 파주라는 공간은 그녀가 어딘가로 떠나있다가 되돌아온 그녀의 과거와, 지금 되돌아온 그녀의 현재가 뒤엉켜질 고향, 그 이상의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 그것은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자 과거와는 또 다른 현재가 존재하는 곳이어야 성립한다. 그런 의미에서 옛것을 허물고 새것을 그 위에 쌓는 '재개발'이라는 키워드 역시, 영화의 배경인 파주라는 공간 위에 새겨진다.





중식(이선균)에겐 세명의 여자들이 곁에있다 떠나갔다. 첫사랑이었지만 상처를 입히고 떠난 여자, 결혼은 했지만 사랑을 다 주기도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여자, 그리고 그 사별한 아내의 동생이자 그 어디에도 꺼내놓을 수 없는 감정의 근원인 처제 은모. 영화는 중식과 은모 사이에 놓인 앞선 두 여자들의 이야기, 즉 1996년과 2000년의 이야기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놓으면서 동시에 2003년, 마지막으로 중식을 떠나갔다가 되돌아온 은모의 현재 이야기를 진행한다. 자신의 앞으로 된 모험금을 보며 언니의 죽음 뒤에 놓인 석연찮은 부분을 은모는 집착적으로 파헤치려고 다가가지만 과거에 기억하던 모습과는 또 조금 변한 중식을 보며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받아들이기 힘든 형부의 고백. 돌아온 은모는 중식에게 더 다가가지도 그리고 더 멀어지지도 못하는 인력과 척력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힘들다. 그녀가 갖고있던 오랜 주택부지와 파주의 재개발을 추진하는 힘 사이의 알력도 연약한 그녀가 두 다리를 온건히 지탱하고 서있게하기에 역풍이 될 뿐이다.







사실 영화가 넘나드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은, 그 순서를 헷갈리게끔 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현재의 파주의 모습은 규졍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은모는 다시 돌아왔던 파주를 떠나며 영화를 마친다. 은모가 돌아와, 중식으로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뭉뚱그려놓았지만 결국 사라진 현재의 투쟁과 목적 의식들은 그 명쾌한 설명들을 잃어버린지 오래고 새로운 사건들의 전개들은 대부분이 우연과 충동에 의지할 뿐이다. 영화 <파주>에서 깔끔하고 분명한 서사의 연결고리들은 파주를 뒤덮은 안개처럼 우리의 시야에서 닿을듯하지만 늘 닿지않는 곳에 놓여있다. 은모의 중식을 향한 마음이나, 중식의 은모를 향한 마음은 모두 드러남을 철저히 두려워하는 모양새고 과거에서든, 현재에서든 이 둘의 자세는 바뀌지 않는다. 적당한 가까움과 적당한 거리감. 영화는 우리 관객와도 이런 미묘한 밀고당기기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나는 너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나는 너를 언제나 사랑해왔어"와는 전혀 다른,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이 기묘한 부정의 부정. 나는 이 영화의 소리없는 클라이막스인 중식의 이 대사가 가진, 부정을 다시금 부정하는 한 문장이야말로 처제와 형부 사이의 모호하고 미묘한 기류를 제대로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사랑해주지도 못했던 아내의 여동생에게 감정을 품었던 중식의 자기연민, 마음에 들지 않았던 형부의 자기 고백에 대한 은모의 배덕감. 둘은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는 누구를 향해있는것도 아니라서 더욱 모호하다. 재개발 반대 투쟁의 선봉에서 전념하는 모습으로 바뀐 현재의 중식에게 은모는 왜 그렇게 열심이냐고 묻는다. 중식의 '잘 모르겠다'는 대답은 맥이 빠질 지경이지만 사실 그 앞서 '처음엔 멋있어서, 그 뒤엔 갚을게 많아서'라는 부연들은 중식이 떠나보낸 앞선 두 여인에 대한 자기 반성이자 스스로 택한 속죄의 길이 아닐까.







파주로 돌아오면서 영화를 시작했던 은모의 행보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파주를 떠나며 영화를 닫아간다. 이런 마지막 장면은 (감독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가 첫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나는 왠지 <파주>의 그 마지막 서우의 표정과 눈빛을 보여주기위해서 이 영화를 찍었다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상의 모든 선의가 반드시 올바른 과녁에 적중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자신들에게 불리할 정책들을 이상하게도 지지하게 되는 대중의식과 그것을 의도하는 모종의 권력 사이의 관계로도 읽힐 수 있다. 중식의 감싸안음에도 불구하고 은모는 중식을 고발하고, 결과적으로 오히려 자신을 위협하던 보스(이경영)에게 좋을 일을 해주고 만다. 표면적으로 나서진않는 보스의 존재는 은모를 직접적으로 조종하지 않지만 은모는 알 수 없게도 그의 의도대로의 결과를 내어준다. 중식의 속내는 끝내 은모에게 전달되지 않지만 (아마도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지만), 은모에게 전달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그 호의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정녕 중식의 자기 위안에 그치고만 것일까.











덧글

  • 2014/04/17 22:3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4/21 09:3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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