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센스, Perfect Sense, 2011 Flims










촉각, 미각, 후각, 시각, 청각. 다섯 가지 오감으로 대변되는 이 기능은, 우리가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거나 알아차리는 방식이자 수단이다. 우리는 이것을 감각이라 부른다. 한편 이렇게 수용된 자극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기분이나 마음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감정이라 부른다. 과거 심리학에서는 감각과 감정을 하나로 묶었던 적이 있었을 만큼, 둘의 상관관계는 제법 밀접하다. 물론 감정의 모든 원인이 감각에만 있을 수는 없으며 모든 감각이 감정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감각은 객관적이고 감정은 주관적이라는 말이 있지만 감정은 감각에 비해 그 규정이 더 모호한 영역에 있다. 편의상 감각을 input으로, 감정을 output이라고 생각한다면 문득 궁금해진다. 사랑은 감각일까, 감정일까? 감각을 수용하는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감정이 발현되는 순간부터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은 어디쯤 위치해 있는 걸까.







영화 <퍼펙트 센스>는 감각이 소거된, 그리하여 감정마저 소모된 세상에서 사랑은 무엇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를 묻는 영화다. 2011년 1월, 선댄스 영화제 출신인 이 영화는 저예산 인디영화 수준. 작년 한 이웃 블로거님께 추천받은 덕에 뒤늦게 접한 영화였지만, 그러나 내겐 정말 숨겨진 보석 같은 영화로 남아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이야기, 배우, 전개 방식, 영상, 음악등 다방면에서 내 취향을 만족시켜주었다. 2011년 선댄스에는 유난히 내가 국내개봉을 희망했던 영화들이 많은데, ‘디어 한나’라는 이름으로 국내 개봉했던 <티라노소어>를 비롯하여 <라이크 크레이지>나 <어나더 어스>, 이와이 슌지의 <뱀파이어>가 있었다. <퍼펙트 센스>는 독립영화들의 축제인 이 2011년 선댄스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내가 선댄스영화제 출신 영화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헐리웃의 자본력과 정면 승부를 하지 않는(할 수 없는) 영화들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려는 경향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댄스에서 호평을 받은 영화들을 눈여겨보고 있자면 한정된 제작비 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만족시키는 경우가 아주 많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촬영된 이 영화에는 영국 출신의 감독 데이빗 맥킨지와 스코틀랜드 배우 이완 맥그리거, 프랑스의 에바 그린이라는 독특한 조합이 있다. 특히 에바 그린 특유의, ‘영어를 프랑스어처럼’ 말하는 독특한 억양과 그녀의 차분한 나레이션이 이 영화를 이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영화 전반적으로 흐르는 잔잔하고 점차 고조되는 관현악곡과 아주 잘 어울리며 이 두 요소는 90여분의 길지 않은 영화에 몰입을 높인다. 영화에 사용된 음악은 막스 리히터의 작품으로서 차가움과 따듯함을 모두 머금고 있는, 이 영화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에바 그린과 이완 맥그리거라는 두 배우의 콜라보는 이 영화의 큰 동력이다. 둘의 캐릭터는 마치 <몽상가들>과 <트레인스포팅>에서의 젊고 어렸던 주인공들이 각자 조금씩 성장한, 그러나 그때의 모습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라 더욱 정감이 간다. 그 외에도 이완 맥그리거와 <트레인스포팅>에서도 함께 했던 이안 브렘너가 조연으로 출연한다. 또 다른 조연인 데니스 로슨은 이완 맥그리거의 실제 삼촌으로, 스코틀랜드가 배출한 명배우 중 한명이다. 이완은 삼촌의 연기를 보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했던 만큼 그는 삼촌과 한 영화에 출연하기를 오랫동안 바래왔고, 그의 소망은 이 영화로 뒤늦게나마 실현되었다. 둘은 각각 스타워즈 시리즈 여섯편 중, 서로 세 편씩 출연한 독특한 사연이 있는데, 데니스 로슨은 앞서 개봉한 4,5,6부에, 이완 맥그리거는 오비완 역으로 이후 세편인 1,2,3부에 출연했다. <퍼펙트 센스>에서도 데니스 로슨은 레스토랑의 사장, 이완 맥그리거의 캐릭터 마이클이 수석요리사로 있는 레스토랑의 보스 역할로 출연했다.


영화는 연속적이고 빠른 스냅샷 스트리밍을 삽입함으로서 영화의 시야를 전 세계, 범지구적으로 확장시키는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이야기는 글래스고를 벗어나지 않지만, 그 덕분에 벌어지고 있는 재난은 전 지구적인 현상으로 각인시켰다. 하지만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당위성이 없는 전개라 질병영화나 재난영화로 분류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그토록 이 영화엔 질병의 원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을 <컨테이젼>같은 재난 SF영화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 묵시록적 질병은 사실 사랑을 말하고자하는 은유로서 사용되었다. 이제 조금 더 영화로 들어가보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영화 속 세상은 정반대로 감정을 겪을 때마다 감각을 잃어간다. 슬픔을 겪고 후각을 잃고, 공포를 겪고 미각을 잃고, 분노를 겪고 청각을 잃고, 마지막으로 기쁨을 겪고 시각을 잃는다. 격한 감각이 감정을 유발하는 보통의 경우와 반대로, 감각을 잃기 직전 격한 감정의 밀물이 다가온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그 감정의 밀물은 감각을 씻어가 버린다. 타당한 원인도 이유도 없고, 세상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본 채 감각의 상실을 받아들인다. 이 재앙 속에서 마이클(이완 맥그리거)와 수잔(에바 그린)은 서로에게 사랑을 느낀다. 첫 감각의 상실인 후각을 잃던 날 밤, 처음 만난 그들은 감각의 재난이 거쳐 갈 때마다 이끌림과 멀어짐의 단계를 지나간다. 모든 감각이 사라져갈 때 사랑은 이제 무엇으로 확인될 수 있는가.







영화엔 감각의 상실이 현상이라면 그 위에 계속 덮어씌워지는 또 다른 화두가 있다. Life goes on. 삶은 계속 된다-라는 지속성이 그것이다. 질병학자인 수잔에 비해 요리사인 마이클의 레스토랑이 이 문장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미각과 밀접한 후각이 사라졌을 때, 그리고 뒤이어 미각마저 사라졌을 때, 레스토랑은 더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요리와 시각적인 효과, 그리고 청각을 이용하고자 질감을 살린 재료와 요리로 그들의 삶을 계속해나가려 한다. 그리고 이 시도는 효과를 거둔다. 잃어버린 감각을 대신하는 남아있는 다른 감각의 사용은 대단원에서 사용될, 감각이 사라지고도 사랑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결말과 상통할 준비를 한다. 물론 다섯 가지 감각 중 세 가지를 잃고 외식업은 절망과 좌절의 밑바닥에 빠지지만, 최후에 느끼는 사랑과 용서의 제스처는 데니스 로슨과 이안 브렘너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들의 레스토랑은 그렇게 삶을 은유한다.








이제 사랑으로 돌아와 보자. 네 번째 감각 중 촉각을 남겨두고 시각마저 사라져갈 때도, 그래도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서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 나래이션은 영화의 첫 나래이션과 맞물리는데, 맨 처음 수잔은 모든 감각들을 동원하며 지금 세상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나래이션에서는 시각마저 꺼지고 영화의 화면도 꺼졌을 때, 누구도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오직 사랑만을 느낀다고 말한다. 의식과 감각이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는 대답에 도달하는 것이다. 마이클과 수잔은 비슷한 인간이다. 마이클은 누군가와 함께 잠을 못자는, 가벼운 사랑을 하며 사랑의 감정을 자극적인 음식의 감각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남자다. 그에게 사랑은 감각이다. 수잔 역시 누군가와 오래 연애하지 못하는 여성으로 새로 만나는 남자조차 잘 믿지 못하며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여자다. 사랑을 시작하기에 좋은 한 쌍은 아니지만 우리라고 한들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감각들. 오히려 그것들이 불필요한 감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 때, 감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특히 서로 분노를 느끼고 뒤이어 청각 상실의 시간차 공격을 당할 때의 시퀀스가 인상적인데, 먼저 분노를 느끼며 수잔을 도망치게 했던 마이클이 곧 청각을 잃고 후회감에 수잔에게 전화로 진실 된 고백을 하고 있을 때, 수잔은 뒤늦게 혼자 분노를 발산하며 자신이 화를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마이클이 전화 너머로 전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혀 듣지 못한다. 물론 그녀도 곧 뒤이어 청각을 상실하며 둘은 소리로 사랑을 전할 방법을 잃지만 말이다. 






물론 영화는 충분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결말은 자문에 답하기엔 미진하다. 감각들이 사라져가도 사랑은 최후까지도 살아남을 완벽한 감각이라는 설은 설명이 부족하고 조금 억지스러운 면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 질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만을 하는 데에 익숙해져있다. 사랑의 근원이 감각이고 사랑의 발현이 감정이라는 것에만 익숙한 우리에게 이 영화 <퍼펙트 센스>는 사랑의 본질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까지 표현될 수 있는지를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든다. 아울러 내가 느껴온 사랑의 감정이란 것이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인지, 원론적으로 사랑은 감각을 종합적 재료로 삼은 감정의 일종인지 혹은 독립된 별개의 감정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질문에 질문을 꼬리 물게 만드는 흥미로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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