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Flims









나는 작년과 올해,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최신 작품 두편이나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각각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데인저러스 메소드>와 로버트 패틴슨의 <코스모폴리스>는, 그러나 공히 실망스러웠다. 나는 80, 90년대의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을 모두 보진못했지만, 적어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이후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는 <폭력의 역사>라고 여지껏 주장하는 중이다. (<이스턴 프라미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물론 있을 수 있겠다.) <폭력의 역사>는 총과 유혈과 갱들과 살인이 등장하지만 느와르라기보단 스릴러에 가까운 영화다. 영화의 전반부는 우리가 이 영화를 일종의 느와르라고 믿어버리게끔 만든다. 영화의 전반부는 서부극의 공식을 인디애나의 조그만 마을에서 재현한다. 평화롭고 작은 마을,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있고 듬직한 가장. 그리고 웨스턴 바를 연상시키는 구조의 톰(비고 모텐슨)의 카페. 들이닥친 무법자들과 그들로부터 가족과 마을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가 많이 보아온 서부극의 공식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나 두번째 찾아온 갱이 총 대신, 꿋꿋이 톰을 조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관객인 우리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어떤 비밀을 조금씩 보여주려하기 시작한다.






한 가족과 가장의 이야기를 빌어 폭력의 역사라는 대담한 제목을 붙인 배짱은 과연 크로넨버그의 것이어야하지 않을까.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부터, 방금 막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듯한 두 남자가 체크아웃을 하고 길을 떠나려한다. 평범해보이는 이들의 대화 이후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가장 강도높은 폭력중 하나인 살인이 이미 벌어지고난 뒤의 풍경이다. 그토록 강렬한 이미지로 영화는 폭력의 잉태를 알린다. 이 영화의 시작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는 안다. 좀 더 젊은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계속 동부로 가는 거냐"고 물었던 영화의 첫대사는 이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이 오프닝 시퀀스가 어디에서 벌어지는 일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이 인디애나의 서쪽에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이후 인디애나의 작은 마을 멜브룩 있는 톰 스톨에게 도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인디애나에서 필라델피아로 움직이는 톰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인디애나와 필라델피아라는 두 공간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한명의 톰에게 아주 유효하게 작용한다.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으로 유명해진 비고 모텐슨의 표정 연기는, 영화을 보던 우리조차 그의 '톰으로서의 삶'을 결정적인 순간까지 지지하게 만든다. 그는 이후 크로넨버그 감독과 두편의 영화를 더 함께했다. 캐나다인 할아버지와 덴마크인 아버지를 둔 그는 최소 4개 이상의 국어를 수준급 이상으로 구사하는 배우로 알려져있는데,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 톰이자 조이를 연기하기위해 그는 인디애나와 필라델피아의 미묘한 억양차이마저 완벽하게 연기했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른다.) 에드 해리스의 칼 포가티는 냉혈적인 이미지를 자주 맡아온 그에게 어렵지않은 얼굴이었으며, 조이의 형인 리치역으로 극의 후반부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연기를 펼친 윌리엄 허트가 빼어나다.







20년 이상 조이가 아닌 톰으로 살아온 그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자신의 과거들은 숨기고싶으며 더이상 현재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었을 것이다. 킬러이자 갱이었던 조이의 첫번째 폭력은, 자신의 카페에 들이닥친 2인조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표출되었다. 그것은 총을 들고 살해위협까지 했던 범죄자들에 대한 정당방위었을지는 몰라도 크로넨버그는 그들의 응징을 적나라하고 잔인하게 날 것 그대로 클로즈업한다. 그것은 폭력에게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지 그 본질은 영화 오프닝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자들과 크게 다를바 없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톰은 정당한 폭력, 영웅적인 폭력의 구사자로서 마을사회에서 칭송받는다. 그러나 톰 자신에게는 내면에 잠들어있던 과거의 조이를 깨우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고 그는 이런 폭력성과의 재회가 전혀 반갑지않다. 







서쪽에서 찾아온 2인조가 톰의 폭력성을 다시 깨운 뒤, 그에게 칼 포가티(에드 해리스)가 찾아온다. 그는 톰을 조이로 기억하고 알아보는 남자다. 한쪽눈에 깊은 상처를 갖고있는 그는 그 상처가 지금의 톰, 과거의 조이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며 그로하여금 함께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러나 톰은 지금 있는 자신의 집과 마을, 즉 톰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을 떠나지않겠다며 버틴다. 조이의 과거가 정확히 어떤 사연을 갖고있는지 영화는 친절하게 알려주지않는다. 오직 칼이나 리치와의 대화, 분위기만으로 어렴풋이 그려놔야할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건 조이였던 시절의 그의 모습이 아니라 그때의 과거가 현재에 미치고 있는 영향 그 자체이다. 그가 왜 칼의 눈을 다치게했는가, 그는 왜 필라델피아를 떠나 톰으로 새로 태어났는가 등 그의 과거는 그의 '과오'가 아니다. 물론 그는 지난 과거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신분을 속이고 새 삶을 찾고자했지만 이 영화를 업보와 후회에 대한 영화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톰이 필라델피아로 날아가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는 영화 후반부가 있기 때문이다. 톰에게 닥쳐온 것은 과거를 더이상 회피하기 어려운 곤란함이지만 그 과거를 그는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자했던 폭력을 통해 정리한다. 즉 <폭력의 역사>에서의 과거는 현재의 톰에게 벌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로하여금 폭력의 중단, 새출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폭제이다. 그렇게 폭력은 근절되지 못하는 연대기를 갖는다. 인디애나에서 펜실베니아로, 톰에서 조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폭력은 그렇게 역사를 갖는다.







폭력의 역사는 조이이자 톰이라는 개인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톰의 아들 잭은 학교에서 싸움을 거는 불량배들이 있으면 오히려 자리를 피하는, 비폭력을 선택하는 아이였다. 톰은 잭에게 특별히 더 폭력에 대해 엄격하게 가르켰다. 그런 톰의 바람대로 잭은 싸움을 피하는 아들이 되었지만 톰이 가게를 습격한 두명의 갱을 죽인 뒤, 잭은 학교에서 다시한번 시비를 건 아이들을 때려눕힌다. 톰이 겪은 변화의 그 날 이후,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잭도 이젠 더이상 참지 않고 폭력으로 되갚는 아들이 된 것이다. 아버지의 폭력은 아들에게 계승된다. 그것은 톰의 의지와 무관했다. 아들로 계승되는 폭력을 톰도 막지 못함은 그 다음 시퀀스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잭이 다른 학생을 때리고 집에 온 그 날 톰은, 잭에게 비폭력에 대하여 호되게 꾸짖다가 집을 나가버린 잭이 오히려 칼 포가티 일당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어 돌아오는 장면과 맞딱드려야 했다. 폭력의 대물림을 막기위해 강하게 억제해보려했지만 오히려 엇나간 아들은 더 큰 폭력의 빌미로 되돌아왔고, 톰은 결국 아들을 구하기 위해 조이로 되돌아갔다. 그 짧은 총격전안에서, 적들의 피를 뒤집어쓴 톰과, 위기의 아버지를 살인으로 구해낸 잭의 포옹은 마치 체념의 제스쳐와도 같다. 이후 후반부는 조이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의 필라델피아 행이다.




그렇게 잭을 다시 조이로 되돌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소 놀라운 결말을 보여준다. 가족과 마을 사회에서 지지받고 폭력이 수용되던 남자는, 불가피하게 과거로 소환당해 필라델피아까지 다녀왔다. 현재로 되돌아온 톰은 그러나 이제 더이상 톰이 아니다. 하지만 남편의 과거에 충격과 배신감을 느끼던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와 두 아들 딸, 가족들에 의해 그는 저녁 식탁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한마디 대사조차 없는 엔딩 시퀀스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제는 폭력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톰에게,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모르던 그 장면에서 가장 어린 딸 사라가 아버지에게 접시를 건네주고, 아들 잭이 음식을 덜어주며, 아내가 마주보며 눈물 짓는다. 가족들은 톰의 과거를 이제 알지만 그것을 수용하기로 한 것이며 이제 그들은 그 폭력의 역사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톰의 과거를 의심하는 마을 경찰이 찾아올때마다 그를 변호할 것이고, 과거 킬러였던 아버지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 마지막 순간에, 영화의 첫 시퀀스 직후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 딸 사라의 장면으로 되돌아가보자. 사라가 괴물을 보는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깼을때, 그녀에게 달려온 세 가족의 대사들은 이 영화의 결말을 암시한다. 여기서 괴물은 폭력임을 말할것도 없다. 톰은 단지 악몽일 뿐 실체하는 괴물은 없다고 부정하고, 뒤이어 잭은 괴물은 무섭긴해보이지만 빛이 켜있을때는 아무것도 못한다며, 그 자체 존재의 부정보다는 안고가는 쪽을 택한다. 이후 늦게 다가온 에디는, 그래서 불을 켜놓고 자겠다는 사라의 말에 그렇다면 문제없다며 그 임시방편을 수용하려한다. 이것은 모두 이 영화에서 보여질 가족들의 폭력에 대한 인식, 대처, 선택지가 된다.


자신을 향하는 표적에겐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지만, 자신이 속해있는 영역에서는 지지를 받고 정당함을 부여받는 톰의 모습은, 미국의 얼굴이기도 하다. 인디애나에서는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톰이지만, 펜실베니아에 밤에 도착한 조이의 원정은 잠재적 위협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선제공격처럼 볼 수도 있다. 폭력은 그가 종종 다루던 테마이지만, 어쩌면 911테러를 당하고 이라크 전쟁을 벌인 미국의 얼굴을 크로넨버그는 종전 두해안에 그려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덧글

  • 파도치는소리 2014/08/03 22:08 # 삭제 답글

    네 가족의 마지막 장면 그리고 딸 사라가 잠을 깨는 장면을 절묘하게 잘 분석하셨네요
    잘 보고 갑니다
  • 레비 2014/08/10 23:52 #

    방문과 칭찬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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