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Last Autumn, 2010 Flims











엊그제 2013년 11월 7일은 겨울의 시작이라는 입동이었다. 절기의 변화에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지난주는 공식적으로 가을의 마지막 한 주였던 것이다. 게다가 은행잎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는 대학교 캠퍼스의 늦가을 풍경은 제법 괜찮다. 두 공대건물 사이에 양쪽으로 늘어서있는 노란 은행잎들이 가장 보기 좋은 시기가 바로 요즈음이다. 여름과 겨울이 해마다 길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점점 짧아지는 점은 여전히 아쉽지만, 그 가을이 아무리 짧아진다한들 가을은 여전히 가을만이 갖고 있을 수 있는 정취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적인 계절. 쓸쓸하지만 동시에 낭만적인 계절. 김태용 감독의 2010년 영화 <만추>에서의 안개 낀 시애틀은, 마치 영원히 가을에 머물러있는 도시 같다. 영화에는 탕웨이와 현빈이라는 두 아시아 배우를 캐스팅했지만,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애틀은 영화의 세 번째 주인공이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길을 정신없이 내달리던 애나(탕웨이)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지나온 길을 되돌아간다. 되돌아간 집에는 남자 한명이 죽은 듯 쓰러져있다. 시체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애나에게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영화의 프롤로그는 끝난다. 그 사이렌 소리는 애나의 시간을 그 지점에서 중지시키고 7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오게끔 만든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교도소로부터 특별 외출 허가를 받은 수감인 애나는,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지 못한다. 시한부인 특별 외출 중 애써 여유를 부려가며 새로 산 옷들을 입고 길을 나선 순간, 넣어둔 코트 안에서 울리는 교도소로부터의 전화소리는 그녀를 다시 멈춘 시간 속으로 깊게 끌어당긴다. 일가친척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두고 어제 오늘 일처럼 티격태격하고,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듯 한 표정으로 애나를 바라본다. 옛 연인인 왕징(김준성)은 그녀가 수감되어있던 사이 가정을 꾸렸다. 그녀의 시간은 그렇게 7년 전에 멈추었지만 그녀를 제외한 세상의 시계는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는 한 남자가 있다.


훈(현빈)의 애나를 향한 다가감과 이끌림은, 첫눈의 사랑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자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에스코트 서비스맨’이다. 이국땅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여자들을 상대로 사랑의 요구를 대리적으로나마 채워주는 일을 하는 남자다. 여자가 원하는, 행복하게 만들어줄 모든 것들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 남자는 버스 값을 핑계로 애나에게 자신의 시계를 빌려 준다. 그 시계는 물론 훈으로 하여금 애나를 다시 찾을 빌미를 제공하지만, 애나의 멈추어있던 시간은 그때부터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불과 며칠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이국땅에 온 것처럼 집으로 잠시 돌아온 그녀의 닫혀있던 마음은 그녀의 굳은 표정과 굳게 닫힌 입은 그때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영화 <만추>에서 탕웨이의 표정 연기가 가장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이 영화는 탕웨이라는 배우를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지를 잘 알고 있다.


<만추>는 분명 사랑 영화이지만 동시에 사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훈과 애나의 사랑은 불같이 타오르지 않는다. 영화의 가장 극적이고 격정적인 부분은 한마디의 대사도 없는 후반부의 롱테이크 키스씬이 전부다. 둘은 충분한 시간을, 충분한 대화를 공유하지 못했다. 심지어 애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마침내 털어내는 순간에도, 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말하며 훈은 눈치껏 자신이 아는 유일한 중국어 두 마디로 호응을 대신하지만 애나는 그것을 ‘말함으로서’ 충분히 자신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들 수 있었다. 그녀는 훈의 방에 원래 그의 것이었던 시계를 놓아두고 혼자 어머니의 관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만추>에서의 사랑은 애나의 멈춰진 시간을 흐르게 한다. 만추라는 늦가을은 겨울로 넘어가는, 가장 정적인 계절이 예고된 시간이다. 그렇게 애나의 시간은 다시 흐르지만 그녀의 손목에 시계를 놓아둔 훈은 그녀가 겪었던 방식과 같이 -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억울한 살인죄로 인해 세상의 시간으로부터 멀어진다. 애나가 버스로 돌아오지 않는 훈을 찾아 헤매다 마지막에 고정시킨 시선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카메라는 관심이 없다. 다만 들려오는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는 영화의 시작, 그녀의 시간이 정지되던 순간 들려온 사이렌 소리와 같다. 이 장면은 직후 영화 에필로그에서 출소하는 애나의 장면과 이어지며 마치 훈이 애나의 짐을 대신 가지고 사라지는, 희생 장면처럼 느껴지게끔 한다. 에필로그에서 다시 훈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타난 애나는 영화를 보던 관객들과 함께 훈을 기다리지만 혼잣말로 재회를 대신한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이 영화 내내 보기 힘들었던 미소가 번져있다. 훈과의 인연과 만남과 사랑은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서도 조급하지 않게 서서히 짙어졌을 뿐이었지만, 애나는 옛 연인의 살인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아무렇지 않게 행복한 가정을 갖고 있는 왕징에 대한 회환으로부터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그 늦가을은 애나의 삶을 다시 흐르게 했다. 순간을 명멸한 사랑은 애절하지만 그래서 아름다웠다.





덧글

  • 2013/11/09 20:3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11/10 21:4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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