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 The Grandmaster, 2013 Flims




<일대종사>의 한국어판 포스터를 처음 보게되었을때, 사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포스터에는 소심하게도 "왕가위 감독의 9년만의 귀환"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9년전이란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2046>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2008년 국내 개봉했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완벽히 '없는 영화'로 만들어버린 홍보문구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물론 '몇 년 만의'라는 수식어는 과장될수록 그 효과가 좋겠지만 그래도 나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왕가위의 특별 부록, 잠깐의 외도 같은 그의 번외편이라고 믿는다. 이수 아트나인에서 <일대종사>를 보고,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기억 속의 숫자들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화양연화>는 1962년에 시작해서 1966년에 끝나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후 에필로그가 있긴하지만 무시하자) 그리고 <화양연화>가 끝나는 1966년부터 다음 영화 <2046>이 시작된다. 왕가위가 그렸던 60년대의 홍콩을 <일대종사>는 1936년 중국 불산에서 시작하여 엽문(양조위)이 홍콩에서 사망하는 1972년 안에 품는다. 이 40여년 안에는 일제가 중국과 홍콩을 침략했던 4년여도 포함되어있다.



난 왕가위의 무협 영화가 익숙하지도, 반갑지도 않았다. <동사서독>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에 <일대종사>를 보기전부터 걱정이 앞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대종사>는 다행히 무협영화나 격투영화가 아니었다. 영화에서 사용된 격투씬들은 무협이라기보단 춤에 가깝다. 기억하고있기에도 어려운 무협과 무림의 단어들이 다소 거론되지만 스토리를 따라가는데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영춘권을, 엽문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영화를 보았지만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중경삼림>, <타락천사>, <화양연화>, <2046>의 촬영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도일의 이름은 없다. 특유의 진한 색채나 점프샷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영상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인물의 얼굴을 화면의 한쪽에 두고 다른 한쪽을 공허히 비워두는 컷들을 유난히 많이 쓰고 있는데, 왕가위는 <화양연화>에서와 같이 비어있는 공간과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두는 얼굴들로서 그들의 마음을 표현했다. 또한 이것은 한편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제로 인해 북방에 가지 못하게된 엽문과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전혀 다른 삶을 살게된 궁이(장쯔이)의 안타까운 엇갈림은, 한번의 손의 스침으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끝맺게 된 <화양연화>를 반복한다. 택시안에서 수리첸과 포개진 손을, <일대종사>에서의 양조위는 금루에서의 한번의 대결로 대신하고 있다.



일선천역이었던 장첸의 분량이 아쉽다. 일설에 의하면 많은 부분 편집되었다고 들었는데, 때문에 일선천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의 번외편같다. 일선천이 전쟁 후 조직을 벗어나기위해 벌이는 빗속에서의 한번의 격투씬은, 영화 시작과 함께 했던 엽문의 일대다수의 격투씬을 떠올리게하는데 이 두 장면에서는 모두 빗방울이 땅에 닿는 슬로우 씬들이 중복되지만 전자에서는 피가 섞인 빗방울이, 후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다. 일선천의 희석된 캐릭터성을 그나마 붙잡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무림의 영웅들이 각자의 기술이나 무예들을 보유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캐릭터들이 구사하는 기술들은 곧 그대로 그 캐릭터 자체일 수 있다. 장첸의 편집된 이야기가 더 보고 싶다. 장쯔이와 양조위는 영화 <영웅>과 왕가위의 <2046>에 이어 세번째 만났다. <2046>에서의 주인공 차우였던 양조위는 콜걸 바이링을 연기했던 장쯔이와 다시 만났다. 하지만 <일대종사>에서의 모양새는 <화양연화>와 더 흡사하다. 궁이가 아버지의 제단에서 머리를 벽에 맞대고 선택의 지혜를 구하는 장면은 <화양연화>에서의 장만옥의 모습을 떠올리게한다. 양조위는 <중경삼림>에서 왕정문의 다리를 마사지해주고, <2046>에서는 한때의 행복했던 때를 회상하면서 역시 왕정문과 함께 지붕 위에 올라가 웃고 있었던 장면을 <일대종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왕정문이 송혜교로 바뀌었을 뿐. 게다가 두번째 장면 역시 이번에도 회상에서 쓰였다.




엽문의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영화가 말하는 삶의 일대기는 궁이의 지나온 삶을 엽문에게 고스란히 전하는 형상이다. 궁이의 과거와 현재까지를 보여주고 이제 엽문의 현재와 미래를 열어놓은채 끝낸다. '일대종사'라는 네음절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범인이 도달하기 힘든 경지의 높이가 서려있지만, 동시에 지금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쓸쓸한 단어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번 왕가위의 영화들을 돌아보며 말미에 <일대종사>를 51%의 기대와 49%의 걱정으로 기다린다고 썼다. 전작의 연속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챕터를 여는 첫 페이지가 될지 몰라서였고 또 그것이 궁금해서였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헐리우드로 옮겨간 왕가위의 '여전함'이었던 것 같다. <2046>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만 <일대종사>에서의 엽문은 돌아보지 않는다. 후회란 당연한 것이라고 궁이는 말해준다. 중국 남북 무림의 최고 자리에 올라선지 몇년 사이에 그는 무예와 무술의 경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시대의 풍파와 가난이라는 시련을 맞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후 돌아가지 않았다고 영화에서 말하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화려한 금루에서 영웅들과 대결을 펼치던 그가 홍콩에서 도장에 들어가 어린 아이들을 가르키고 사부가 되는 장면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생무상을 뜻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궁이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남은 인생을 포기했고, 그녀는 비록 복수를 달성했지만 쓸쓸한 마지막을 기다려야했다. 그것이 지조고 절개라고 치켜세워지던 시대에 살았던 궁이. 하지만 사랑했던 아내와 사랑했던 여인을 잃은 최종의 엽문은 홍콩으로 건너가 '중생까지 살피라'는 궁이의 마지막 뜻을 계승하여 일대종사가 된다. 과거에 갇혀 있던 궁이의 삶을 거울로 비추어보듯 엽문의 삶을 대신 반추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왕가위의 어떤 선포처럼 들렸다. 다시한번 말해서, 나의 걱정과 기대는 모두 그만큼씩 가지고 있었다. 왕가위는 자신의 전작들을 은근하게 보여주면서도, 실패라고 회자되는 헐리우드에서의 첫 영화를 뒤로하고, 그는 기존의 묶음을 닫아가고 새로운 챕터를 이제 열고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엔딩 크레딧 추가 영상에서 볼 수 있는 엽문의 이어지는 액션씬들은, 흐름상 홍콩으로 건너간 이후의 엽문의 미래와 도전, 그것의 당당한 받아들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나서, 왕가위는 우리에게 어느 문파인가를 자신있게 묻는다. 이제 걱정은 내려놓아도 좋을 것 같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http://pequod.egloos.com/2841349









덧글

  • 아느 2013/09/09 00:29 # 답글

    일찌감치 보고 온 일대종사... 레비님 후기 읽으니 산뜻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후기, 기다렸어요. '일설에 의하면' 감독판 편집본은 4시간이라던데 dvd로 볼 수 있을지. 틀어보기에도 무시무시한 분량일 듯 ㅋㅋ 장첸의 분량이 역시 아쉽기는 아쉽지요. 적으셨듯이 엽문이라기보단 궁이에 초점이 당겨진 영화였네요. 어린 궁이가 눈밭에서 춤추듯 무예를 연마하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아요. 아직 안내렸다면 한번 더 보고, 감독판 dvd로 눈길을 돌려야겠습니다.
  • 레비 2013/09/15 19:18 #

    일찍 보셨군요 :) 저도 그 이야기 들었어요 ㅎㅎ 실제로는 훨씬 긴 영상인데, 이것을 자르고 자르다보니 장첸은 거의 통편집 당했다고...ㅠ 장첸이라는 배우를 좋아하기도하는데, 이렇게 많이 잘리고 또 이야기와도 겉도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어요.

    어린시절의 궁이가 나오는 북방의 배경은 아름다웠죠? :) 장례행렬에서도 순백의 풍경이 예뻤는데, 대나무숲 속에서도 혼자 연마하는 모습도 아름다웠어요 :) 저도 DVD를 꼭 사야겠습니다 !
  • 비주 2013/10/24 14:45 # 답글

    막 내리기전에 가까스로보고 영화 음미하기도전에 바삐살다 레비님 리뷰 읽어보려고 들어왔는데 다시금 새록새록하네요ㅎㅎ 저는 왕가위감독님 전작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대기라는 소재 때문인지... 그래도 좋았습니다!! 여전히 아름다운 화면과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하며ㅎㅎ 레비님 리뷰읽어보니까 더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사실 전 장첸보러 갔는데 어쩐지 적다했더니 편집한거군요ㅠㅠ 아무튼 <일대종사>로 인해 다음 작품이 어찌될지 너무 궁금해졌어요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네욤!
  • 레비 2013/10/28 02:29 #

    앗 다행이네요 ㅠ ㅎㅎ 왕가위의 영화는 영화관에서 볼 기회가 매번 많지않아서 걸려있을때 꼭 봐야합니다..! ㅋㅋ 저 역시 전작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 그래도 그 속에서 전작들에게서 포기하지 못한 의식들은 여전히 붙잡고 있는듯해서 어찌보면 반갑기도했어요 ㅎㅎ 전 장첸이라는 배우를 참 좋아하는데, 이 영화에선 많이 아쉬웠어요 ㅠ 이제 또 몇년을 기다려야 다음 작품이 나올지 ㅠ 흑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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