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더 하우스, Dans la maison, 2012 Flims





다르게 말하면, 영화는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허락된 합법적이고 적법한 관음의 방법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타인의 삶을 훔쳐봄으로서,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갈망을 대리적으로 해소하고, 그에 비추어 지금 나의 삶을 재확인 받고 싶어 한다. 예술이 인간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는 말은, 그것을 향유하는 우리들이 예술에 투영된 누군가의 삶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다. 프랑소와 오종의 <인 더 하우스>는 허구의 창작과 현실의 욕망 사이의 분리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희석되고만 그 경계선을 명민하게 파고든다.


<인 더 하우스>의 주연 파브리스 루치니의 연기는 세드릭 클래피쉬의 영화 <사랑을 부르는, 파리>에서 연기한 대학 교수의 연장선과도 같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학생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게 다가가던 표현에 어설펐던 교수. 그 능청스러운 표정 연기가 이번엔 고등학교 선생으로 <인 더 하우스>에서 재현된다. 이루지 못한 작가라는 꿈을 가진 문학교사 제르망(파브리스 루치니)는 기대 이하와 실망뿐인 과제 채점 도중 클로드(어니스트 움하우어)라는 이름의 학생이 조금씩 유혹하듯 풀어내는 이야기에 이끌린다. 영화는 각 캐릭터들에게 욕망을 부여한다. 제르망은 클로드가 가진 창작의 재능을 알아보고 방과 후 첨삭과 같은 방법을 통해 소년을 도우려 한다. 그것은 범법을 저질러서라도 클로드의 재능을 피우게 하고싶은, 소년의 의중을 간파하는 눈을 잃어버릴 정도의 욕망이다. 시험지를 훔치는 부정을 넘어선 불법까지 저지르고만 제르망. 못다 이룬 자신의 꿈에 대한 대리만족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는 이미 ‘이야기’를 지어나가야 하는 의무에 사로잡힌 한 명의 세헤라자데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클로드에게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작문이 아니다. 클로드가 갖고 있는 욕망은 자신의 이야기를 현실에 적용시키고 예술을 현실에 접목시켜 반대로 바꾸어내려는 욕망이다. 제르망이 현실과 창작의 선을 위태롭게나마 지키고자 했다면 클로드의 욕망엔 거칠 것이 없다. 행복해 보이는 친구의 가정에 대한 욕망. 상대적으로 불우한 가정 환경을 가진 클로드에겐 욕망할 이유가 충분했고 그것이 종이와 글자를 넘어서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의 캐릭터가 되어 현실을 글이 이끄는 대로 끌고 가려 했다. 친구의 엄마인 에스더(엠마누엘 세그너)를 원하고, 친구의 아빠(데니스 메노쳇)에게 대리적 부성애를 느끼는 클로드는 자신이 이 가족의 틈새에 파고들고자 한다. 클로드는 행복한 가정의 파멸을 원하는 악당이 아니다. 그 영민한 소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행복해 보이는 가정의 틈을 이용하고자 했다. 수학을 못하는 친구 라파의 공부를 돕기 위해 접근하고, 남편의 사랑으로부터 위안을 받지 못하는 에스더의 마음 한 구석의 틈으로 예리하게 다가간다. 가족애, 동료애를 강조하는 아버지에게 또 다른 아들마냥 다가가는 것도, 클로드의 소설과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클로드가 간과한 것은, 모든 틈이 모두 파멸로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것과 클로드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 라파 가정의 끈이었다. 이것은 에스더의 임신으로 형상화된다. 가족은 다시 포옹하고 클로드는 저지당했다.


한 밤의 라파의 아버지와 에스더의 섹스를 클로드가 관음 하는 장면. 그것에서 재미있는 것은 그 부부의 침대 건너편에는 클로드와 같이 이 가정의 행복에 탐하는 시선을 보내는 자가 한명 더 유령처럼 앉아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양인이 라파의 접대 상대인 중국인 사업가라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가정의 어머니인 에스더에게 엄습해오는 클로드와 아버지에게 스트레스와 분노의 원인이 되고 있는 중국인. 이 둘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을 양쪽에 둔채 부부는 뜨겁게 사랑을 나눈다. 두 싸늘한 시선은 가정의 행복을 위협하는 요인이지만 부부는 아랑곳없이 사랑을 재확인한다. 이 영화에는 가정의 행복을 담보로 공격하려는 클로드와 틈을 허용하고만 라파네 가족들의 줄다리기가 스릴러처럼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그것이 클로드가 조금씩 제르망에게 공개하는 작문을 통해 호흡을 조절하며 전개된다.


저지당한 클로드의 이야기는 마무리를 위해 제르망에게 향한다. 제르망의 아내 쟝(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은 미술 갤러리를 운영하지만 자금난과 전위적 취향등의 문제로 경영과 예술적 신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제르망이 들려주는 클로드의 이야기에 또 다른 독자로서 있었으며, 클로드와의 직접적인 고리는 영화의 후반까지 없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녀가 갖고 있는 축은 제르망과 클로드가 씨름하는 문학이라는 분야의 또 다른 확장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미술, 조각 등을 수입하고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지만 그녀가 가져오는 중국에서 온 예술은 성과가 좋지 못하다. 성인용품점으로 오인 받을 정도로 파격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그녀의 안목은 바이어들뿐만 아니라 남편인 제르망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에는 몇 번에 걸쳐 쟝이 추구하고 자신의 갤러리에 전시하여 소개하고자하는 예술품들을 남편인 제르망부터 이미 이해 못해주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제르망과 쟝 사이에 아이가 없는 이유는 이들 2인 가정의 또 다른 틈새. 두 부부의 거리감을 클로드는 자신의 이야기의 마지막 대미로 이용했고 라파의 가정과 달리 제르망과 쟝은 클로드의 파고듦을 허용하고 만다.


영화의 시작이 획일화한 교복의 도입과 평등 교육이라는 슬로건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보자. 그렇다면 이야기에 모든 것을 잃고만 제르망과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온 클로드가 함께 만나, 모두 같은 모양의 아파트 창문들을 통해 들여다보는 각각의 집들은 얼마든지 별개의 이야기로 뻗어나갈 수 있는 사연들을 품고 있다고 관조하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흥미롭다. 평등 교육을 위해 외형적으로 보이는 교복을 통일시켰으나 몰개성을 강요당한 학교안에서 제르망과 클로드의 밀회는 (클로드의 시야를 통해) 개성을 갖게 된 라파네 집을 관음한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획일화로 통일 시킬 수 없는 각 가정의 틈새들을 강조하면서 창작으로 위장되어있던 욕망이 파고들 여지를 여전히 남겨둔 채 끝난다.








2013. 07. 13

@ 씨네큐브, 광화문




덧글

  • 2013/07/20 23:2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7/21 18:0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7/31 18:2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8/02 23:3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10/30 23: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11/02 00:2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7/07 00:4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7/12 13:1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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