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크뢰이어, Marie Kroyer, 2012 Flims






영화 <마리 크뢰이어>는 덴마크의 실존했던 화가 마리 크뢰이어와 그녀의 남편 페터 세버린 크뢰이어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영화 시작부터 밝힌다. 그러나 실화라는 것을 미리 밝히며 부각하고자하는 이 비극의 슬픔은, 이 부부를 영화관을 나선 뒤에야 찾아본 내게 사실 큰 무게감을 갖진 못했다. 너무나도 영화 같은, 어느 부분에서 끄덕이며 이해하고 또 어느 부분에서는 고개를 흔들만한 이 19세기 한 여성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따라가며, 관객들은 주인공 마리 크뢰이어의 선택과 행동에 공명하기도 의구심을 품기도 한다. <정복자 펠레>로 황금종려를 받은 경험이 있는 빌 오거스트 감독의 이 영화는 그러나 비극을 심화하기위해 관객의 공감을 잃어버린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이미 진정한 사랑과 사회적 구속 사이에서 방황하다 스스로 자멸하고 갈등하는 여인을 본 적이 있다. 몇달전 국내 개봉한 <안나 카레니나>가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안나와 마리 사이엔 가장의 문학작품과 실화라는 차이를 무색하게 만들 공통점이 있다. 한때 사랑했던 기존의 남편과 이후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젊은 남자의 등장. 그 둘의 사이를 방황할수록 여성이라는 존재의 입지는 약해지고 선택은 어느 쪽으로든 비극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문학과 마리 크뢰이어의 삶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안나는 사교계의 꽃이었을지언정 누군가의 뮤즈, 창작의 영감이 되는 여인은 아니었다. 영화 <마리 크뢰이어>의 첫 장면, 그녀와 남편이 한 집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아이 ‘빕스’를 사이에 둔 두 부부의 화폭에서부터 그 둘의 재능이나 화가로서의 성공이 이미지화되어 비교된채 드러난다. 커다란 화폭에 작품을 그리고 있는 남편에 비해 작은 정물화를 그리다가 남편에게 조언 받는 마리는 화가로서의 꿈을 갖고 있지만 아직 남편에 비해 부족함에 아쉬움을 갖고 있는 모습이다. 자신은 남편의 그림 속에서, 남편의 모델로서 뮤즈처럼 세간의 칭송을 받지만 그녀는 ‘남편의 모델’이 아닌 스스로 독립적인 화가가 되고픈 여성이었다. 그녀가 세버린을 사랑했던 데에는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도 큰 매력으로 작용했으리라. 그녀를 모델로 한 작품들은 남편 크뢰이어가 실제로, 그리고 영화 속에서도 제법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지만 그녀가 남편이 화가로서의 성공을 거두는데에 뮤즈로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문스럽다. 뮤즈라기보다 그녀는 남편의 내조인으로서, 세버린 크뢰이어가 그녀의 외도 사실을 알고도 고통스럽게 감내하고자할 정도로 자신과 사랑을 주고받을 유일한 여인으로서 마리는 세버린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 또한 당대의 유명 화가라는 남편의 병든 진짜 모습들은 아내로서의 마리를 위태롭게 만든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기에 달렸다는 친구의 말은 당시의 여성들을 대변하지만, 마리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극의 주인공이다. 화가로서의 꿈이 그녀의 이런 태도를 암시했다면, 세버린의 광기가 자신을 내몰고난 뒤 휴가에서 만난 휴고 알프렌은 탈출구가 되었다. 알프렌은 분명 심신이 허약해진 마리에게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존재였다. 세버린이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면, 알프렌은 그녀를 떠올리며 곡을 썼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녀가 주체가 되는 삶, 그녀의 화가로서의 성공은 이루지 못했다. 뮤즈라는 단어는, 불편하게도, 창작자(보통 남성)에 소속되거나 정신적으로 소유된 뉘앙스를 함께 갖고 있다. 마리 크뢰이어가 사회적 지탄과 딸의 양육권과도 싸우며 감행한 선택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이 대신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두 남자에게 같은 것을 바랬다. 사랑하는 딸과 행복할 수 있는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여성으로서의 삶. 하지만 두 남자는 모두 그녀를 아름다운 어떤 존재이자 뮤즈라는 소유물로 생각했다. 세버린은 자신의 정신병을 주체하지 못했고 알프렌은 비겁했다. 이것은 응당 바랄 수 있던 행복을 찾아 떠났다가 값비싼 경험을 하고 내려앉은 여성의 불편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최후까지, 딸 빕스의 선택을 통해 그녀를 내몰지만, 영화는 그 마지막 딸에게 남기는 마리의 독백 아닌 독백을 통해 그녀의 행동을 변호하고 당위를 부여한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줄 수도 없다. 이것이 과연 딸에게 외면당한 마리의 모성애까지를 변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남편과 딸에게 줄 행복 이전에 스스로의 행복을 찾는, 일견 당연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광화문 씨네큐브 2013.06.23)






덧글

  • alice 2013/07/07 13:05 # 답글

    안나 카레니나를 줄곧 떠올렸었는 데, 공감을 잃어버린 영화여서 그랬을까요. 러닝 타임 내내 스토리가 겉돌고, 남는 것은 빗물에 파묻히던 관. ;)
    안나의 심리변화를 따라가며 그 비극을 안타깝게 목격했다면, 마리는... 어떤 생동적인 힘이 없는 캐릭터로 느껴졌어요. 무엇도 제대로 느낄 수 없던 영화여서 제겐 비극이었던.... ㅎㅎ 세버린의 광기는 대단했고....
  • 레비 2013/07/07 21:16 #

    저 역시 안나 카레니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죠 ㅋ 앨리스님 외에도 다른 분들의 평에서도 공감이 아쉬웠다는 평이 많더라고요. 실화임을 조금 포기하더라고 조금 더 '극적'으로 연출했으면 차라리 낫지않았을까 싶어요. (그 관이 자꾸 떠서 발로 밟아넣는 것도 인상적이었네요 ㅎㅎ)

    안나에 비해서 마리는 굉장히 수동적이었는데, 문제는 영화 끝까지 그랬다는거죠. 사실 캐릭터가 갖는것은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인데.. 세버린이든 알프렌이든 결국 두 남자를 모두 끌어안으려고 하듯이 비춰진게 아쉬웠어요. 게다가 마지막 딸의 선택지를 극에 올린다는것 자체가 전 조금 의외였어요. 삼각관계에서 끝낼줄 알았는데 그간 잠자코있던 딸의 시선으로 이 모든 사태를 그나마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를 하는 건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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