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볼, Monster's Ball, 2001 Flims









영화 대사에 따르면 영화 제목인 몬스터 볼(Monster’s Ball)은 내일 형이 집행될 사형수에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전날 저녁 열어주는 파티를 뜻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사형수인 로렌스(숀 퍼피 콤브)에겐 원래라면 가능했어야했을 마지막 전화 통화조차 허용되지 못했다. 나는 영화 <몬스터 볼>을 사형수였던 자신의 남편의 사형을 집행한 집행관과 사랑에 빠진다는 불가항력적 사랑의 힘을 역설하는 영화로 오해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한 무게감이 있는 영화였다. 시놉시스 덕에 기대한 불같은 육체적 사랑은 오히려 두 남녀 주인공의 정신적 교감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 감독 마크 포스터의 연출작이자, 할리 베리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화제작. 그녀는 흑인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아직까지 두번째는 나오지 않고 있다. 백인이 아닌 배우들이 경험하는 미국 영화의 장벽은 높다. 흑인과 라틴계, 혹은 아시아계 배우들에겐 주연 발탁의 기회 자체가 적으며, 헐리우드 영화 시나리오의 대부분이 백인 남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고 유색인종 및 제3세계 출신 캐릭터들은 대부분 단역이나 조연에 그치기 때문이다. (영화 <아르고>의 실제 주인공 토니 멘데즈가 라틴계 멕시코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밴 에플렉이 직접 연기한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일견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가뜩이나 대작에서 주인공을 연기할 기회가 적은 라틴계 배우들인데 말이다.) 덴젤 워싱턴, 윌 스미스, 사무엘 L.잭슨, 모건 프리먼 정도의 이름이라면 극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가능성은 높지만 흑인 배우들 역시 백인 배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회 자체가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리 베리의 여우주연상 수상은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침 영화는 인종주의에 대한 경종과 반성의 메시지를 직간접적으로 담고 있다.







루이지애나에서 촬영되었지만 마치 서부 영화를 보는 듯 카메라가 오가는 장소의 분위기들은 삭막함을 품고 있다. 넓은 농장과 낮은 인구 밀도, 영화적 공간들을 오가는데 소요되는 긴 도로들과 조밀하지 못한 거리감을 드러내는 이 전형적인 미국 남부의 풍경들은 그대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단절을 상징한다. 교도소, 레티샤(할리 베리)의 집과 그녀가 일하는 도로변의 식당, 그리고 행크(빌리 밥 손튼) 가족의 집. 그들의 마을을 구성하는 것은 드문드문 떨어져있는 집과 도로와 평야가 전부다. 하지만 한적할 수 있던 마을과는 달리 영화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행크와 레티샤. 이 중년의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은 이상한 접점을 갖고 있다. 인종주의자인 행크와 흑인인 레티샤 사이에 사랑은커녕 어떠한 연결고리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이어주는 것은 잔인하게도 죽음과 외로움과 심리적 고통이다. 레티샤의 남편인 로렌스의 사형을 집행한 간수이자, 레티샤의 아들이 뺑소니 사고를 당해 도움이 필요한 그들 모녀를 빗속에서 병원으로 데려다준 사람은 우연히 지나가던 행크였다. 레티샤의 아들은 병원에서 죽고 말았고, 졸지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알콜 중독의 조짐이 보이는 레티샤는 잔인하고 힘든 현실에 몸서리치며 행크에게 위안을 구한다. 사형집행관이지만 행크 역시 죽음을 가까이에 두었던 것은 레티샤와 같다. 로렌스의 형을 집행하던 날, 행크와 같은 교도관이자, 마음이 약했던 아들인 소니(히스 레저)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 허약해진 정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구토를 해버리고,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아버지 행크는 아들을 거칠게 몰아세운다. 결국 엄격한 집안 분위기와 아버지를 견디지 못한 아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인 벅(피터 보일)이 보는 앞에서 권총 자살한다. 그렇게 아들의 죽음을 목도했던 아버지는 쓰러진 레티샤의 아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흑인 모녀임에도 불구하고 이 인종주의자는 빗속에서 자신의 차를 세웠던 것이다.







영화는 흑인과 백인의 경계가 뚜렷하다. 교도소씬에서 볼 수 있는 범죄자들은 거의 모두 흑인 배우이며, 교도관들은 대부분 백인이다. (행크와 소니의 싸움을 말리던 간수 중 흑인이 한명 있었으나 행크는 자신을 말리던 그에게 거칠게 negro라고 소리친다.) 등장인물이 많은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는 소수의 흑인과 백인 배우들만을 캐스팅하여, 인종주의를 돌려 말하는 대신 직접적으로 화두를 던진 뒤, 그들을 화해로 끌고나간다. 행크와 레티샤, 두 주인공 남녀에게 죽음과 가난과 외로움이라는 비극이 이들을 만나게 했지만, 진흙 속에서도 다시 태양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잡초처럼 이들은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다. 둘의 첫 섹스씬은, 절망에 빠진 레티샤의 청에 의한 것이었고 인종주의자인 행크에게는 도리어 견디기 힘든 고역이었지만, 홀아비이자 창녀를 불러 성욕을 해소해온 행크에게도 큰 변화의 시작이었다. 자신보다 더한 인종주의자인 아버지 벅에게 상처받고 돌아간 레티샤에게 그는 진심으로 사과하길 원하고, 자신의 정원에 찾아온 흑인 아이들을 총으로 위협해 내쫒던 과거를 반성한다. 급기야 교도관을 그만둔 뒤 구입한 주유소의 이름을 레티샤에게 바치는 등, 그는 레티샤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이 행해온 과거를 반성한다. 레티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외로움과 힘겨움에 낯선 백인 남자의 품에 몸을 맡긴 것이 아니라, 그녀는 이후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오는 행크에게 진정한 감사와 위로의 감정을 느낀다. 그에 맞춰, 영화의 수위 높은 섹스 장면들은 육체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처음에는 그저 사랑이 없는 몸짓처럼 보였다면 마지막으로 향해 갈수록 에로틱한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교감과 사랑의 행위로 바뀌게 된다. 둘 사이의 거리감이 점차 좁혀지고 겹겹의 벽들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과정을, 두 주연 배우는 많은 대사가 할당되지 못한 연기력만으로 표현해낸다. 할리 베리뿐만 아니라 빌리 밥 손튼의 연기도 아주 빼어난 이유다.







국지적으로는 인종주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지만, 좀 더 넓게 바라본다면 영화 <몬스터 볼>에서 대를 이어 전해지는 불합리와 모순의 단절과 새로운 나아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 행크가 3대를 관통하는 중심인 기성세대임을 기억한다면, 그의 아버지인 벅은 철저한 인종주의자인데다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구세대를, 그의 아들인 소니는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는 달리 흑인 아이들과 어울리고 인종적 편견이 없으며 사형집행관인 자신의 일조차 견디기 힘들어하는 새로운 차세대를 의미할 것이다. 두 세대의 중간에 서있는 행크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흑인 아이들을 총으로 내쫒지만, 아들의 죽음 이후 인식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결국 레티샤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버지 벅을 요양원으로 보내며 구세대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한다. 아버지는 결국 이거냐며 아들을 원망해보지만 행크는 아버지의 책임도 있다며 냉정하고 단호하다. 벅과 소니 사이에서 위치를 옮기는 행크의 행동뿐만 아니라 레티샤에게서도 이와 같은 이미지는 계속된다. 영화의 첫 등장에서, 남편 로렌스에게 아들을 데리고 면회가는 아내인 그녀는 그러나 곧 사형이 눈앞인 남편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하고 만다. 남편이 수감되어있던 오랜 세월동안 홀어미처럼 살아온 레티샤의 궁핍한 삶이 비록 그녀를 힘들게 해놓았지만, 사형을 앞둔 로렌스는 뚱뚱한 아들이 자신의 좋은 면들과 뛰어난 그림 실력을 닮았다며 다음 세대로의 유산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레티샤는 자신의 아들이 군것질을 좋아해 그저 살만 찐 돼지 같은 아들이라며 구박하기 일쑤다. 아들이 죽고 나서야, 아들이 그린 그림들을 로렌스가 그린 그림과 비교하며 애틋해하는 어머니가 될 수 있게 된다. 행크와 레티샤 모두 자식 세대를 잃었다는 슬픈 공통점이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식들이 살아있는 동안 그들의 밝은 면들을 똑바로 바라봐주지 못했다.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진즉에 하지 못했던 실수들을 깨닫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 서로의 이 모든 아이러니와 비극 속에서 만난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우린 다 잘될 거예요”라며 밤하늘 별빛 아래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으며 그녀를 위로하는 행크의 뒤편으로 레티샤는 그의 집 정원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가족 묘지들을 발견한다. 인종주의가 뿌리깊게 스며들어있을 미국 남부의 행크네 가문의 정원에서 그들의 묘비를 배경으로 희망을 말하는 백인 남자와 흑인 여자. 그것은 인종주의를 비롯한 선대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통념과 부조리를 하루아침에 바꾸진 못할지라도 작은 방향의 전환이 언젠가 큰 물결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청사진이다. 행크의 마지막 대사대로, 그들이 비록 죽음과 비극과 어둠 속에서 만나고 시작했을지라도. We’re gonna be al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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