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근무, Bringing Out The Dead, 1999 Flims










뉴욕은 두 명의 감독을 보유하고 있다. 한명은 우디 앨런이고 또 다른 한명은 마틴 스콜세지다. 맨해튼 건너 브루클린에서 자란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이 둘은, 그대로 자신들의 영화 세계에 뉴욕이라는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 걸어왔다. 하지만 둘이 그리는 뉴욕은 조금 다르다. 유태계인 우디 앨런이 그리는 뉴욕은 산뜻한 러브 코미디라기보단 강박과 편집적인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그는 코미디 각본가로 시작했지만 그의 영화들은 마냥 포복절도 할 만한 영화들은 아니다. 우디 앨런의 영화들이 주는 웃음 코드는 대부분 고통과 결함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반면 마틴 스콜세지가 그리는 뉴욕은 웃음을 빙자한 블랙코미디가 아니라 블랙 그 자체이다. 우디 앨런의 뉴욕이 풍자와 위트로 우리에게 어색한 웃음이나마 짓게 해준다면, 마틴 스콜세지의 뉴욕은 범죄와 마약과 폭력과 죄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다. 이탈리아 이민 2세인 마틴 스콜세지는 그렇게 아메리칸 드림을 허상으로서 부정하고 미국, 그리고 뉴욕이라는 상징적 도시를 탐욕스럽고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로 그린다. 우디 앨런에게든 마틴 스콜세지에게든, 뉴욕이라는 도시가 그들의 영화 세계에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최근 몇년간 뉴욕을 떠나 유럽 유명 도시들을 돌며 영화를 만드는 우디 앨런 역시 각 영화속에 해당 지역 특유의 분위기들을 비중 큰 테마로 삼고 있으며, 스콜세지 영화의 대부분은 뉴욕에서 촬영된 것만 봐도 그렇다.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도시나 지역은 또 한명의 주연 배우와도 다름없다.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의 차이는, 마이클 키튼과 크리스찬 베일의 차이라기보단, 팀 버튼이 창조한 환상 속의 고담시와 맨해튼을 그대로 옮겨온 놀란 감독의 고담시가 가지는 공간적 간극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혹은 밴 에플렉에게 보스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아도 우리는 영화에서 배경이 갖는 무게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76년 뉴욕시의 밤거리를 떠돌던 <택시 드라이버> - 로버트 드 니로의 유령처럼, 20여년이 지난 뒤 니콜라스 케이지가 다시 뉴욕의 밤거리를 떠돈다. 하지만 그가 운전하는 것은 이번엔 택시가 아니라 앰뷸런스다. 영화 <비상 근무>에는 <택시 드라이버>의 각본가 폴 슈나이더가 함께했기에 이는 그리 어색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죄의식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영화의 원제는 'Bringing out the dead' 이지만 영화를 적절한 한국어 타이틀로 바꾸기위한 방편치고 '비상 근무'는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메디컬 드라마 <ER>의 분위기를 기대했다가는 낭패다. 주인공 프랭크(니콜라스 케이지)는 뉴욕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야간 비상 구급요원이다. 그와 그의 파트너들은 앰뷸런스를 타고 마치 순찰을 도는 경찰처럼 밤의 뉴욕을 정처없이 떠돌다가 통제실의 신고접수에 응하여 움직인다. 해가 지고, 다시 뜰때까지 그들이 겪는 것은 온갖 범죄와 마약과 질병의 뉴욕이다. 다시 해가 뜨고 뉴욕이 '멀쩡한' 마천루들과 출근하는 사람들을 아침에 내놓으면, 프랭크는 거꾸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밤이 될때까지 퇴근의 시간을 보낸다. 이 영화에서 뉴욕을 담는 카메라는 아주 몽환적이다. 앰뷸런스의 사이렌과 뉴욕거리의 네온사인은 수중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흩뿌였고 흐릿하다. 덩달아 뉴욕의 밤거리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며 카메라 조차 제 각도를 지키지않고 흔들리며 몇몇 장면은 아예 거꾸로 찍혀있다. 마틴 스콜세지가 보여주는 <비상 근무>에서의 뉴욕은 더이상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게하는 희망과 성공의 도시가 아니라 낮의 화려함을 감추고 있는 밤의 어둡고 음습한 도시다. 이 영화에서 낮의 뉴욕은, 아니 낮시간은 아예 몇 시퀀스조차없다. 영화는 대부분 밤 시간에 머무르고 있으며 낮의 프랭크는 오히려 생기조차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프랭크를 옥죄어오는 것은 단순히 이런 업무의 강도, 심신이 피폐해지는 자신의 직업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한바와 같이, 출동을 받고 달려가 사람을 구하는 순간 마치 신이 된듯한 희열과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로즈(신시아 로만)라는 어린 창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한번의 실수와 트라우마가 그에게 인장처럼 새겨지고 이후 그는 자신이 후송하거나 맡은 환자가 사망하면 모든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설상가상으로, 그에겐 로즈의 환영이 그를 따라다니게 되고 그의 일은 점점 사람을 무사히 살리는 경우가 줄어든다. 이 열악한 근무환경은 프랭크에게 사표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게한다. 매일 저녁 출근할 때마다 지각과 조퇴를 일상처럼 해도 그의 상관은 내일이 되면 해고해준다고 말할 뿐이다. 게다가 프랭크는 자신의 파트너로부터도 위로나 의지를 기대할 수 없다. 래리(존 굿맨)는 이 암담한 직업으부터 퇴직과 도피를 꿈꾸고, 종교인인 마커스(빙 라메스)는 일에서 보람을 찾다못해 현실을 직시할줄 모른다. 프랭크의 과거의 짝이자 마지막 짝이 된 톰(톰 시즈모어)은 구급요원과 환자의 사이를 망각하다못해 폭력적으로 변질된 파트너이다. 이런 세명의 모습은 뉴욕시의 어두운 면, 나아가 낮에는 화려하고 멀쩡하지만 밤에는 지저분하고 비정상적인 사회에 오랜시간 노출된 자들의 각각의 변질을 보여준다. 이상하게 변한 것은 프랭크의 동료들 뿐만이 아니다. 야간 병원을 지키고 이송되어온 환자들을 받는 병원의 의사들이나 경찰도 모두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그냥 다함께 모두가 환자가 되는 뉴욕의 밤, 프랭크를 따라다니는 죄의식은 그를 비참하게 몰아간다. 나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영화를 지금까지 스무편 정도 봐왔는데,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여전히 그의 최고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연기로만 따지면 이 영화 <비상 근무>에서의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있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눈빛은 따라다니는 유령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미쳐버릴 수도 없는 환자의 눈빛을 갖고있다.






 
프랭크의 구원은 도피가 아닌, 상처와 똑같은 상황으로부터 오기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다 죽어가는 노인을 후송하면서 살리는데 성공한 프랭크는 노인의 딸인 메리(패트리시아 아퀘트)와 가까워지고 그녀를 멀리서 걱정하게된다. 노인의 딸인 그녀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로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의식불명의 노인을 살리는데 더욱 집착하는 프랭크는 그 방법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옳은지, 영화는 아주 의뭉스럽게 부정한다. 메리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노인의 상태에 기뻐하며, 의사는 몇번의 전기충격으로 노인의 멈춘 심장을 기어코 뛰게하지만, 프랭크는 갈수록 노인의 '붙어있기만한' 생명에서 자신의 트라우마가 향해야 할 길을 찾는다. 이 영화는 안락사라거나 삶과 죽음의 윤리적 문제를 파고들지 않는다. 심장만 뛰고 다른 생명은 유지장치에 의존하는 노인이, 급기야 자신을 죽여달라는 환청을 프랭크에게 보낼 때 프랭크는 갈등한다. 그는 한명의 투철한 구급대원으로서, 당연하게도 언제나 누군가를 살려야만했고 살리지 못하면 괴로워했다. 그런 강박이 그에게 로즈라는 상처를 기억에 깊게 남겼으며 그는 자신을 위해 (메리에 대한 사랑을 빌려와) 노인의 생명에 집착했다. 프랭크의 최후의 결정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위한 이기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중반부, 노인의 상태가 호전되자 프랭크는 기쁜 마음에 메리의 집에 달려가 소식을 전하지만 이미 메리는 프랭크의 들뜬 목소리만으로도 좋은 소식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마지막, 프랭크가 메리의 집으로 가 노인의 죽음을 알릴때 메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로즈를 보고 구원받는 프랭크를 메리는 품에 안는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애써 구해온 환자를 죽였을때,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윤리나 신조를 스스로 파괴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강박이 겹겹히 쌓아올려온 숨막히는 죄의식 역시, 그 순간 동시에 파괴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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