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 2001 Flims





영화 <봄날은 간다>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 이은 두 번째 영화였다.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로 청룡영화상 최고상인 작품상을 받았던 허진호 감독은 3년 뒤 <봄날은 간다>로 또 다시 같은 시상식에서 같은 최고작품상을 받는 진기록을 남겼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 사실 봄이라는 계절은 큰 의미로 새겨져있지 않으며, 엄밀히말해 영화 역시 봄에 어울리는 영화라고 말하긴 힘들다. 새 출발의 봄보다 익음과 묵음의 계절인 가을이 더 떠오르는 이 영화는 사랑, 그 빗나감의 이름을 말한다.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사랑의 시간들, 그들의 ‘봄날’이 가버렸다는 제목에서부터, 영화는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시작과 행복한 시간들, 그리고 헤어짐의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가며 보여준다. 허진호 감독의 다른 작품들, <8월의 크리스마스>를 포함하여 <외출>이나 <행복>에까지 이어지는 특유의 잔잔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전개가 <봄날은 간다>에서도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어디서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우리가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를 우리는 스스로를 아주 잘 안다. 상우와 은수에게 그들의 '녹음 여행'은 그들을 사랑에 빠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둘은 서로를 만나기도 전에 사랑에 목말라하고 기회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우는 연애에 크게 관심이 없어보이는, 어서 장가를 가라는 고모의 말에도 시큰둥한 총각이고 은수는 이혼의 아픔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여자다. 사랑은 이렇게 미처 준비되지 않았던, 그리고 기대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고 봄날이 끝나감에 따라 준비할 시간도 주지않은채 다시 떠난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고등학생때, 나는 상대적으로 영화가 드러내고있는 상우의 감정에 따라 은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지만 은수는 사랑스럽게 상우에게 다가온 뒤 그녀의 영역에 그가 어느 한계를 넘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사랑은 식어버렸다. 한껏 나쁘게 말해서 은수는, 상우의 마음을 가지고 논, 그래서 그를 그저 스쳐지나가는 남자로밖에 보지않았던 가벼운 여자였던걸까. 하지만 20대 중반이 다 되어서 다시 본 이 영화에서 나는 상우가 어리석고 동시에 은수의 마음을 한껏 이해할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읊조렸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의 눈은 변한다. 상우의 관점에서 은수의 변심은 연애 초반의 기억에 비해 매정하고 원망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박하고 다소 어리숙하기까지한 상우에게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멀어져간 은수라는 이름의 봄날은, 영화의 마지막 갈대밭에서 그에게 미소를 되돌려준다. 은수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을 하고 싶지만 상우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갈 결심에는 큰 용기가 요구되는 그녀에게 상우는 한철 불타오른 사랑일 수는 있어도 여름이 되고 가을이 깊어지면서, 서울과 속초 정도의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는 부담스러운 남자로 변해갔다. 둘의 사랑의 나날을 봄이라는 계절에 두고,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식어감을 제목으로 명시해둔 이 영화는 그래서 시니컬하다. 친구의 택시를 타고 강릉까지 달려간 상우에겐 새벽의 길 위에서 은수와의 반가운 만남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차로 강릉까지 간 그의 앞엔 자신과 함께 있을땐 운전조차 미숙하던 그녀가 어느새 자신의 차를 타고 훌쩍 다른 남자에게 출발해버린다. 계절의 흐름은 그대로 이 영화에서 둘의 사랑의 흐름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누구도 이 계절과 시간을 멈춰세울 수 없다.







사랑은 엇갈림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상우가 은수를 그리워할때 은수는 매몰찼고, 다시 계절이 겨울이 되었을때 은수는 상우를 찾는다. 하지만 겨울의 남자는 그녀의 아쉬운듯한 시선을 뒤로하고 헤어진다. 상처를 준 은수가 다시 만나자는 뉘앙스를 풍길 때, 나는 그녀가 뻔뻔하다고 느꼈는가, 아니다. 상처는 은수만 준 것이 아니다. 연장선상에서, 나는 사랑의 모든 재시작을 지지하지 않는다. 지지하지 못한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그 둘의 봄날은 설렘과 행복과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추억과 기억을 선물해주었다. 사랑하는 동안 후회없이 사랑했다면, 언젠가 계절은 다시 돌고 돌아 봄이 찾아온다는 것을 기대해보지 못할 것도 없지않은가. 여름이 올거라서 봄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영원한 사랑은 늘 동경의 대상이지만 두 사람이 하는 이 사랑이라는 것은 늘 크고작은 엇갈림을 수반한다. 둘의 봄날은 아름다웠지만 여름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사랑에 지나치게 시니컬한 사람일까? 그저 요즘 봄날 그 자체가 사라져버린 날씨가 원망스러워서 이 영화가 문득 떠오른 것이라고 소심하게 변명해본다.





+

사족이지만, 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엔딩 크레딧에 나온 김윤아씨의 노래가 너무나도 좋아서 마치 이 한 곡을 듣기위해 나는 앞의 영화를 봤던걸까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덧글

  • 레몬트리 2013/05/15 02:25 # 답글

    좋아하는 영화인데도, 너무 쓸쓸해서ㅠㅠ 잘 안 찾아보게 되는 영화인데 오랜만에 접하니 반갑네요.
  • 레비 2013/05/15 14:36 #

    아 저도 참 오랫만에 다시 떠올렸어요. 보고나서 먹먹해지는 영화는 왠지 꺼려지는데, 또 이렇게 현실적인 영화가 필요해질때가 있더라고요 :)
  • 아느 2013/05/15 08:03 # 답글

    제목 보자마자 김윤아의 노래가 떠올랐는데 역시 ^^ 올봄 출장길에 라디오에서 저노래가 나와서 차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저 노래를 흥얼거렸던... 어렸을때는 이해 못했던 영화인데 지금쯤 다시 보면 좋은듯하네요.
  • 레비 2013/05/15 14:38 #

    ㅎㅎㅎ 엔딩타이틀 곡이 참 좋았죠 +_+ 제목에 봄날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사실 가을에 더 어울리는 노래일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저도 여렸을때 보았던 영화와 다시 본 영화가 다른 느낌이라서 반갑고(?) 신선했어요 ㅋ
  • eun 2013/05/15 13:53 # 삭제 답글

    저도 영화가 끝날때 어두운 크래딧너머에서 들려오던 김윤아 목소리가 영화보다 더 강렬했던 기억이 나요.
    시간이 갈수록 연애라는 것이 happily ever after보다는 이런 쌉쓰름한 이야기에 가깝다고 인정하게 되는건,
    단지 나이가 들어가고 있기 때문인걸까요? (쿨럭;)
    최근에 봤던 블루발렌타인 생각이 나네요. 좀 다르지만, 개인적으로는 현실연애를 다룬 영화중에 최고였어요.
    시간이 갈수록 열정보단 소통이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낭만없어. ㅎㅎ
  • 레비 2013/05/15 14:56 #

    엔딩씬이후 이어지던 잔잔한 음악이 엔딩시퀀스와 함께 끝나고 딱 크레딧이 올라옴과 동시에 전주없이 바로 김윤아씨의 목소리로부터 시작해서 더 강렬했던것 같아요 ㅎㅎ ㅠㅠ 나이가 들어가면서 연애를 무조건 긍정할수만은 없게된다는건 뭔가 쓸쓸하네요 ^_ㅠ <블루 발렌타인>도 그렇고 요즘 여러모로 더 솔직한 현실적인 멜로물들이 다른 의미로 인상적인것 같아요. 이 영화도 비슷한 부류겠죠 ㅎㅎ 그런데 반짝하는 열정보단 미적지근하더라도 지속적인 소통이 중요하다는건 저도 동의하는데요? ㅎㅎㅎ 낭만없는 생각인가요 ㅠㅠㅋㅋㅋ
  • 자주빛 하늘 2013/05/16 07:09 #

    반짝하는 열정만이 낭만을 만들진 않죠. ㅎㅎ 둘은 별개의 것들입니다.
  • 2013/05/17 14:5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비 2013/05/17 19:36 #

    ㅎㅎㅎ 딱 어울리는 기분이네요. 영화제목부터, 결국 다 지나가고 새 계절이 올것이다.. 같은 뉘앙스라 더 그런가봐요 :) 이 영화를 좋아하셨군요 ! 어, 그런데 그 곡을 유지태씨가 직접 부른지는 모르고있었네요 ㅎㅎ 그렇게 집착하던 상우가 마음을 정리할때가 되자 뒤늦게 은수가 미련을 갖는 모습을 보이고.. 여러모로 두 사람의 감정이 안타까운 엇갈림의 반복이라 슬펐어요.

    하나의 순리라고 하기엔 너무 슬프지않나요 ㅎㅎ 전 이 영화의 후반부도 그렇고 현실의 이별들도 그렇고, 타이밍의 문제라는 쪽을 지지하는 편이에요. 두 사람의 타이밍이 기가막히게 맞아을때 그것이 인연이 닿는 것이라고 믿거든요 ㅎ 서로 마음에 들어해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되더라고요. 경험상..ㅎㅎ 전 영원한 사랑은 애초에 없고, 각자 다들 지금 하는 사랑이 영원해지길 바라는 마음과 의지만 있다고 믿어요 :) (반면에 그래서 사랑이 끝나도 많이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편 같아요;; 그저 이 사람이 아니었구나- 싶은 감정정도..?;)

    위건전 새벽 5시까지 보고 잤어요 ㅠ 1:1되서 깜짝 놀랐는데 ㅎㅎ 다행히 이기더라고요. 자력 4강이 아직 가능하니까 희망을 걸어봐야죠 ! :D ㅎㅎ
  • 2013/05/20 10: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5/20 19:5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5/03 23:23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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