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앤 본, De rouille et d'os, 2012 Flims







* 스포일러는 가능한 쓰지않으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읽는 분에 따라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Lust and Born'이라고 단정짓고 혼자 멋대로 상상을 펼치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려 작정한듯 영화의 제목은 두 단어 모두 틀린 'Rust and Bone'이었다. 녹과 뼈. 듣기만해도 육체의 한구석이 저려오는 느낌의 제목이다.


프랑스 출신의 감독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 'De rouille et d'os' 가 작년 5월 유럽에서 처음 개봉했을때, 나의 히로인 마리온 꼬띠아르 신작의 국내 개봉이 기약없다는 분위기에 낙담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이제서야 <러스트 앤 본>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번 5월 최고의 기대작으로 <위대한 개츠비>와 <비포 미드나잇>을 마음대로 저울질하고 있던 나는 이 영화만큼은 5월 첫 주말에 바로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과는 반반이었다. 좋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 지극히 내 취향의 영화라서 나는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다 보고나와서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도중에 기뻐서 벅차오를 정도였다. 내가 딱 좋아할만한 내용과 영상의 영화였고, 두 번 정도 눈물이 나올뻔한 장면이 있었지만 참았다. 영화관에서 청승맞게 우는 짓은 이제 하지 않으려고 결심한지 불과 얼마되지도 않았다. 큰 감정의 변화 폭 대신, 영화는 잔물결의 진원들을 여러군데에 배치해놓고 흔들기를 즐겼고 그래서 좋았다. 하지만 내 주위에 앉아있던 적잖은 수의 관객분들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가 굉장히 적은 수의 상영관을 갖고 있는 지금 상황은 수입배급사의 현명한(혹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거나 입소문을 탈 만한 영화는 아니다. 높은 네이버 평점에 마냥 기대하지는 마시길. 하지만 난 이번 달이 가기 전에 꼭 다시 보러 갈 것이다. 


스테파니 역의 마리온 꼬띠아르는 정말 오랫만에 그녀의 진정한 연기와 표정을 보여주었다. <인셉션>이나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의 그녀만을 떠올리는 분들이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표정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 프랑스 여배우의 올바른 사용법을 어차피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녀가 갖고 있는 분위기를 그저 '프랑스 여배우의 아우라'라는 진부한 표현으로 감싸고싶지 않다. 아주 작고 미묘한 감정 변화를 그녀는 큰 눈동자와 미세하게 떨리는 시선으로 표현하고, 그녀의 소리없는 미소는 감추어둔 보물을 조심스레 우리에게 꺼내어놓는 듯한 신비한 느낌마저 든다. 감히 <라비앙로즈> 이래 최고의 연기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추천해본다. 남자주인공 알리를 연기한 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이 영화로 세자르 신인남우상을 받았다. 역할 때문이었는지, 보는내내 데니스 메노쳇의 분위기가 났다. 케이티 페리의 'Firework'을 프랑스 영화에서 듣는건 분명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두번째로 그 음악이 나왔을 때, 그리고 이 곡의 오피셜 뮤직비디오의 장면들과 영화의 그 장면을 겹쳐서 본 내겐 감격적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진 사실 부차적인 요소고, 내가 진짜 이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이하다.


'삶의 밑바닥에서'라는 표현을 이래저래 미리 듣고 영화를 봤지만 사실 내가 보기엔 진폭이 큰 낙차가 있는 영화가 아니라, 스테파니(마리온 꼬띠아르)와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삶에 놓인 연이은 불행과 불운의 방향을 어떻게든 조금씩이라도 삶과 희망으로 돌려놓으려는 작고 촘촘한 변화들을 가진 영화였다. 여기엔 극복, 구원, 의지와 같은 키워드들이 사용될 수 있겠지만 그들 사이에 깔려있는 가장 거대한 힘은 사랑이다. 그둘의 관계는 모호하고 희미하고 흐릿해서 어디쯤을 걸어가고있는지 알기 힘들게 만들지만 나는 오히려 영화의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사고를 당한 후 절망 속에 살고있던 스테파니가, 다른 이도 아닌 거친 삶을 살고있는 알리로부터 첫 위안을 얻을때, 그 바닷가의 햇볕과 파도는 유난히 눈부시다. 반대로 알리가 힘든 순간을 겪을때 지팡이에 의지해 자동차에서 내려 걸어나오는 스테파니의 걸음걸이는 또 다른 의미로 눈부시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들의 불행과 시련은 단순히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을 포함한다. 알리의 어린 아들을 포함한 자기 삶에 대한 폭력성과 무책임은 이 남자가 구원받아야할 대상이었고, 스테파니의 육체적 장애와 그에 기인한 심리적 자괴감은 이 여자가 위로받아야할 대상이었다. 그동안 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수많은 섹스씬들도 함께 봐왔는데 이토록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섹스씬은 아마 없을 것 같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다독거리며 힘을 내자는 관계가 아니다. 이들은 한쪽이 불행할 때 불완전한 다른 한쪽이 상대를 돕고 힘이 되는 관계를 번갈아 경험한다. 처음엔 스테파니가 그 다음엔 알리가. 그리고 다시 스테파니가 대상이 되고 이제 그녀가 많이 호전되었을때 다시 알리에게 불행이 닥치는 이런 식이다. 불완전한 두 사람이 상대방의 불행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니다. 내가 영화 <러스트 앤 본>에 감격한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서로 상처를 안고 있는 두 남녀가 서로를 보듬으며 사랑하는 이야기는 사실 뻔한 스토리를 예상하게끔 만들었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마주보고 사랑을 확인하는 감동적인 장면이나 자기희생적인 캐릭터들 대신에 먹먹한 영상과 음악들로 메꾸어 놓았다. 나는 여전히, 사랑은 행복을 나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나눔에 있다고 믿고 있다.


토요일 저녁.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보다.










덧글

  • grildrig 2013/05/05 09:44 # 답글

    바닷가의 햇볕에 비치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고 후 장애가 생긴 것을 처음 알고 보인 리액션이 너무 처절하면서도 리얼한데, 또 라비앙로즈에서 절규하던 씬을 떠올려 비교해보니 이 여자 진짜 무시무시하다,라는 생각까지 들더라구요. 다른 작품에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기대가 되는 배우입니다 ㅎㅎ
  • 레비 2013/05/06 12:11 #

    라비앙로즈에선 처절했다면 이 영화에선 그 슬픔을 속으로 삭히는 듯해서 더 절규가 소리없이 들려온것 같아요. 희망과 좌절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을 큰 모션없이 눈빛과 표정만으로 느껴졌죠 ㅎ 처음으로 수영하러 들어갔을때 장면은 참 인상적이었죠. 햇볕도 그렇고.. 엎혀나오는 저 포스터의 장면도요 ㅋ
  • 날다람 2013/05/05 20:18 # 답글

    스포가 될 수 있다고 적혀있길래 트레일러 부터 봤어요. 트레일러 보니 내일이나 모레쯤 극장가서 봐야겠네요 ㅎㅎ 글은 영화를 보고나서 읽겠습니다. :-)
  • 레비 2013/05/06 12:15 #

    저도 예고편만보고 시놉시스도 읽지않은채 가서 봤는데 그편이 더 예상치못한 울림이 컷던것같아요 ㅎ 영화가 어디로 튈지 종잡을수없는 긴장감이 내내 있기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 보시는게 더 좋아요 ㅎㅎ 지난주에 개봉한거라 씨네큐브에서도 상영타임이 여럿 있더라고요 !
  • 에이프릴 2013/05/05 23:10 # 답글

    알리의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가 마음 속에 파동을 일으키더라구요. 저도 이 영화 참 좋았어요.
  • 레비 2013/05/06 12:17 #

    그 둘이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출하고 표현하는 관계가 사실 아니었는데 그 순간 사랑한다며 자신를 떠나지말아달하고 흐느끼는 순간이 정말 묵직했어요. 또 다시 보고싶어지네요 ㅠ
  • 2013/05/20 10:3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5/20 20: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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