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 Tangled, 2010 Flims












동화와 친숙한 유년기를 보내지 못하고 자란 나는 여전히 여러 동화속 이야기들, 특히 그 비슷비슷한 공주님들 이야기를 구별해내고 분간하는데에 어려움을 느낀다. 심지어 몇몇 동화는 10대가 다 끝나갈때까지 생애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기도 했고, 스무살이 지나 처음으로 알게된 이야기마저 있을 정도였다. 라푼젤 이야기 역시 그렇다. 스물네 살이었던 2009년에 발표된 클래지콰이의 4집 앨범 Mucho Punk의 수록곡으로 '라푼젤'이라는 곡을 듣게되었다. 호란씨보다 알렉스씨의 목소리가 더 강조된 이 곡을 나는 처음들은 단 한번만에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했었다. 가사도 가사였지만 곡도 좋아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필청 리스트에 자리잡고 있는 곡이다. 하지만 이 곡은 라푼젤보다는 그녀를 구하려는 남자(혹은 왕자)의 입장에서 불려지는 가사를 갖고 있었다.







라푼젤은 독일 동화다. 원래 이야기 속의 라푼젤은 사실 공주가 아니다. 아기를 갖고 있을때 마녀의 밭에서 '라푼첼'이라는 채소를 훔쳐먹은 부부에 대한 댓가로 마녀가 태어난 딸을 데려갔다. 출구도 없는 높은 탑 안에 한발자국도 땅에 내려오지 못한채 키워진 라푼젤은, 어느날 탑 근처를 지나다 자신의 노랫소리에 이끌려온 왕자를 만나게되고 마녀가 그래왔듯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왕자를 탑 위로 올라올 수 있게한다. 하지만 이들은 마녀에게 들켜 왕자는 장님이 되어 떠돌고 라푼젤은 탑에서 쫒겨나지만 파워 오브 러브(..)로 다시 만나 눈을 뜨고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80년부터 90년대 초반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리딘>과 그리고 94년 <라이온 킹>으로 정점을 찍은 디즈니는 이후에도 <포카혼타스>나 98년 <뮬란>까지 오랜 전통의 디즈니 킹덤의 저력을 과시해왔지만 2000년대 들어서 뚜렷한 하락세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서, 픽사에게 추격을 허용, 더이상 애니메이션 영화에서의 독주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고 2009년 발표한 그들의 49번째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로 과거 2D 셀 애니메이션으로의 회귀와 부활을 노렸지만 이마저도 실패하였다. 그런 그들이기에 50번째 애니메이션 <라푼젤>에는 절치부심 끝에 도달한 디즈니의 새로운 각오가 단단히 스며들어 있었다.








<라푼젤>은 그들이 시도한 최초의 CGI 애니메이션이었다. 사용된 제작비는 무려 2억 6천만 달러. 1940년대부터 디즈니 내부에서 기획되어온 라푼젤 이야기가 2000년대 들어서도 계속 변형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새로이 시도된 CG기술들과 그간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마케팅 비용이 이 영화의 몸값을 높혔다. 놀랍게도 이는 역대 두번째로 많은 제작비가 단 영화에 소요된 기록이다. 물론 시대에 따른 물가상승률을 고려해서 역대 영화 제작비들을 다시 계산한다면 살짝 다른 순위가 매겨지겠지만, 절대적인 수치의 제작비로서 이 애니메이션 <라푼젤>은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에 뒤이어 그렇게 세계에서 두번째로 비싼 영화가 되었다. 재미있는 기록은 또 있다. 이 영화는 디즈니의 모든 '공주 시리즈' 중 최초로 미국 영화협회 MPAA로부터 PG등급(Parental Guidance : 부모 동반 요망)을 받은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이전까지의 모든 그들의 '공주 이야기'들은 G(General : 전연령 관람)등급이었다. 또한 극중설정에 따라 플린의 나이는 26살인데, 라푼젤은 18살이다. 이들의 8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역대 디즈니의 모든 '공주 이야기'의 커플들 중 가장 큰 나이 차이라고 한다.







1812년 그림 형제에 의해 최초로 저술 출판된 이 동화는 2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와, 더 이상 탑 안에 갇혀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아닌 더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라푼젤로 나타났다. 라푼젤은 잃어버린 왕국의 공주가 되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신비한 힘을 갖게 되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그간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에 스며들어있던 남녀 성역할의 붕괴다. (뮬란이나 포카혼타스 등의 예외가 있지만)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와 능동적인 남성 캐릭터라는 구조에 비해, <라푼젤>속의 라푼젤은 남자주인공 플린 라이더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위치에 서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동화속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보다 신분적으로 물질적으로 상위에 있던 것에 비해, 이 동화에서는 원작과는 정 반대로, 여주인공을 공주로 남자주인공을 왕자가 아닌 일개 도둑으로 바꿈으로서 처음부터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려 했다. 물론 세상 물정모르고 순진한 라푼젤의 넘치는 능동성을 보완해주는 역할로, 라푼젤이 모르는 이 세상에 익숙한, 그러나 마냥 순수하지만은 않은 플린이라는 남자 주인공을 옆에 두었다. 라푼젤을 가둬놓은 것은 마녀이지만 동화속 이야기와는 달리 그녀는 그녀 스스로 탑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마녀가 오래 탑을 비우고도 그녀가 얌전히 갇혀있었던 것은 엄마라고 믿는 마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습관적 세뇌와 스스로의 선택권을 박탈당한 자기주도권에 있다. 탑 밖의 세상이 마냥 무섭다는 환상을 갖고, 멀리서 등불로 밝혀진 밤하늘을 동경할 뿐이지만 정작 그 등불들을 가까이에서 보기위해 세상으로 나아가야한다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플린 라이더는 훔친 왕관이라는 불순한 목적으로 시작하긴했지만 결국 그런 그녀에게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결코 플린이 라푼젤에게 있어 동기가 되거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결국 선택은 라푼젤의 몫이었다. 갇힌 세상에서 꿈을 꾸고, 능동적으로 꿈의 억압을 딛고 그것을 이루는 것.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포기한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는 그들의 여정에 만나는 산적들의 숨겨온 각자들만의 꿈과도 무관하지 않다.








맨발로 무대에 서길 좋아하는 가수, 맨디 무어가 목소리를 맡은 라푼젤 역시 맨디 무어를 따라 극중 늘 맨발로 서 있다. 엔딩 크레딧 일러스트와 OST 넘버들 모두 어느것 하나 버릴것 없는 최고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영화의 백미인 밤하늘의 등불 씬은 극장에서 3D로 보길 잘했다고 느낄 수 밖에 없게끔 했다. 그리고 듀엣곡 "I See The Light" 까지. 필름 영상이 아닌 CG로 된 애니메이션 장면에 황홀해져본 경험은, 이전으로도 이후로도 난 느껴본 적이 없다. 이후 디즈니에서는 2012년, Tangled Ever After라는 6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을 속편처럼 내놓았다.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본작에선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던 라푼젤의 부모, 그 중 엄마인 왕비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라푼젤>을 보시고 아직 이 영상의 존재를 모르셨던 분들은 꼭 보시길. (단발머리 덕후(..)인 내가 긴 머리의 라푼젤보다 짧은 머리의 라푼젤을 더 좋아해서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날씨좋은 금요일 오후 갑자기 이 애니메이션을 여기 적어두고 싶어진 이유는, 이 영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인 까닭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만큼 언제 다시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애니메이션도 또 없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지려고 영화를 본다는 가장 당연한 이유를 자꾸 깜박하곤한다. 심란하고 혼란스러운 요즘,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보기만해도 내 기분을 좋게만드는 영화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자 행운이다.









덧글

  • 잠본이 2013/05/03 20:50 # 답글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영화를 잘 만들 줄 안다는 게 디즈니의 강점이라는 걸 다시한번 보여줬죠.
  • 레비 2013/05/04 23:45 #

    적절한 표현이네요.. :)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영화들을 만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ㅎㅎ
  • 행인1 2014/03/29 23:27 # 삭제

    정말로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디즈니 영화를 보고있자면 뭐가 마음이 개운해지는게 정말 행복해져요
  • 날다람 2013/05/04 00:00 # 답글

    파워 오브 러브 (...) ㅋㅋㅋ 저는 이 단편 몰랐는데 보는 내내 계속 웃었어요! 감사해요~_~ 다시 본다면 3D로 보고싶네요 ㅜㅜ 그 등불 장면 되게 멋있었는데!
  • 레비 2013/05/04 23:46 #

    동화가 생각보다 많이 다르더라고요 ㅋㅋ 저도 이 단편은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 처음엔 디즈니에서 정식으로 만든게 아닌줄알았는데 퀄리티가...ㅎㅎ 3D로 본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ㅎ
  • eun 2013/05/04 02:39 # 삭제 답글

    youtube에서 noc kupaly 라는 영상 검색해보시면, 등불 장면의 현실 버전인 폴란드 등불 축제 장면을 찾을 수 있어요. 라푼젤도 좋았지만, 실제 장면도 정말 멋지더라구요.
  • 레비 2013/05/04 23:47 #

    와 찾아봤어요 ! 현실버전이 있었다니.. 정말 애니메이션 속 장면이랑 많이 비슷하네요. 실제로 가서 경험하면 어떤 기분일까.. 밤하늘에 별을 쏘아올리는 기분일것 같아요 :)
  • 2013/05/05 00:5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5/05 01:4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5/05 02:3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5/05 05:0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R    2013/05/06 11:18 # 답글

    지나가다 들렀습니다.ㅎ 라푼젤 매우 재미있게 봤었는데
    위의 단편보면서 정말 소리내서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ㅎㅎ
  • 레비 2013/05/06 12:05 #

    재밌게봐주시다니 기뻐요 ㅎㅎ 저도 저 후일담은 나온지 좀 된 이후에 알았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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