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연애조작단, Cyrano Agency, 2010 Flims






김현식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은 2010년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나는 2001년 <엽기적인 그녀>이래 모든 한국 영화들 중 가장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 <미녀는 괴로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물론 계시겠지만.)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연출이나 편집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도리어 화면은 조잡하고 전형적인 구석마저 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한국형 로맨틱코미디 영화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오랜 고질병인 '최루성 멜로'와 '유치한 웃음 포인트' 이외에 별 다른 활로를 아직까지 뚫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다소 무리수같은 상황과 전개를 앞에 두고도, 캐릭터들에 승부를 걸어 유치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엄태웅의 첫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외려 그의 그런 점은 사랑을 이루려는 주인공이 아닌, 사랑을 잊으려는 주인공에 더 잘 어울릴 수 있었고, 최다니엘과 박신혜의 재발견, 그리고 박철민과 전아민이라는 조연들의 감초 역할까지 더해져 영화는 '사랑(혹은 연애)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설계해주는 매지니먼트' 라는 황당한 각본을 가지고도 미운 구석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에 드는 캐릭터들에게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는 '사랑을 이루는 법'을 말하고 있는 척하면서 '사랑을 잊는 법'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전자에 치중해온 반면, 이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제목이 무색하게도 사랑의 성공적인 시작보다 사랑의 성공적인 결말을 주제로 삼았다. 사랑의 성공적인 결말이라는 것을 결혼이라고 믿는 분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덧붙이자면, ‘사랑의 성공적인 이별’이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상용(최다니엘)은 희중(이민정)과의 연애를 바라고 시라노 에이전시를 찾아왔지만 영화가 기대하는 것은 상용과 희중의 시작보다는 병훈(엄태웅)과 희중의 오래 묵은 감정의 깔끔한 끝맺음과 트라우마의 극복이다.


프랑스의 에드몽 로스탕의 1897년 극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쥬락을 모티브로 한 희곡이다. <삼총사>의 달타냥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검술과 문학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시라노는 기형적인 코를 가졌다는 외모적 콤플렉스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인 록산느의 앞에 나서지 못하고 그 대신 자신과 같이 록산느를 사랑하는 청년 크리스티앙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준다. 시라노의 달콤한 말은 그대로 크리스티앙의 편지에 담겨 록산느로 하여금 크리스티앙을 사랑하게끔 만들었고, 크리스티앙이 전쟁에서 전사한 이후에도 시라노는 록산느를 위해 그것이 자신이었음을 밝히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려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고 대신 연애편지를 쓰는 슬픈 남자의 이름을 가져다 쓴 영화의 제목은, 이 희극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병훈과 희중의 과거사를 귀띔하는 스포일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공 병훈은 프랑스 희극속의 시라노와 조금 다르다. 시라노가 사랑하는 마음을 끝까지 숨기고 부정했던 것과 달리, 돌고 돌아 다시 희중에게 돌아온 라이터처럼, 병훈은 자신의 프로젝트의 타겟으로 다시 만난 희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연애조작단의 노력으로 상용이 희중과 잘 되어 갈수록 병훈의 속마음은 타들어간다. 고속버스터미널 야외 포장마차에서 희중과 4인의 시라노 에이전시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오가는 대사는 ‘시라노’라는 이름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동시에, 지금 현실에서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 되어버린, 병훈과 상용의 관계를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말해준다. 그 때문에 영화의 히로인이 되어야했던 희중은 외려 전형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이토록 전형적이지 않은 영화 속 설정에서 여주인공마저 독특하다면 극은 산만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민정이 연기한 희중은 과거의 남자인 병훈과의 우연을 가장한 만남에 적당히 흔들리는 모습과, 새 남자인 상용에게도 호감을 느끼는 행동과 대사들은 그녀를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아무것도 모르는 캐릭터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결국 이 영화는 두 남자, 병훈과 상용의 시선에서 쓰인 남자들을 위한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다. 대다수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기대 관객층을 여성들에 겨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이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불문 극중 캐릭터들에게 누구든 공감하기 쉽게 되어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이다.


병훈과 희중의 관계는 우연이라는 이름의 인연, 그리고 오해라는 이름의 권태를 모두 겪은 전형적인 ‘지나간 연애사’이다. 그리고 이들은 세상의 대부분의 옛 연인들이 그러하듯 자신들의 재회에 심란해한다. 그것은 병훈만큼이나 희중에게도 마찬가지다. 상용과 병훈의 관계를 모르는 희중은 두 남자 사이에서 얼핏 흔들려하고, 옛 연인에게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는 병훈은 상용의 연애성사를 도와야하는 입장에서 희중에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 하지만 병훈의 욕심 섞인 바람과는 달리, 그는 그녀를 위해 지금의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배워간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과거 연인의 행복을 위해 그녀가 새로운 다른 남자와 잘 되기를 응원해준다는 것에는 사실 거의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쿨하다는 표현만으론 커버하기 힘들 정도라는 걸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이별이 자기 자신의 잘못과 실수와 오해로 빗어진 것이라는걸 잘 알고 있고 또 반성하고 있다면, 옛 연인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응원하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상용이 희중과의 사랑을 이루기를 뒤에서 도와주고 성취시켜야하는 미션은, 병훈에겐 옛 연인인 희중을 자신의 기억과 미련 속에서 자유롭게 놓아주어야하는 숨겨진 과제를 떠안고 있다. 따라서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특별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사랑을 이루는 과정을 그리기보다는 옛 사랑을 놓아주는 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리된 옛 사랑에게 영화가 새 출발과 새 사랑이라는 희망을 남겨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초반 적잖은 분량을 할애해가며 영화 속 '시라노'라는 이름을 가진 4인조가 어떤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경쾌하게 설명해준다. ‘연애조작단’은 현실에 만약 정말 있어도 성공가능성이 희박해보일 정도로 그들의 행동들은 진지하게 보이기보단 한편의 마임을 보는 듯 코믹하지만, 소위 '연애를 글로 배운' 이 시대의 모든 연애불감증자들에 대한 우화이기도 하다. (직업상에선 능력 있지만 연애 감각은 저조한 상용의 직업이 남들의 ‘돈’을 능숙하게 대신 다뤄주는 펀드매니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연애조작단은 남들의 ‘마음’을 대신 다루어준다는 점에서 펀드매니저와 닮아있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첩보전을 통해 연애를, 그리고 고백을 성사시키고 그 고백을 이루면 마치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듯이 '미션 종료'하는 그들의 모습은, 영화 중간에 에피소드로 등장하듯 애프터서비스가 안 된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백까지, 이후 연애는 사실 각자들의 몫이다. 이런 풍자를 스스로 반성하듯이, 영화는 마지막 상용의 고백을 통해 남이 대신 써주는 연애 즉, 세간에서 말하는 통속적인 연애의 방식을 뛰어넘는 것은 진실 된 마음임을 설파한다. 그때까지 시라노에 가려진 조연에 불과했던 크리스티앙, 어눌하고 그들이 써주는 대본대로밖에 말하지 못했던 상용의 어설프지만 진심을 다해 말하는 고백은 그가 그동안 돈을 주고 산 대사들과 작위적인 행동들보다 더 결정적으로 희중의 마음에 도달한다. 시라노인 병훈이 상용의 입을 빌어 희중에게 과거의 실수를 후회하고 용서를 구한 직후, 크리스티앙인 상용의 입에서, 연애편지를 남들에게 대신 부탁할 수밖에 없었던 미숙하고 서툰 남자의 진심을 담은 고백은 그 어떤 각본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진심어린 솔직한 ‘돌직구’는 세상의 모든 ‘밀당’들보다 강력하다는, 뻔하지만 쉽지않은 교훈을 남기면서 말이다.












덧글

  • 서주 2013/04/26 20:27 # 답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2010년도 영화였구나.. 가물가물했는데 읽다보니 솔솔 기억나요.ㅎㅎ
    시라노, 참 좋아하는 인물.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The Truth about Cats and Dogs>가 젤 좋아하는 로코영화거든요. 고런 느낌 기대하고 이 작품 봤다가 또다른 느낌으로 개봉관을 나섰던 기억.

    옛 연인이 다른 남자와 잘 되어가는 꼴;;을 그냥 보는 것만도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그걸 또 도와줘야해. '거의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이란 말씀에 킬킬대며 공감 한 표.ㅎㅎ 저도 남자들을 위한 로코라고 느꼈는데, 작품은 성별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었단 점이 말씀마따나 가장 큰 강점이었던 것 같고요.
    연애조작단이란 특수성으로 만남, 설렘, 고백ㅡ이후의 교감, 권태, 이별, 이별 뒤ㅡ까지의 보편적인 감정선을 그려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았달까요. 안정적인 시나리오를 접하면 맘이 편해지잖아요?ㅋㅋ

    이 영화에 대한 레비님의 애정이 충분히 느껴졌어요. 오랜만의 한국영화 리뷰라 (아마도 베를린 다음?) 반갑기도 하고요 :)
  • 레비 2013/04/29 15:52 #

    저도 이 영화가 꽤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2010년이더라고요 ㅎㅎ 왠지 2009는 오래되어보이고 2010은 별로 오래지않은 느낌...?! ㅋㅋ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제목만 듣고 보진 못했는데 제일 좋아하신다니 궁금하네요. 우마 서먼 영화들치고 인상적으로 본게 별로 없었거든요 사실.

    황당하고 작위적인 상황을 가져다놓고 캐릭터들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있을법하게 만들어두어서 그런 상황들속에 감정이입을 쉽게 만들었다는 것이 장점인 영화였어요 :) 희중이 상대적으로 객체고, 두 남자가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다보니 남자들 시선에서 보이기 쉬운데 또 남자들만을 위한 로코로 끝나지 않은것도 각본의 힘이었고요 ㅎ 누구든 공감할법한 한 연애의 전반적인 모든 감정들을 조밀조밀 다 집어넣었다는게 컷어요 ㅎ 시나리오의 승리인듯 ! 찾아보니 tvN에서 조만간 같은 제목으로 드라마가 시작되려나보더라고요?

    한국영화 리뷰는 왠지 쓰기 조심스럽더라고요 ㅎ 그래서 일부러 애써 피하는 중이에요 ㅋㅋ
  • 2013/04/27 01:5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29 15:5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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