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Norwegian Wood, 2010 Flims










아마도 고등학교 1학년때, 좋은 대학교에 다니고있던, 대여섯살 많은 동네 누나에게 몇달간 영어 과외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창백하리만큼 하얀 얼굴에 원래 목소리가 작아서 웃을때나 농담할때도 일정 데시벨 이상으로 절대 목소리가 올라가지 않는 조용한 누나였다. 누나가 영문학 전공이었는지, 수학과 전공이었는지 기억이 아직까지 헷갈리고 있는 이유는 당시 개봉했던 <뷰티풀 마인드>를 함께 보러갔었고 그날 나눈 대화들 때문이었으리라고 나름 변명 중이다. 아마 지금쯤 결혼을 하셨을, 지금도 생각하면 '그런 적이 있었던가' 싶을만큼 슬며시 나타났다가 내 인생에서 슬며시 사라진 누나를 돌이켜보면, 짝사랑이라고 하기엔 낯부끄러운, 성숙함에 대한 동경같은 것을 아마도 품었던것 같다. 바로 그 누나가 내 생일 선물로 주었던 책 한권은 아직까지 내방에 책장에 놓여있다. 첫장에는 지금도 기억나는 자필 메세지와 함께. 10대인 지금 이 책을 읽고, 다시 20대가 되어서 한번 더 읽어보라고 적혀있었다. 두번 모두 느낌이 다를거라고 했다. 난 그렇게 하루키를 처음 만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당시 국내 출판사가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꾸어 오히려 득을 봤다는 것은 관련 분야의 유명한 성공사례로 꼽혀온, 이미 알려질만큼 알려진 이야기이다. '상실'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비틀즈의 노래제목보다 더 국내 독자들에게 어필했고 이 책은 그대로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나는 10대때 처음 읽고 충격에 가까운 후유증을 겪었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 20대가 되어 한번 더 읽었을 때는 또 전혀 다른 책이 되어있었다. 하루키의 소설이 영화화 된것이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고, 하루키의 소설중 가장 좋아하는 책은 더이상 '상실의 시대'가 아니라 '해변의 카프카'로 바뀌어 있었지만, 내가 2011년 국내개봉한 영화 <상실의 시대>를 기다릴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2006년 헐리우드 영화 <바벨>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른 키쿠치 린코의 주연 나오코 역은 반가웠다. 게다가 '상실의 시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이 갔던 캐릭터였던 미도리를, 모델 미즈하라 키코의 영화 데뷔로 캐스팅한점도 난 나쁘지 않았다. (난 원래 일본 배우들의 연기력을 가늠하는데에 어려움을 느낀다. 게다가 단발이 잘 어울리는 여자라면야... 개인의 취향으로서 그저 환영이었을 뿐.) <데스노트>의 L이었던 마츠야바 켄이치가 와타나베로서 연기했고, 하츠미도, 레이코도 모두 소설을 보며 기대하던 얼굴들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미 읽은 소설의 영화화를 기다리는 것은 그 소설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현되는지를 기대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영화는 소설의 명대사들을 그대로 차용하기도, 새로운 대사를 써넣기도 하면서 결코 짧지않은 분량의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키즈키가 자살로 떠난뒤, 그의 오랜 연인인 나오코(키쿠치 린코)와 오랜 친구 와타나베(마츠야바 켄이치)는 허전함을 느낀다. 10대의 마지막에 재회한 그들은 사랑을 확인하지만 나오코는 요양원으로, 와타나베는 대학으로 헤어지게 된다. 나오코의 걷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심정은 키즈키의 자살로부터 기인된 것으로 그녀의 이야기는 죽음뒤에 놓여진 살아남은 자의 상실감이다. 그래서 그녀는 와타나베와 함께 있고, 섹스를 하지만,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미도리(미즈하라 키코) 역시 두 부모를 잃은 상실감에 살지만 그녀는 과거를 사는 나오코와 달리 현재를 살고 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와타나베는 선배 커플의 이해할 수 없는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며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무게감과 의미를 재확인한다. 가끔 영화를 보다가 스스로 움츠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영화는 음악을 절제적으로 사용하며 서로의 빈 마음을 인물들은 서로 바라봐주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시선은 번번히 엇갈려있다. 두 사람이 등장하지만 독백같은 대사들이 유독 많은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10대때 이 소설을 읽었을때는 와타나베의 나오코를 향한 오래된 그리움과 향수, 못다이룬 아련한 추억속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20대가 된 이후 다시 접한 소설 '상실의 시대'는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영화 <상실의 시대>를 볼 때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키즈키를 잊지 못하는 나오코를 사랑하지만 성장하지 못하는 그녀보다 현재를 살아가려는 미도리를 와타나베가 선택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제자리를 찾은 듯한 와타나베도 마지막은 자신이 어딨는지를 자문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난 나오코의 죽음 이후 그가 미도리로 되돌아간 것에서 그 역시 이미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길을 택한 것으로 생각한다.








원래 '상실의 시대'의 영화화는 왕가위 감독이 맡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키는 자신의 이 자전적 소설이 영화화 되는 것을 꺼려했는지 거절했고, 아쉬워한 왕가위가 그 대신 만든 영화는 <중경삼림>이 되었다. (그래서 <중경삼림>에서 '상실의 시대'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시도도 있다.) 나는 왕가위 감독의 팬이지만, 그가 상실의 시대를 맡지 못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팬이다. 자아도취의 두 달인이 만나 영화가 탄생한다면 그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영상이 되었을까(반쯤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마시길). 이후에도 몇년간 줄곧 영화화를 반대했지만, 베트남 출신의 감독 트란 안 훙에게 결국 허락한 하루키는 결과론적으론 영화에 대해 혹평을 하진 않은 모양이다. 크리스토퍼 도일과 함께 <화양연화>, 허우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비밀>등 동아시아권 영화들에서 인상적인 촬영들을 맡아온 리판빙이 촬영감독으로서 <상실의 시대>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 이 영화를 보면서 작년 JIFF에서 보았던 아쉬웠던 어느 베트남 국적의 영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영상은 지나치게 정적이었고 지나치게 '미'에 치중해 '실'을 잃었다. 와타나베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설과는 달리 여성 캐릭터들의 비중이 더 커져, 마치 와타나베가 관찰자로서 읽어주는 군상극 같았던 점까지도 사실 봐줄만했다. 그러나 내가 감독의 연출 의도나 원작의 해석이 의심스러웠던 점은, 10대의 방황과 고뇌라는 면이 죽음과 삶의 차이, 그리고 육체적 성관계의 유무라는 점으로 극히 축소되거나 압축해 밀어넣은 느낌을 받아서였다. 영화의 대사를 빌려말하자면, 상실의 시대는 영원히 20살이 되고싶지 않은, 20살이 되기전에 다시 18살이 되고픈 정체의 나오코와 현재의 미도리 사이에서 느끼는 와타나베의 심정이 주로 읽히지만 영화는 그 성장통을 사랑하는 마음의 확인(주로 섹스를 통한)으로 제한시켜 놓았다. 게다가 당시 일본사회의 그 시대상에 의한 청춘의 방황은 영화 초반에만 잠깐 비춰지는 듯 싶다가도 이후 완전히 무시당했다. 물론 영화는 감독의 몫이지 작가의 몫이 아니다. 감독 트란 안 훙이 '상실의 시대'를 나와 같이 읽지 않았다고해서 그의 영화를 혹평할순 없다. 그러나 24년을 기다려 영화화된 원작의 가치를,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수준 이상은 담아내기를 기대했기에 아쉬움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사족이지만, 나는 왕가위 감독이 맡지 못했던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대신 이와이 슌지 감독이 맡았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같은 일본인이자, 하루키와 같은 소설가이기도한 이와이 슌지가, 게다가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들을 서정적으로 다룰 줄 아는 감독으로서(<러브레터>, <4월 이야기> 등), 그리고 결핍과 상실의 키워드들을 충분히 다뤄본 (<언두>,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릴리슈슈의 모든 것>, <피크닉> 등) 이와이 슌지의 <상실의 시대>가 상상하기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않을까.
















덧글

  • 레그나 2013/04/23 02:08 # 답글

    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저도, 노르웨이 숲이 영화화된다면, 이와이슌지 감독이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원작의 감상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이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요.
  • 레비 2013/04/23 20:20 #

    저도 사실 영화를 볼까말까 고민을 조금 하긴 했는데.. 무엇보다 원작에서 느꼈던 것을 영화가 괜히 실망시키지 않을까 해서였죠. 전 소설과 얼만큼 일치하느냐 하지못하느냐로 소설원작인 영화를 평하고 싶진 않지만, 영화가 영화 자체의 독립적으로도 아쉬움이 있었어요.

    하루키가 10년 넘게 영화화를 고집스럽게 반대했고, 트란 안 훙이 맡게된 것도 영화제작사에서 감독을 찾았다기보단 그가 하루키에게 오랫동안 바랬다하니, 사실 이와이 슌지에게 돌아갈 경우는 희박했겠죠 ㅠ
  • 2013/04/23 02:0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23 20:1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소소 2013/04/23 02:24 # 답글

    고삼이 끝나고 겨울에 이 책이 그렇게 유명하던데 한 번 읽어볼까?해서 집어 들었었는데 아직은 너무 어린 나이여서 이해를 못 했는지 그냥 술술 읽고 넘어가 버렸었던 책이예요. 이번 여름에 들어가면 꼭 다시 읽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책 중 넘버원!
  • 레비 2013/04/23 20:22 #

    허허 소소님께서 고삼이 끝나고 이 책을 읽었다하시니 왠지 저한텐 굉장히 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네요 ㅋ 생각해보니 소소님껜 불과 몇년전..! ㅎㅎ 제가 하루키의 모든 소설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소설들에 비해서 '상실의 시대'는 조금 술술 읽히는 경향이 있긴해요 :) 다시 읽어보시고 저처럼 소소님 나름의 새로운 것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래요 :)
  • 2013/04/25 03:2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25 20:4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4/27 23:5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29 16:0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5/02 21:4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5/03 19:00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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