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질수 없던 것은 어린 소녀가 아니라 과거의 나였다 : <로리타>, <은교> Flims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문학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첫 문장을 논할 때 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의 첫 문장을 제레미 아이언스의 중후한 목소리로 듣는 것은 이 영화가 시작부터 선사하는 작은 행운이다. 비록 소설에서의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은 영화 대사에선 순서가 뒤바뀌었지만. 멋진 목소리의 소유자인 제레미 아이언스는 디즈니 <라이언 킹>에선 스카의 목소리 연기를 맡기도 했었다. 엔리꼬 모리오네의 선율과 함께 시작하는 이 영화의 제목은 <로리타>. 스탠리 큐브릭의 62년 동명영화도 있지만, 내가 말하고자하는 영화는 애드리언 라인의 97년 영화 <로리타>이다.


로리타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낼 정도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나보코프의 원작 소설은, 사실 세상의 선입견과는 달리 단순한 성애소설이 아니다. 늙은 남자와 미성숙한 소녀 사이의 사랑이라 한다면 분명 충격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랑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설을 열어보면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리고 그런 문학 작품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 역시, 원작의 의도를 살린 채 영화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각색이 더해져 이 영화를 가벼운, 그리고 충격적인 아동 포르노 영화로 만들진 않았다. 영화는 소설의 구조를 일차적으로 충실히 따른다. 험버트(제레미 아이언스)의 회상을 기반으로 돌아보는 전개는, 그의 어린 시절, 그가 여름휴가로 돌로레스 로리타(도미니크 스웨인)를 만나게 되고, 과부인 그녀의 어머니의 애인이 되었다가, 사고로 그녀가 죽자 험버트와 로리타는 미국 전역을 여행 다닌다. 그러다 갑작스레 그녀가 험버트를 떠나가고 3년 뒤, 그녀의 소식을 듣고 재회한 험버트는 그녀를 가슴에 묻고, 과거 그녀를 데려간 퀼티에게 복수한다. 


2012년 정지우 감독의 영화 <은교>가 개봉했을 때,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시놉시스와 세간의 평가만을 읽고 막연히 <로리타>의 변형인줄 알았다. (영화에선 무시되었지만 소설 <은교>는 변호사Q라는 화자가 이적요 사후 그의 수기를 되짚는 구조로 되어있으며, 소설 <롤리타> 역시 험버트가 직접적 화자가 아닌 그가 감옥에서 쓴 회고록을 변호사가 대신 세상에 공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고은의 여고생 연기가 유난히 화제가 되어서였는지, 아니면 박해일의 노인 연기와 분장 때문이었는지 험버트와 로리타의 이야기가 재현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난 뒤 나는 단 몇 가지 키워드만을 가지고 경솔하게 생각했다는 점을 반성해야했다. 친구와 이 영화 <은교>의 영어 제목에 대해 서로 추론해본 적이 있다. 나는 'Lolita'일꺼라는데 한 표를 던졌고, 친구는 'A Student'를 제안했다. 그런데 보기 좋게 빗나간 우리들의 예상과는 달리 영화의 영어제목은 'A Muse' 였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영어 제목이 'The Monster'가 아닌 'The Host' 이듯이, 한국 영화들의 영어 제목은 해당 영화에 대한 기대 이상의 많은 힌트와 조언을 제공해주었고 <은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달랐던 <로리타>와 <은교>, 두 영화의 두 가지 차이를 험버트-로리타, 이적요(박해일)-은교(김고은)의 관계에 근거하여 말하고 싶다.









가장 쉽게 눈에 들어오는 차이점은, 두 영화의 남자 입장에서, 험버트와 이적요가 어린 소녀를 바라보게 되는 이유가 다르다는 점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 <로리타>에서의 험버트는 그가 만난 로리타가 누구의 환영인지를 명시한다. 13살 첫사랑과도 같았던 소녀를 병으로 잃은 험버트의 성적 판단과 잣대가 그의 육체의 성장과 발맞추지 못한 이유를, 영화는 소설에 비해 많은 부분 생략하고 있지만 영화만을 보고도 우리는 로리타가 험버트의 첫사랑의 유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리타>가 험버트를 정당화시키는 점은, 로리타라는 어린 소녀를 사랑하는 것이 곧 험버트 자신의 젊은 날의 추억과 기억을 사랑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적요가 은교에게 반쯤 안겨 가슴에 헤나를 받을 때 그가 꿈꾸는 환상은 과거의 어느 사랑했던 연인이라고 보기 힘들다. 험버트와 달리 이적요의 젊은 날에 은교가 있었다기보다, 그는 은교의 젊음에 전염되듯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고 그 점에 향수를 느낀다. 이 차이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험버트와 이적요가 소녀에게 갖는 감정을 모두다 자신의 젊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욕구로 인한 발현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로리타>에서의 소녀는 험버트가 자신의 허상을 덧씌운 결과인데 반해 <은교>에서의 소녀는 이적요에게 추억을 촉발시키는 원인로서 작용한다. 험버트가 과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로리타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이적요는 시를 쓰다 보니 은교를 애정하게된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마음과 사랑의 감정을 받고, 그것을 동력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이런 관계는 영화의 전반적 흐름 안에서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면 사실 눈에 띠게 드러난다. 험버트가 마음대로 상정한 객체로서의 로리타는 그들만의 여행길에서 그에게 행복만을 안겨줄 수 없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고 험버트를 거부하기도하며 충동적이고 일탈적인 행동으로 험버트의 반경 밖에 자신의 영역을 항상 두고 있다. 그것이 험버트를 불안하게하고 또 다시 소녀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 심리는 이 둘의 관계를 뿌리부터 뒤흔든다. 그러나 이적요와 은교의 관계에선 소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기보단 소녀의 행동과 말에 이적요가 움직이는 모양새다. 따라서 은교는 이적요로부터 어떤 구애와 속박도 받지 않는다. 이적요가 은교에게 갖는 감정은, Lover 라기보단 Muse에 가깝다. 험버트가 직접적인 육체적 관계를 로리타에게 시도한 반면, 이적요가 은교에게 기대하는 것은 문학예술을 매개로 삼은 일체화와 정신적 결합이다. 여기엔 험버트와 로리타의 여행길과는 달리 서지우(김무열)라는 제3의 존재가 등장해, 둘의 관계 안에서 주체적인 은교에 반해 또 다른 주체로서 역할을 도맡지만 <로리타>에서는 서지우에 비교할만한 캐릭터가 없다. (간혹 <로리타>의 퀼티를 <은교>의 서지우에 대입시키곤 하는데 나는 ‘적어도’ 영화에서의 퀼티와 서지우는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이보다 더 큰 차이점은 주인공 남자들에게보다 소녀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로리타와 은교, 둘 다 모두 의도적인 유혹자는 아니지만 로리타는 험버트와의 관계에서 마냥 행복하진 않았다. <로리타>의 로리타는 끝까지 정복당하지 않는 (어쩌면 험버트에게 정복당한적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매몰차게도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가 당신이 아니었다고 종국엔 험버트에게 말할 수 있는 소녀였다. 하지만 진실을 안 <은교>는 이적요에게 돌아온다. 이런 점에선 은교보다 로리타가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교복을 벗고 (졸업을 한) 성인이 된 은교는 나중에 자신의 이름이 쓰인 시의 감성으로, 그것이 서지우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이적요에게 돌아오지만, 임신을 하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성인이 된 로리타는 험버트에게 돌아올 생각이 없다. 로리타에게 험버트는 그녀의 인생에 스쳐지나간 많은 남자들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조차 아니었다. <로리타>의 험버트는 슬프게 돌아나오면서, 그녀에게서 어릴 적 모습을, 자신이 반했던 그 소녀의 환상을 잠깐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가 마지막 장면에서 허망한 상실감을 느끼는 이유는 더 이상 ‘아이들의 소리’에 그녀의 소리를 듣게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적요를 두고 서지우와 육체적 관계를 나눈 은교는 그것이 무지였든, 오해였든 간에 자신에게 글을 바친 이가 누구였는지를 깨닫는데 로리타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치밀하게 험버트로부터 벗어날 궁리를 하던 로리타와 달리, 은교는 미성숙한 외로움을 이적요가 아닌 젊은 서지우와의 관계로 분출했다. (또한 서지우가 은교를 원했던 이유는 이적요에 대한 질투와 동경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은교는 로리타보다 더 순수하고, 로리타는 은교보다 더 복잡했다. 두 소녀가 여자가 된 이후, 그녀들의 행동은 이렇게 갈린다. 그리고 그녀들의 선택에 의해 두 남자는 결말을 맞는다. 퀼티에게 복수한 험버트는 로리타에게 덧씌워져있던 과거의 환영을 벗겨내고 감옥에 가야했고, 이적요 역시 젊음을 갈망하고 사랑한 댓가로 많은 것을 잃고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야했다.


어린 소녀를 사랑한다는 건 곧 그 나이의, 그 당시의 과거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특히 요즘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아동성범죄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로리타>와 <은교>에서의 두 남자는 공통적으로 성욕이 아닌, 자신의 젊음과 기억 대한 주체할 수 없는 향수를 받았다. 늙음이 잘못으로 얻어진 형벌이 아니듯이, 이 두 영화의 비정상적 감정이 혐오스럽기보다 슬픔에 더 가까운 이유는 그것이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사막을 헤매다가 신기루를 발견하고도 뛰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거기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충동과 유혹에 져버린 이 남자들의 행동을 절제가 부족한 병적 행동이라고 치부한다면 그것까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두 영화는 어린 여자에게 느끼는 남성의 판타지를 변호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것을 혹시나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영에 저항을 포기하고만 슬픈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덧글

  • 2013/04/17 23:15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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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7 23:3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4/17 23:5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18 01:4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4/18 07:30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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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9 01:39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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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8 21:55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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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19 01:4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4/21 03:40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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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21 23:42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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