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으로서의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에 대하여 : <에이 아이>, <아일랜드> Flims





(<에이 아이>, < 아일랜드> 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시원으로서의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에 대하여









스필버그의 2001년 영화 <에이 아이>에서 이미 그보다 2년 앞서 타계한 거장 스탠리 큐브릭의 환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이 처음 모니카(프란시스 오코너)의 집 현관문 밖에서 어렴풋 비추는 실루엣과 뒤이어 마룻바닥을 세심하게 디디며 들어서는 장면은 스필버그의 전작 <미지와의 조우>를 연상시키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오히려 큐브릭의 전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리게끔 한다. <에이 아이>는 스탠리 큐브릭의 못 다 이룬 마지막 판타지를 스필버그가 이어받아 완성시킨, 가공할 만큼 섬세한 하나의 조각품이다. 여느 미래 지향형 SF영화들의 계보를 잇는 듯 오프닝 시퀀스를 마무리 지은 영화는 데이빗이라는, 한번 입력된 엄마를 영원히 사랑하게끔 만들어진, 나이를 먹지 않고 성장 하지 않는 어린 소년의 형상을 한 로봇의 이야기가 된다. 미래의 인류, 발달한 과학 기술,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할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과격하고 폭력적인 인간성을 그대로 둔 채, 영화가 움켜쥐고 뒤흔드는 우리들의 감정선은 하나의 어린 아이 로봇이다. 이것은 피노키오처럼 되고 싶었던 어느 피터 팬의, 오즈의 마법사로 향하는 여정이다. 스필버그는 거대하고 방대해질 수 있었던 스케일을 소년의 모습을 한 로봇에게,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로봇에게로 축소하고 함축하여 은회색 빛을 띤 이 큐브릭의 SF영화에게 감성이라는 숨결을 불어넣었다.









2005년 마이클 베이의 영화 <아일랜드>는, 당시엔 배우보다 모델에 더 가까웠던 뉴페이스 스칼렛 요한슨을 이완 맥그리거의 히로인으로 캐스팅하며, 복제인간 기술이 하나의 사업이 된 미래를 그렸다. 따라서 영화 <에이 아이>가 mechanical technology라면 <아일랜드>는 biological technology라고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발달한 로봇 공학이 주된 소재로 쓰인 <에이 아이>는 그래서 <아일랜드>보단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아이, 로봇>과 더 자주 비교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역시 같은 의학적 재료로서 생산된 복제 인간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영화 <네버 렛 미 고>와의 유사점을 찾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이 아이>와 <아일랜드>에는 공통적인 질문이 함유되어있다. <에이 아이>의 데이빗과 <아일랜드>의 링컨 6-에코(이완 맥그리거)가 찾고자하는 것은 둘 다 자신을 만든, 자신의 기원이었기 때문이다.










<에이 아이>의 스티븐 스필버그와 <아일랜드>의 마이클 베이는 각자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기를 발휘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서 이 두 영화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큐브릭의 난해하고 예리한 지적 상상을 스필버그는 자신의 장기인 따스한 인간성의 배열, 휴머니즘으로 해동했다. 로봇이기 때문에 눈을 깜박이지도 않는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연기는 <식스센스>에서의 그것보다 더 제련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쩌면) 최고일지도 모를 연기를 보여주었다. 반면, 처음으로 제리 브룩하이머와 함께 영화를 만들지 않은 마이클 베이는 그들 콤비가 만든 전작들이 보여준 영웅주의(<더 록>, <아마겟돈>, <진주만>)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소수의 목소리를 듣는 <마이너리티 리포트>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아일랜드>에서도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고 사랑을 할 줄 아는 복제인간들의 제로에 가까운 인권을 더 따듯하게 그려낼 수도 있었지만, 마이클 베이 역시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간 모양으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관객의 눈을 현란하게 하고 감각을 짜릿하게 하는 스케일 큰 액션과 폭발과 고속도로 추격씬으로 영화의 후반부를 채웠다.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답게 긴장감을 조였다 풀었다하는 그의 감각적인 카메라는 늘 흔히 보아온 듯 하지만 매번 볼 때마다 우리는 알면서도 다시금 희열을 느낀다. 블록버스터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스필버그와 헐리우드 최고의 블록버스터 전문가 마이클 베이의 이 두 SF영화는 그들의 상반된, 그러나 각기 자신 있는 연출만으로도 충분히 비교해 볼 만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에이 아이>의 인간을 닮은 로봇과 <아일랜드>의 인간을 복제한 생명체는 모두 인간을 지나치게 닮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예로부터 인간과 가능한 닮은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지나치게 닮으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영화에서 미래의 인류는 모두 로봇과 복제인간으로부터 혜택과 편리를 누리며 살지만 정작 이들을 혐오하거나 거부하거나 부정하려한다. <에이 아이>의 데이빗이 처음 ‘대체 아들’로서 모니카의 가정으로 입양되었을 때, 모니카가 느끼는 이질감과 어색함을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꿈에 그리는 아들이지만 결코 그것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없는 사람, 하물며 로봇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거기에 시금치를 먹으면 얼굴 조직이 무너지고 집안에선 인기척조차 내지 않고 돌아다니는 유령 같은 아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아일랜드>에서의 링컨 6-에코와 조던 2-델타(스칼렛 요한슨)의 사랑의 도피를 응원하더라도 무작정 탈출한 그들이 찾아간 맥코드(스티브 부세미)의 당황스러움과 곤란함을 역시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복제인간 사업의 수장인 메릭 박사(숀 빈)이 고객들에게 복제인간들이 ‘인간 같은 생활’을 하지 않은 채 성장한다고 속여 온 것 역시 그 이유를 우린 납득 할 수 있다. 언젠가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 재료로 쓰이게 될 복제인간이 나와 똑같이, 먹고 자고 말하고 생각하며 있다가 수술대위에 오르는 것이라면 그 거부감은 우리도 느낄 수 있다. 맥코드의 명쾌한 설명대로, “햄버거를 먹기 위해 소를 만나볼 필요는 없는 것” (Just cause people wanna eat the burger doesn't mean they wanna meet the cow.)이다. 불편하게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영화는 우리의 이런 감정에 집요하게도 반문을 던진다.


<에이 아이>의 시작 시퀀스에서 사랑할 줄 아는 로봇을 설파하는 하비 박사에게 누군가가 묻는다. 인간을 향한 로봇의 그 사랑에 인간은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나요. (If a robot could genuinely love a person what responsibility does that person hold toward that Mecha in return?) 영화는 이미 시작부터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를 이렇게 제시해놓고 있다. 하지만 뒤이어 하비 박사는 신이 사랑하기 위해 아담을 창조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Didn't God create Adam to love him?) 라고 답한다. 데이빗의 개발자이기도한 하비 박사의 이런 대답은, 살아있고 감정을 갖지만 세뇌시켜두었기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복제인간들을 한낱 의학적 재료로서 이용하고자하는 <아일랜드>의 메릭 박사의 생각과도 상통한다. 데이빗을 최초의 감정을 가진 로봇으로 만들어놓고 데이빗이 찾아오자 기뻐하는 하비 박사 역시, 데이빗이 엄마인 모니카에 대한 고유한 사랑과 아이덴티티를 가진 로봇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실험에 양산될 로봇들 중 성공적인 하나의 샘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렇듯 이 두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인간이 스스로 만든 피조물에 대해 무지하거나 주어진 책임을 간과하는 심리가 깔려있다. 이 영화 <에이 아이>와 <아일랜드>가 자조적인 시선을 가진 SF영화가 될 수 있던 이유는 두 영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비슷한 질문을 던진 두 영화는 그러나 해답에서 갈린다. 두 감독의 서로 다른 스타일이 한껏 반영되어 있는 각 영화들의 결말은 <에이 아이>가 조금 더 인간성을 변호하는 편이다. 이것은 <아일랜드>에 등장하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에 비해 <에이 아이>가 미래의 인류를 조금 덜 한 악으로 용서해주고 있기 때문에 무리한 전개가 아닐 수 있었다. 모니카와 헨리 부부가 데이빗을 ‘버린’ 것 역시 그들이 악해서라기보다 아직 불완전한 데이빗의 맹목적인 사랑과 감정이 원인이었고, 지골로 조(주드 로)와의 여정에서 위기를 맞는 폭력적인 반(反)로봇 집회에서역시 데이빗이 완벽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풀어주려는 인간들이 있다. 그래서 데이빗이 2천년을 기다렸지만 피노키오와 같은 엔딩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다. 인간이 모두 사라진 이후에도 로봇은 남았고 후에 도달한 또 다른 외계의 존재가 데이빗에게, 인간에 대해 많이 알지만(유사하지만) 너는(로봇은) 인간은 아니라고 말한다. 스필버그는 데이빗이 도달 할 수 없었던 ‘인간성’을 인간 고유의 것으로 끝까지 남겨둔다. 그 대신 행복한 기억이라는 하루를 데이빗에게 선사한 뒤, 잠을 자며 꿈꿀 수 없던 로봇을 행복하게 잠들게 하면서 유사한 인간이 되고 싶었던 로봇의 지향점을 그곳에 타협한다. 반면 <아일랜드>는 조금 더 거친 혁명으로 끝난다. 링컨 6-에코는 자신의 근원을 알자 실망한 데이빗과는 달리 자신의 본체이자 (의도야 어찌되었든)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가 된 진짜 인간인 톰 링컨을 찾아가 해결을 촉구하지만 거부당하고 난투 끝에 진짜와 자리를 맞바꾼다. 그리고 영웅적인 행동들로 진실을 모르던 복제인간들에게 진짜 세상을 보여주며, 영화는 이후 세계와 인간들이 이들에게 어떠한 책임이나 대응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보다는 마치 출애굽기 같은 그들의 해방 스토리에 더 관심을 보인다. 링컨과 조던을 추격하던 용병대장 알버트(디몬 하운스)가 메릭 박사와 그의 비인간적인 사업에 환멸을 느끼고 복제인간들 편으로 돌아서는 점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비윤리적인 자들을 가공되고 만들어진 복제인간들보다 못한 위치로 영화가 하대하는 것이다. <에이 아이>가 끝내 인간의 영역을 인간 고유의 것으로 간직해둔 것에 비해, 세뇌당한 채 사육되어온 <아일랜드>의 복제인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체의 기억을 희미하게나마 얻거나 감지하는 것으로 인간에 한 발자국 더 쉽게 다가선 형상이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을 원하는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듯하지만 사실 그들이 꿈꾸던 곳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것이었다. 데이빗은 푸른 요정을 찾고자 맨해튼까지 갔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대리적 존재인, 수심 깊이 가라앉은 옛 놀이공원의 잔해였으며, 링컨과 조던 역시 그들이 이상향이라고 믿었던 아일랜드 대신 감춰진 진실이 있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한편으로는, 아직 이 현대에 도달하지 않았을 만큼 진보한 영화 속 로봇공학과 생명복제기술에 대한 인류의 자세를 촉구하기보다는 사랑을 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억압된 운명의 저항에 대한 영화로도 읽힐 수 있다. 갓 탈출한 링컨과 조던이 번갈아 맥코이에게 묻는, "What we are? What are we?" -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그대로 누구든 우리들 자신에 대한 반문이 될 수있다. 인간처럼 꿈을 꾸고 희망을 갖고 그 목적을 위해 함부로 쉽게 죽고 싶지 않아 하는 데이빗의 인공지능은 우리 인간의 욕구와 본능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링컨과 조던의 탈출기, 뒤이어 다시 돌아와 복제인간들의 해방을 이끄는 투쟁기는 이미 현대 사회에서 부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힘없는 소수 하위계층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석되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이 두 영화, <에이 아이>와 <아일랜드>의 주된 화두는 앞서 지금까지 서술했던 대로 인간이 미래의 누군가의 창조자가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그 책임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철학의 오래된 주제중 하나는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 였다.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있는 지구 유일의 지성체라는 인류는 이처럼 우리의 기원을 궁금해하였고 그 해답을 끝없이 탐구해왔다. 그 과정에서 과학적 이론과 종교적 믿음 등을 위시한 각종 ‘태초와 기원’에 대한 이론들이 넘실댔다. 이미 세상에 나온 우리는 누구로부터, 어디서, 왜 왔는지를 이렇게 본능적으로 궁금해 한다. 그렇다면 궁금해 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닌 또 다른 지성체의 기원이 된다면, 즉 인간이 창조해낸 또 다른 존재가 그 기원에 의문을 품고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어떤 답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늘 의문을 품고 답을 구하기만 하던 존재인 우리가 질문을 받는 존재가 되었을 때, 과연 우리가 신이라고 (편의상) 불러온 존재처럼 우리의 피조물에게 명쾌한 답을 혹은 책임 회피를 하게 될 것인가. 그동안 피조물로서의 권리만을 찾던 인류에게, 두 영화는 이제 창조자로서의 책임을 묻는다.













덧글

  • 2013/04/17 09: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17 23:0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4/17 16: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17 23:0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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