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 2012 Flims






영국 로맨틱 코미디 제조공장 '워킹 타이틀사'가 2012년 가을과 겨울, <안나 카레니나>와 <레미제라블>을 연이어 발표했을 때, 내겐 그들의 선택이 제법 신선하게 느껴졌다. 영국 여류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이미 세편이나 영화화 한 경력이 있는 그들이 (<오만과 편견>, <센스 앤 센서빌리티>, <설득>) 2012년 후반기,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고전 두 편을 집어든 것이었다. 게다가 <안나 카레니나>는 이미 <오만과 편견>으로 키이라 나이틀리와 호흡을 맞춘 조 라이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고하니 <킹스 스피치>의 톰 후퍼가 맡은 <레미제라블>보다 나의 기대치를 높혔던 것이 사실이다. 북미 개봉 순서와는 반대로 국내 개봉에 맞춰 <레미제라블>을 먼저 접하고 뒤이어 오늘, <안나 카레니나>를 본 나의 머릿속에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워킹 타이틀사가 벌인 이 두편의 유사한 실험적 서사 방식이다.


지난 겨울, <레미제라블>는 송스루라는 듣도보도 못한 용어까지 내게 알려주며 롭 마샬 스타일과는 또 다른 뮤지컬 영화를 보여주었다. 대사 모두가 노래로, 배우들의 모션이 마치 춤처럼 흘러가는 <레미제라블>은 영화라는 형식 위에 그려진 한편의 뮤지컬이었다. 여기엔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었지만 새로운 형식이라는 점에서의 신선함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을 두시간짜리 영상으로 바꾸면서 조 라이트 감독은 톰 후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을 차용했다. <안나 카레니나>는 영화라는 캔버스 위에 무대 연극을 꾸린 <레미제라블>과 반대로, 무대 연극이라는 캔버스를 꾸미고 그 위에 영화를 담아내었다. 공간적, 시간적 배경이 연극 무대로 둔갑되었지만 그 위에서 배우들은 '여전히' 영화 필름 속에 있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했다. 오히려 '진짜 배경'이 카메라에 담기는 씬들은 이질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조 라이트 감독이 무슨 사연으로(러시아 로케이션이 힘들었다거나), 혹은 어떤 의도로 연극 무대를 빌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초반부터 <레미제라블>이 보여준 방식이 자꾸 겹쳐보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용한 극장 무대 프레임의 사용이라는 방식은 공간적 위화감을 조성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화면의 전환과 시간 흐름의 묘사 등에서 유리한 이득을 챙긴 모양이다. 촬영과 서사 방식에서의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 감독의 전작 <오만과 편견>때와 비교한다면 몇배나 더 칭찬하고 싶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조 라이트의 조합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지만, 키이라 나이틀리와 러시아 사교계 꽃의 이미지와의 매치는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키이라 나이틀리는 결코 여성스러운 이미지의 여배우가 아니다. 오히려 '캐리비안 해적'시리즈에서의 '여장부'스타일, <오만과 편견>에서의 왈가닥 아가씨가 더 익숙하고 어울리는 얼굴이다. 스키니한 갸날픈 몸매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상류층 귀부인에 적당할진 몰라도 날카로운 눈매나 선 굵은 얼굴형이, 사랑에 의해 침식되고 파멸하는 팜므파탈스러운 여인에게 과연 어울릴까하는 우려 섞인 기대감도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나의 평가는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과연 그녀이어야만 했을까. 나는 키이라 나이틀리를 좋아하지만, 그녀가 표정이 다양한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안나 카레니나>가 나탈리 포트만을 닮기로 유명한 키이라 나이틀리의 <블랙 스완>이 되길 은근히 바랬지만, 아직 그녀의 '블랙 스완'은 찾아오지 않은것 같다.


짐 스터게스를 닮아 영화 초반 나를 혼란케했던 브론스키 역의 애론 존슨은, 간사한 콧수염으로 나의 로망을 자극했지만(?) 초반부의 존재감 넘치는 모습에 비해 후반부에 더 필요했던 많은 감정변화를 초반과 비슷비슷한 연기로 일관해서 아쉬움을 주었다. 안나의 남편 카레닌 역의 주드 로는 더 넓어진 이마... 아니 머리로 그의 젊은 날의 열성팬인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은 영화답게 영화속 복식은 문외한인 나에게도 정말 볼만한 요소였다. 거기에 극장무대라는 프레임이 더해져서 영화는 엔틱한 소품들로 가득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브론스키와 안나가 처음 만나는 키티의 무도회장. 둘이 춤을 추며 지나가자 마네킹처럼 멈추어 서있던 사람들이 생기를 얻고 다시 움직이는 장면들은 모스크바 사교계에 나타난 안나의 존재감을 대변했고 동시에 처음 만난 브론스키와의 교감을 대사없이 모션만으로 보여주었다.


제정 러시아의 존경받는 정치인 카레닌(주드 로)의 아내 안나(키이라 나이틀리)는 외도한 오빠(매튜 맥퍼딘)와 상심한 오빠의 아내(켈리 맥도날드) 사이를 설득하고 회복시키러 모스크바로 간다. 둘의 사이를 간신히 설득한 그녀는 그러나 그곳의 사교계에서 키티 공주(알리시아 비칸데르)를 만나고 그녀의 약혼남 브론스키(애런 존슨)을 알게 된다. 그래선 안되는 것을 알지만 브론스키의 적극적 구애와 흔들리는 마음에 안나는 밀애를 시작하게되고 그렇게 두 명의 알렉세이(카레닌과 브론스키의 이름은 모두 알렉세이다) 사이에서 펼쳐지는 안나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외도에도 화 한번 내지 않는 카레닌과, 젊고 치기어린 열정으로 가득한 브론스키의 불같은 구애앞에서 안나는 양심(혹은 윤리)과 사랑 사이의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일단 급가속을 타기 시작한 그녀의 갈등은 매 선택마다 그녀를 파멸로 조금씩 이끌고, 사랑은 얻었지만 행복을 얻지못한 그녀는 비극을 향해 걸어간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안나 카레니나>에 있는 또 다른 한쌍의 플롯이다. 바로 안나에게 브론스키를 빼앗긴 키티와 그런 키티에게 청혼을 거절당했던 레빈(돔놀 글리슨)의 이야기이다. 원작을 읽어보지 못한 나는 처음, 이들의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게다가 원작보다 마치 무게가 축소된듯한 이들의 이야기가 갖는 비중을 궁금해할 수 밖에 없었다. 레빈은 안나와 극중 연결 고리가 크게 없다. 하지만 처음 거절당했다가 훗날 다시 만나 결혼하게 된 이들은 엇갈림이라는 불행에서 결혼이라는 행복으로 나아가며, 행복에서 불행으로 나아가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과 대칭을 이룬다. 당시 이혼과 불륜에 대한 당시 러시아 사회의 시선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유난히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그런 사회에서 한 발 떨어져나와 시골에서 농민들과 유유자적하며 뒤늦게 사랑을 되찾는 레빈의 시선은 어쩌면 이 이야기 전체의 진정한 관찰자이자 화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서 확신은 없다. 적어도 이 영화에선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명성 높은 고전을 텍스트로 사용한 덕인지, 영화의 캐릭터들은 두시간의 상영시간 속에서 다양한 얼굴로 보였다. 주인공 안나는, 처음엔 '진정한 사랑'을 찾아 갈구하는 도전적인 여성의 모습에서 점차 '집착과 부도덕'으로 변질되어감을 느꼈다. 아내를 빼앗기고 손가락질 당하고도 과묵한 카레닌은, 무기력한 남편의 모습에서 점점 소름끼치도록 무자비한 구속자로 보였다. 브론스키는 사랑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로맨틱한 젊은이에서, '역시 다른 남자들과 다를바 없이'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고 안나에게 지쳐가는 남자로 변해갔다. 나는 안나에게 우리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부도덕하고 충동적인 삶에 대한 경종이라기보다 오히려 동정과 위로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톨스토이의 원작이, 그리고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가 전하는 것은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평면적 메세지가 아니라 그런 결말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만한 궁지에 몰린 한 여자의 비운적 삶을 보여주면서, 사랑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감정과 사회적 구속의 충돌이 빗어낸 한편의 비극에 대한 이성적, 감성적 고찰을 함께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비바람 몰아치는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영화를 볼 뻔한 저를 구하러 광화문까지 나와주신 날다람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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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일의 스캔들 &amp; 로얄 어페어 | JoInSeong Journal 2014-08-10 15:02:05 #

    ... 플롯상으론 &lt;천일의 스캔들&gt;보단 한국 영화 &lt;쌍화점&gt;에 더 가깝다. 캐롤라인 왕비 역의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이 영화가 개봉한 같은 해에 &lt;안나 카레니나&gt;에서도 키티 역을 맡아 비슷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정신분열증에 걸린 크리스티앙 왕 역을 맡았던 미켈 보에 폴스라르는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베를린 국제 ... more

덧글

  • 리미 2013/04/07 00:56 # 답글

    우와.. 기다리던 레비님의 후기 잘보고 가요 >.<
  • 레비 2013/04/08 11:56 #

    그러고보니 리미님의 안나카레니나 포스팅에 이거 보고싶다고 덧글남겼던 기억이 나네요 :) 내리기전에 부랴부랴 다녀왔는데 하루 한번 상영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사람 정말 많았어요 !
  • 리미 2013/04/07 00:58 # 답글

    톨스토이가 레빈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했다네요.. 저도 영화보면서 나탈리포트만의 안나를 생각했었어요! 이미지가 비슷하면서도 훨씬 여성스럽고.. 소녀스러우니까요~
  • 레비 2013/04/08 11:59 #

    아 그랬군요.. 어쩐지 사랑에 쉽게 상처받고 시골에 내려가 지내는 감수성의 레빈이라니 ㅋㅋ 스타워즈1인가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맡았던 배역의 극중 닮은 역으로 키이라 나이틀리가 캐스팅되었던적이 있었죠 ! 둘이 아예 그렇게 서로 닮은꼴을 연기했었을 정도로 :) 진짜 닮은것 같아요 ㅎㅎ 그래서 그런 이미지 말고도 또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는게 평생의 숙제일것 같아요.
  • yucca 2013/04/07 02:34 # 답글

    초반의 속도감과 재기발랄함에 비해 후반부가 늘어지는 점이 아쉬웠지만, 근래에 본 영화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키이라 나이틀리에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전 좋았습니다. 고정된 이미지 탈피해서 여배우로 한 단계 성장할 수있는 게기가 될 수 있을것이라 봐요. 제 취향으로 보자면 후반부에도 전반부의 화려함을 잠깐 보여주면서 안나의 파멸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톨스토이 작품이 워낙 종교적 의미가 강해서 그건 좀 힘들지 않앗나 싶습니다.
    저도 레미제라블이 떠올랐습니다. 레미제라블이나 이 영화나 불필요한 부연없이 바로 핵심으로 가는, 다이제스트 느낌이 드는데, 이 영화쪽이 훨씬 세련되게 잘 표현되었죠.
    사전정보 하나 없이 우연히보게 되어 극장에서 보길 정말 잘했다고 만족한 영화였습니다.
  • 레비 2013/04/08 12:03 #

    저도 근래에 본 영화들중 가장 좋았습니다 :) 문학을 옮긴 시대극치곤 지루한 감도 적었고 원작의 분량에 비해서 두시간여로 축약하는 각색도 잘 된것 같았구요 ㅎ 톨스토이의 원작을 읽어본적 없어서 감잡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차라리 안읽고 영화를 본것이 더 만족도를 높혀준것 같아요 :) 키이라 나이틀리는 <데인저러스 메소드>때의 모습도 언뜻 겹쳐보였구요 ㅎ 저도 <레미제라블>의 방식보다 이 영화가 택한 방식이 더 흥미롭고 마음에 들었어요 ㅎ
  • 2013/04/07 08:5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08 14:0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4/07 15:2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08 14:0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레몬트리 2013/07/13 20:24 # 답글

    오늘 안나 카레니나를 보고 레비님 평을 찾아서 읽었어요. ㅎㅎ 영화는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더라구요. 저도 키이라 나이틀리가 안나 역을 맡은 것에 약간 의구심이 들었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엄청 좋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안 드네요. 아쉽게도.. ㅠㅠ 그래도 무대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연출 방식이 독특해서 그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책도 읽고 있는 중인데 원작에서는 레빈도 비중이 굉장히 커요.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당시 러시아의 농촌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싶은 게 톨스토이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레빈이 안나를 만났을 때(결혼 후 랍니다) 잠시 유혹되는 대목도 있는데 그만큼 안나가 매력적인 여자라는 걸 말해주는 동시에 레빈도 평소에는 굉장히 건실하고 바르지만 역시 남자(ㅎㅎ)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재미있기도 했어요. 아오, 근데 원작이 정말 길긴 해요. ㅋㅋ

  • 레비 2013/07/14 22:32 #

    키이라 나이틀리의 배역은 '최선이었을지'는 의구심이 들지요 ㅎㅎ 그치만 연출이나 음악이나 영상이 너무 제 스타일이라 좋아했어요 ㅎㅎ 영화가 조금 길었던 기억도 나네요. 원작도 참 길죠?ㅠ 저도 영화를 보고나서 서점에서 읽어볼까 찾아봤었는데 깜짝 놀랬어요 ㅋㅋ

    레빈의 비중이 크다고하더라고요. 어디서 보니 톨스토이 작가 본인의 투영이라고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제대로된 이야기의 화자같은 역할로서 말이예요 :) 하지만 영화에선 레빈의 비중이 적어서 혼란스러웠지요 ㅎㅎ 얼마전에 dvd 출시되었길래 조만간 다시 볼까 생각중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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