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팅 힐, Notting Hill, 1999 Flims









나는 휴 그랜트를 좋아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가 나오는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가 고르고 출연하는 영화들 속에는 휴 그랜트, 아니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가장 잘 연기할 수 있을 어떤 특정한 남자상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어바웃 어 보이>, <투 윅스 노티스>,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등등. 다양한 얼굴을 가진 배우일수록 관록을 인정받는 분위기를 역행하듯 오랜시간 동안 비슷비슷한 캐릭터를 보여준 휴 그랜트의 페르소나는 전 세계 로맨틱 코미디 팬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왔다. 마치 현실속의 휴 그랜트마저 관조적이고, 자조적이고, 낙천적이고, 그리고 왠지 게으를 것만 같다.







1994년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작품성을 떠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 영화였다. 영국 워킹 타이틀(Working Title)사의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 왕가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했고, '각본가' 리차드 커티스의 재능이 발휘되는 기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휴 그랜트라는 이름의 배우가 그 이름만으로 따라붙는 고유의 캐릭터를 선보이기 시작한 영화였다. 이 로맨틱 코미디의 행복한 결말은 놀랍게도 결혼이 아니었다. 워킹 타이틀사와 리처드 커티스가 써내려가는 로맨틱 코미디들은 이후 이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의 다양한 변주들이 되었고, 헐리우드의 비슷한 장르 공식과는 다르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전세계 로맨틱 코미디 팬들을 매료시켰다. 휴 그랜트가 연기한 '사랑과 결혼에 회의적인 노총각 영국 남자'의 캐릭터는 이후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어바웃 어 보이>까지 줄곧 이어진다. 공통점들은 뚜렷하다. 혼기가 찬 주변 친구들은 다들 사랑을 찾아 결혼에 골인하지만 본인 자신은 결혼은커녕 진실된 사랑에도 시큰둥한 남자. 정작 본인의 현실은 - 무직이거나(<어바웃 어 보이>), 넉넉치않거나(<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바람둥이라는(<브리짓 존스의 일기>) 식의, 사랑을 진중하게 시작할 준비가 안 된 남자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친구들 그룹이 꼭 있다는 점.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공통점. 그것은 결혼,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에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이 30대 싱글남이 다양한 계기로 변해가는 이야기들. 그것이 '휴 그랜트식, 그리고 리차드 커티스식 로맨틱 코미디'이다. 거의 반드시 크리스마스가 등장하는 이들의 로맨틱 코미디들은 사실 겨울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날씨가 차츰 따듯해져가는 요즘, 더 늦기전에 휴 그랜트의 연작들을 써본다.







<노팅 힐>은 <귀여운 여인>이후 90년대 전성기를 달리던 줄리아 로버츠를 영국의 소소한 마을 '노팅 힐'로 불러들여 제작 대비 엄청난 순익을 거둬들인 그들의 대표 히트작이다. 이후, 휴 그랜트의 짝이 되기위해 대서양을 건너온 미국 여배우들의 계보는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의 앤디 맥도웰부터 시작하여, 줄리아 로버츠를 거쳐, 이후 르네 젤위거, 산드라 블록, 드류 베리모어로 이어졌다. <노팅 힐>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가사를 갖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는 곡, 엘비스 코스텔로의 'She'로 시작하여 같은 곡으로 끝나는 영화다. 영화속 헐리우드 슈퍼스타 안나(줄리아 로버츠)의 이미지를 구축하기위해 불필요한 서사 대신 그저 그녀의 스포트라이트와 단 하나의 노래만으로 이를 해결하며 오프닝을 연 이 영화는, 그러나 남성의 시각으로 쓰여진 한편의 신데렐라 스토리와 같다. 윌(휴 그랜트)는 한번 실패한 결혼 경험을 안고 있는, 그리고 괴상한 룸메이트와 기구한 사연들을 하나씩 안고 있는 소시민적 친구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는 작은 서점 주인이다. 그에게 안나의 존재는 지구반대편이라는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그야말로 밤하늘의 별 같은 거리감을 갖고 있는 여성. 사소한 우연과 사고로 그녀의 키스까지 받았지만 이 소심한 싱글남에게 그녀는 여전히 다른 세계의 여성이다.







내세울 것 하나없는 남자인 윌이 감히 접근하기조차 힘든 안나는 평생 기자들과 카메라를 의식하며 살아야하는, 실재적 의미의 헐리우드 슈퍼스타를 뜻할 수도 있지만 조금 넓게 본다면, 연애에 소심하고 주눅든 남성의 시선으로 읽히는 여성에 대한 판타지일 수 있다. 그녀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오르지 못할 나무다. 그런 슈퍼스타가 잠깐의 마주침에 반해 하룻밤까지 자고가게되는 일은 분명 일상적인 일은 아니겠지만 이 영화가 거의 동화에 가깝다는걸 상기시키자면 이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 (여성에게도 물론 해당하는 일이겠지만) 남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너무나 멀게 보이는 순간이 있다. 이 세상의 다양한 환경과 제약과 조건들이 우리의 순수한 사랑들을 할퀴고 지나갈때마다 불어나는 그 거리감은 윌이 느끼는 노팅힐과 헐리우드 사이의 거리감 못지않을 것이다.







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다소 비현실적인 결말을 갖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미워할수만은 없는 이유는, 이 영화의 윌과 안나가 보여주는 사랑에 대한 맹목적 순수함에 있다. 못 오를 나무에 열번이라도 찍을 기세로 바보같이 정면돌파하는 윌의 모습은 30대이지만 10대의 그것과 같아, 보는 우리들을 미소짓게 한다. 다시 돌아온 안나를 확신없는 마음에 돌려보내고서는 친구들 앞에서 "내가 잘못한거 맞지? I've made the wrong decision, haven't I?" 라며 후회하는 윌의 모습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사랑에는 미숙하고 실수투성이인 우리네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에 우리는 윌과 안나의 멀고 가까워짐을 따라가며 안쓰러워하기도, 또는 귀여워하기도 하며 이들과 함께한다. 나는 영화 <노팅 힐>이 아주 오랜시간 동안 사랑받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중 하나로 남아있는 것은, 이들의 이야기가, 실패와 오해의 반복으로 점철된 우리의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모든것을 바보같이 순수하고 우직한 돌직구로 돌파해버리는 윌의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시선으로부터 둘러싸여 그들을 의식하고 작은 스캔들 하나에도 조심스러워 해야하는 슈퍼스타지만, 결국은 한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 평범한 여자를 이런 모든 주변의 조건과 제약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곁에 남게만들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밀당이 아니라 솔직하고 담담한, 그리고 사랑의 확신이라는 것을 영화 <노팅 힐>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 Elvis Costello - She










덧글

  • 2013/03/04 00:1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04 01:2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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