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레터, Love Letter, 1995 Flims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게 일본 청춘영화를 본다는 것은 유혈낭자한 슬래셔 무비를 보는 것만큼 힘들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본듯한 복고풍의 교복들과 꾀죄죄한 소년소녀들이 등장하는 일본 청춘영화들은 내가 가장 피하고픈 영화장르이다. 같은 이유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슈슈의 모든 것> 또한 몇번의 시도 끝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러브 레터>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스윙걸즈>,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와 같은 영화들과 동일선상에 두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영화 <러브 레터>는 '청춘'이 등장하긴하지만 청춘시절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이 영화를 청춘영화라고 분류해놓기엔 다행스럽게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역대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 중 아주 밝은 편에 속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일본 영화시장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기 뭣하지만 이 영화가 90년대 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것은 어쩌면 한국인의 정서에 오히려 더 들어맞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와이 슌지의 마인드가 다소 친한국적인 것은 농담처럼 제쳐두더라도, 만약 이 영화를 한국 감독이 만들었다해도 믿을 수 있을것 같았다.


대부분의 국내 영화팬들이 그러하듯이 내게도 <러브 레터>가 이와이 슌지의 첫 번째 영화였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것은 2001년, 중학교 교실에서였다. 선생님 한 분께서 특활활동 시간에 비디오로 보여주셨다. 하필 나의 특별활동 소속반은 중학교 3년내내 학교 도서실에서 상주하는 도서부였다. 중학교 2학년이 보았던 이 일본 영화는 사실 큰 인상으로 남진 않았다. 내 머릿속의 영화는 쪼개지고 파편화되고 가뜩이나 색이 흩뿌연 이 영화는 금세 기억속에서 탈색되었다. 당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무렵을 지나고 있었다. 집과 학교 사이, 불과 5분거리인 짧은 등하교길 사이에 있던 한 비디오 대여점에 매일같이 들르며 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보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브 레터>를 다시 보려는 시도는 이상하게도 없었다. 이후 줄곧 영화들을 계속 봐오면서, 내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을 제법 많이 접하게 되었다. 일본 영화는 많이 보지않는 내게 그의 스타일은, 금세 이와이 슌지를 기타노 다케시와 함께 두 손가락에 꼽는 일본 감독으로 만들었고, 팬을 자처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의 이름을 건 영화는 믿고 볼 수 있는 어떤 보증과도 같게 되었다. 12년 사이에 나는 <언두>, <하나와 앨리스>, <4월 이야기>, <릴리슈슈의 모든 것>,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피크닉>을 각각 적어도 한번 이상씩은 보았다. 그리고 다시 오늘, <러브 레터>. 이것은 내게 이와이 슌지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았다.


영화 <러브 레터>에서의 나카야마 미호의 1인2역에 주목하고 싶다. 남자(이츠키)가 과거의 첫사랑이었던 여자(이츠키)와 닮은 여자(히로코)을 훗날 만나 한눈에 반하였다는 설정만을 위한 1인2역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그냥 닮은 배우를 쓰지 않고 굳이 같은 배우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나카야마 미호의 1인2역은 아주 뛰어났다기보단, 두 여성의 캐릭터가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그냥 무리없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츠키(男)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츠키(女)는 히로코로부터의 편지를 받기 시작한 이후, 현실에서 과거로 끌려내려왔다. 하지만 이츠키(男)가 죽었다는 것을 아는 히로코는, 이 영화에서 과거에서 현실로, 나아가 미래로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영화는 이렇게 두 여성이 향하는 방향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대칭시켜 두었다. 이츠키(女)는 현재에서 과거로, 히로코는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이런 둘의 대칭적 방향성이 둘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이루어진다는 각본은 섬세하고 세심해서 머리가 찌릿할 정도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츠키(女)와 히로코를 (배우가 그러하듯이) 같은 한 사람으로 생각해본다면 어떨까. 영화는 한 사람이 과거의 사랑을 되찾아가는 과정과 과거의 사랑을 잊어가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영화가 감동이란 측면을 넘어, 각본적으로 뛰어나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모순처럼 들리는 이 두가지 과정을 한 영화안에 두고 우리가 선택하며 이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이츠키(女)는 히로코가 보내오는 편지로 인해 자신의 기억속에 잊고 있던 이츠키(男)에 대한 추억으로 되돌아 들어간다. 그 주소를 잃은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 사랑은 커녕 학창시절의 추억으로도 가물가물하고 있던 그녀에게 남아있던 것은 의외로 많았다. 27점짜리 시험지, 이츠키(男)가 다리를 다치고도 달렸던 운동장의 모습, 다시 찾은 도서부에서 발견한 그의 도서 카드들. 무뚝뚝하고 매력없다고만 생각했던 남자와 이름이 같다는 우연만으로는 치부하기 힘든 추억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잔뜩 깃들어 있었다. 아울러, 그녀가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가는, 이미 세상에 없는 남자와의 '별로 대단치 않다고 치부했던' 추억을 되짚어보는 이츠키(女)의 과정에 과거의 키워드를 가진 것은 이츠키(男)뿐만이 아니다. 감기와 폐렴으로 사망한 아버지의 환영을, 그녀가 감기 증상으로 온 병원 복도에서 다시금 보는 것은 과거로 점차 회귀하는 이츠키(女)의 모습과 발을 맞춘다. 두 여자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이츠키(女)는 고열로 쓰러지지만, 오래된 집(과거)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할아버지(시노하라 카츠유키)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폭설 속을 달려 기어코 손녀를 살려내는 할아버지의 행동은 과거의 실수(아버지의 죽음)을 다시금 바로잡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모든것 이후 날아온 이츠키(男)와의 마지막 추억이 담겨있는 책의 제목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였다. 이렇듯 이츠키(女)의 키워드는 '과거'다.


하지만 와타나베 히로코는 반대로 움직인다. 그녀는 이미 3년이나 된 이츠키(男)의 빈자리를 잊지 못한다. 새로운 사랑으로 다가온 선배 아키바(토요카와 에츠시)와의 관계는 당연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녀는, 없는 주소로부터 답신이 온 불가능한 편지조차 천국에서 온 편지라고 믿고 싶을 만큼 과거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이츠키(男)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변변한 프로포즈조차 못받아본 그녀를 과거로부터 헤어나오게 하기위해 아키바는 그녀를 이츠키(女)와 만나보게하려고도, 도로가 되어버린 그가 살던 집으로 데려가기도 하지만 히로코를 나아가게 만든것은 이츠키(女)였다. 졸업앨범에서 찾은 이츠키(女)가 자신과 닮았다는 슬픈 사실. 그리고 사랑은 남풍을 탄다는 - 이츠키(男)가 마지막 순간에 불렀다는 노래 가사. 일어 자막으로 고베는 남쪽의 도시이고, 오타루는 북쪽의 도시임을 굳이 표기한 이유이도 한 이 가사는 남풍(남풍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부는 바람이다)이 가리키는 바가 히로코가 아니라 이츠키(女)였음을 히로코에게 확인시키는 슬픈 결정타가 된다. (* 이 영화를 보기 하루 전날, 운좋게 읽었던 도드비님의 포스팅 덕에 영화를 볼 때 놓치지 않았습니다 :) - http://adeose.egloos.com/5169786)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츠키(男)를 산에 두고 오기라도 하듯 그녀는 그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모든 말을 대신한다. 이 트라우마의 극복은 그래서 슬플 수 밖에 없다.


영화의 첫 장면. 히로코는 눈 속에 파묻혀 숨을 한껏 참았었다. 설산에서 조난당했던 이츠키의 마지막을 간접 경험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오프닝 시퀀스 속의 나카야마 미호가 과연 와타나베 히로코인지, 아니면 후지이 이츠키(女)인지 알 방법은 없다. 그 첫 장면, 그녀의 왼쪽 귀에 달려있는 커다란 귀고리가 이후 영화에서 누구의 귀에 걸려있는지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적어도 나는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바로 이어지는 이츠키(男)의 추모식 시퀀스로 짐작컨데 그 여인이 '히로코'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난 뒤, 다시 영화의 첫장면으로 돌아가본다면. 그러니까 만약 그 오프닝이 영화의 마지막에 도돌이표처럼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녀를 이츠키(女)라고 짐작하기가 더 편할 것이다. 이와이 슌지는, 히로코의 편도, 이츠키(女)의 편도 들지 않는다. 두 여인은 모두, 이미 세상에 없는 한 남자로부터, 서로에게 끝내 말하지 못할 변화를 얻었다. 이츠키(女)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정말로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히로코는 이츠키(男)를 비로소 산에 묻어줄 수 있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법 많은 서신이 두 여자 사이를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이라는 계절이 이상하게 끝나질 않는다. 이 영화는 겨울에 시작해서 겨울에 끝난다. 영화 <러브 레터>에 봄은 과연 오는 것일까. 두 여자에게, 봄은 올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츠키(女)와 히로코, 두 여자의 사랑에 대한 두가지 행보에 모두 동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옛사랑에게 안부를 묻는 히로코에게도, 추억속 남자의 진솔한 감정을 너무나 뒤늦게 발견하고 뭉클해하는 이츠키(女)와도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영화 <러브 레터>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아닐까.






















덧글

  • 2013/02/24 01:31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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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24 01:4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2/24 01:52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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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24 01:56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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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24 02:03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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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24 02:13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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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닥슈나이더 2013/02/24 02:17 # 답글

    전 극장에서만 3번 본것 같은데... ^^;;

    90년대 중반에 정말 대단했어죠....

    95년도에 일본에서 표되고... 96년도 가을에 연대에서 틀고......

    97년도 봄에 고대를 비롯한 다른데에서 틀어 졌던.....
  • 레비 2013/02/24 02:25 #

    아 ㅠ 그 시기에 영화를 보던 나이가 아니었던 저라, 사실 <러브 레터>의 붐은 너무나 간접적으로만 들었더랬죠 ㅎㅎ 부럽습니다 ㅠ 포스팅에 저렇게 쓰긴했지만 90년대에 인기였다는 것도 사실 전 전해들은 것이죠 ㅎㅎ

    이번에 다시 보신다면 감회가 새로우시지 않을까요? 그래도 시간이 꽤 많이 흘렀으니까요 ㅎㅎ
  • 옥탑방연구소장 2013/02/24 10:21 # 답글

    너무 글 잘 읽었습니다. 참 많은사람들의 추억을 먹고 사는 영화인것 같습니다 ^^ 그만큼 놀라운 작품이죠... 전 일단 블루레이가 조만간 출시되자마자 집에 오겠지만, 그때 제대로 다시감상할수있을듯하네요 ^^ 항상 글 잘보고있어요 ^^ 부족한 제 리뷰도 읽어주시구요 ㅋㅋㅋ 수고하세요~
  • 레비 2013/02/25 12:09 #

    감사합니다 :) 90년대에 이 영화를 보셨던 분들에게는 많은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인듯한데 아쉽게도 전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아서 오히려 지금에서나마 더 감동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것일지도 모르겠네요 ㅎ
  • 2013/02/24 22: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2/25 12:16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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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2/25 12: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jambie 2013/02/24 23:57 # 답글

    항상 글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글을 읽고있자니 다시한번 머릿속에 영상들이 스쳐가네요. :)
  • 레비 2013/02/25 12:17 #

    앗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제 포스팅을 읽고 읽어주시는 분들이 영화를 다시한번 생각해보실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지요 ㅎㅎ
  • 2013/03/19 00:36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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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0 21:20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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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4 13:35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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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5 03:12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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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5 09:23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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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3/25 20:41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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