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 미 인, Let The Right One In, 2008 Flims









2008년작 <클로버필드>의 감독 맷 리브스가 차기작으로 내놓은 2010년 영화 <렛 미 인 Let Me In>은 이미 제2의 다코타 패닝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던 클로에 모레츠를 앞세워 뱀파이어 장르와 그 이상의 서정적 분위기까지 모두 놓치지 않았지만 문제는 원작을 뛰어넘진 못했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은 모두 일정 수준을 만족시켰지만 헐리우드 리메이크판이라는 점 외에 어떠한 '리메이크 되었어야 할 이유'까지 합리화시키진 못했다. 물론 영화 그 자체만으론 평단과 관객들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잘 짜여진 한편의 영화였다. 미국판 <렛 미 인>은 그저 한편의 영화로서 실패보단 성공에 발을 디디고 있지만, 문제는 스웨덴판 2008년 <렛 미 인>을 보고 미국판을 접하게 되는 경우다. 'Let the Right one in' 이라는 제목의 스웨덴 판과 'Let me in' 이라는 제목의 미국판 둘 다 모두 국내에선 '렛 미 인' 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지만 이하 포스팅에서 <렛 미 인>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는 모두 스웨덴 영화다.







소설 <Let the Right one in>을 원작으로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뱀파이어 소녀와 소심한 왕따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창백한 스웨덴을 배경으로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영상미를 만들어냈다.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소년에게, 어느날 이사 온 한 낯선 소녀가 다가온다. 아버지인지 모를 늙은 남자와 함께 다니는 그녀는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며 마을 사람들을 남몰래 살해해 피를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뱀파이어 소녀다.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이라는 이름의 창백한 피부를 가진 소년과,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소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이 두명의 소년 소녀를 캐스팅하기위해 촬영지 근처의 학교를 방문하며 캐스팅했다고 하니, 이 둘의 연기가 전문배우에게서 느껴지는 완숙한 모습보다는 오히려 어딘가 보다 더 때묻지 않는 느낌을 자아내는건 당연지사다. 종족의 다름과 사회적 제약을 넘어선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의 사랑 이야기라니 영화 <트와일라잇>을 본능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렛 미 인>에서의 사랑 이야기는 외려 더 어린 두 어린이들의 모습이기에, 풍기는 피 비린내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순진함과 애잔함을 더 어루만진다. 결국 마을 사람들을 죽인 이엘리를 지켜준 오스칼과, 그런 오스칼을 죽음의 위기로부터 구해준 이엘리. 한번씩 서로의 목숨을 구해준 그들은 마을을 떠나 길고 긴 동행을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어린 소년 소녀의 종족을 초월한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21세기 이상적 복지국가를 말할 때 자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유럽 국가들을 그 예시에 끼워넣곤 한다. 스웨덴은 그런 국가들 중 하나다. 북유럽의 민주주의 복지국가. 영화 <렛 미 인> 역시 그런 스웨덴이 배경이 되지만 속지 말아야할 것은 영화속 시대적 배경이 80년대 냉전시대라는 것이다. 그곳이 스웨덴이라는 설정은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영화내내 쌓여있는 눈이나 겨울 풍경들 뿐 그곳이 스웨덴이기 때문에 가지는 영화적 이점은 오히려 없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 블라케베리는 바로 그런 80년대의 개발이 한창이던 스웨덴에서 계획도시로 구상된 교외도시중 하나였다고 한다. 원작 소설 작가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곳이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제쳐두더라도, 그 블라케베리라는 도시가 이상하게 삭막하다는 것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서민계층의 사람들이 새로운 빈 땅으로 모여들어 모두 같이 출발했지만 그런 도토리 키재기 속에서도 불평등과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작가가 직접 겪었기 때문일까. 영화속 마을 주민들은 특별히 잘 사는 사람은 없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으며 또 이런 점은 오스칼이 겪는 왕따 문제로 빗대어 묘사한다. 도시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카메라가 보여주는 미장센들은 이보다 더 직설적이다. 회색의 시멘트 건물과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텅 빈 공터들은, 마을은 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 삭막한 심리적 거리를 상징한다. 이런 서로 닫힌 공간에서 말없는 사람들은 단절됨을 보여주고, 이는 오스칼과 이엘리가 보여주는 소통의 키워드를 위한 밑바탕이 된다.








오스칼을 도와주는 이엘리. 그녀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왠만한 성인 남자 하나는 제압하고 죽일 수 있을만한 종족 특유의 능력을 가졌다. 그런 그녀가 왕따 소년인 오스칼을 도와주는 모습은 어쩌면 단순한 권선징악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엘리의 이런 공격성이 어쩌면 오스칼 자신으로부터 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의 첫 장면, 오스칼은 자신의 방에서 홀로 윗옷을 벗은채 칼을 휘두르며 욕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공격성은 오직 혼자 있을때만 가능한 것이고 오스칼은 자신을 왕따시키는 아이들에게 칼부림은 커녕 반항 한번 하지 못하는 소년임을 우리는 영화 초반부터 알 수 있다. 오스칼이라는 소년이 마냥 당하기만하는 불쌍한 주인공으로 보이지만은 않는 이유는, 보통의 일반적인 '왕따 극복' 스토리에서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가진 피해자들에 비해, 오스칼은 잠재된 폭력성을 가지고 있는 '위험한' 왕따 소년이다. 이엘리의 부추김에 얼음호수 위에서 오스칼은 처음으로 반항을 할 수 있게된다. 물론 오스칼이 겪는 따돌림과 괴롭힘은 벌 받아 마땅한 행위가 맞다. 하지만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는 식의 전개는 신선하다못해 놀라웠다. 오스칼의 잠재된 폭력성과 복수심이 이엘리를 통해 드러나고, 결국 마지막 수영장 시퀀스에서는 아에 이엘리의 손을 빌려 나타나는 것이 아닐런지. 이쯤되면 이엘리라는 소녀가 갑작스럽게 마을에 나타난 경위부터 의심스러워진다. 어느날 마을에 슬며시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고 죽이는 이엘리는 오스칼이라는 왕따 소년의 억눌러온 분출구의 극단적 대리인이자 화신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수영장 시퀀스 그래서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였다. 오스칼에게 앙심을 품은 아이들이 그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순간, 이엘리가 또 다시 오스칼을 구해낸다. 이번엔 구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아이들을 죽여버린다. 이엘리가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스칼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그녀가 피를 마시기위해 하는 행위와는 분명 크게 다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스칼이 죽을 수도 있었기때문에 불가피한 살인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소년이 생사의 위기에 처해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무참히도 아이들을 죽이고 홀연히 사랑의 도피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딘가 석연찮은 일이다. 피를 위한 살인이라면 자신의 존속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어쩔수 없다하더라도, 오스칼과의 사랑을 위한 살인을 영화는 묵인해주는 것일까. 사랑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가 영화에 있었다. 바로 이엘리와 함께 마을에 들어온 중년의 남자 하칸이다.





원작 소설에선 하칸은 소아성애자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선 이엘리에 대해 정신적인 사랑을 보내는, 보호자에 더 흡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칸과 이엘리가 부녀지간일거라는 지레짐작은 금새 오해로 밝혀진다. 하칸은 인간이지만 이엘리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렇다면 피가 필요한 것은 이엘리, 그녀에게 피를 제공하기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은 하칸이다. 하칸의 익숙한 '피 공급'은 하칸과 이엘리의 동행이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영화 중반이 넘어가면서 하칸의 자리는, 이엘리에게 있어서 '남자'의 자리는 오스칼로 대체되고 하칸은 쓸쓸히 무대에서 퇴장한다. 그러나 오스칼은 하칸의 존재를 모른다.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오스칼과 이엘리의 동행이 시작됨을 지켜보면서 하칸이 곧 오스칼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모른척 할 수가 없다. 이엘리를 위해 오스칼은 살인을 할 지도 모르고, 오스칼이 하칸만큼 늙어갈때 여전히 소녀의 모습인 이엘리는 다시 위험속으로 스스로 피를 구하기위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하칸처럼 오스칼 역시 그녀의 무대에서 쓸쓸하게 퇴장할지도 모른다. 결국 하칸에서 오스칼로 바뀌는 자리는, 이엘리에게 있어선 길고 긴 뱀파이어의 삶에서 옛 사랑의 끝이자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다. 오스칼이라는 소년의 순진한 사랑과 하칸이 간직해온 사랑의 결말을 한 마을안에서 모두 벌어지게 한 영화가 나는 야속하게 느껴졌다. 시간 속에 갇혀 살아온 뱀파이어 소녀의 생존법이라고 한다면 이엘리에게 너무 지나친 비난일까.


오스칼이 이엘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 그 낮의 시간에 이엘리는 관속에 있고 둘은 주고받던 모스부호를 이용해서 사랑을 속삭이며 영화는 끝난다. 감독은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는 질문에 마음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살인도 불사하는 숭고한 사랑이야기로 보였다면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당장 눈 앞에서는 좋을지 몰라도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결코 그럴수 없을 이 둘의 이야기를 나는 마냥 행복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흥미롭다. 이 영화를 두고, 그 둘이 해피엔딩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먼 미래보다는 현재의 행복한 시간을 우선시할 것이고, 새드엔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재보단 미래를 멀리 바라보고 사랑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일까. 행복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는 것이라지만 그들이 타고 달리는 열차의 종착역이 행복하지만은 않다면 나는 한번쯤 재고하고 싶다. 낭만적이지 않다하여도 하는 수 없다. 끝이 정해져있는 사랑을 낭만이라는 이름하에 저지르고 보는건 내 스타일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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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아그네 2013/02/19 17:20 # 답글

    옛날에 보고 강하게 기억에 남은 영화인데.. 오랜만에 잘 상기하고 갑니다. 저 소년의 미래가 당시에도 참 걱정이었는데.. 나이를 좀 더 먹어서인지 이제 맘아프다기보단 덤덤하게 느껴지네요^^;
    그리고 저 소녀가 사실은 소년이었단 소릴 들었던 것 같은데 혹시 아시는 거 없나요?
  • 에반 2013/02/19 18:09 #

    여기 주인장은 아니지만 이엘리는 사실 소녀가 아니라 거세당한 소년이 맞는걸로 압니다^^
  • 아그네 2013/02/19 18:53 #

    앗 역시 그런가요? 어쩌다가 거세당하고 뱀파이어가.. ㅠ ㅠ 미국판도 보고싶어지네요~ 내용이 같을지..^^
  • 레비 2013/02/19 18:55 #

    ㅎㅎ 저도 이 영화를 본지 일년여가 다 되어가는 것 같아서 가물가물하지만 위에 에반님께서 잘 설명해주셨네요 :) 원작소설에선 이엘리를 중성으로 묘사했고, 이를 영화에서 '아마도' 두가지정도 암시를 넣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엘리가 오스칼에게 초반부에 - 내가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냐는 식의 말을 하죠. 여기선 정황상 '평범한 소녀가 아닌 뱀파이어여도 괜찮아?' 라고 이해하였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또 '여성'으로서의 뜻만이 아니었을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 그리고 두번째는 결정적으로 오스칼이 옷 갈아입는 이엘리를 문틈으로 우연히 보면서 이엘리의 성기부분을 보게되는데 거세당한 흔적이 몸에 새겨져있죠. 미국판에선 이 장면은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국판 렛미인에선 중성적 이엘리의 이미지보단 그냥 소녀 이엘리로서 남기고 싶어했던 흔적이 많이 보이거든요.

    아무튼 덧글, 답글 모두 감사합니다 :D
  • 아그네 2013/02/19 18:57 #

    오..
    설명 듣다보니 엿보던 장면이 기억나네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_<b
  • 마음속의빛 2013/03/24 22:48 # 삭제

    영화에서는 거세당한 남자 설정이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양성구유라고 하네요.

    남자의 생식기와 여자의 생식기를 모두 가진 사람을 뜻하는 거겠죠.

    현대에 와서도 아직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양성구유 설정보다
    편의상 거세당한 남자 설정으로 영화를 제작했고,
    굳이 영화 내용상에서 이 부분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감독의 판단하에
    이 부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없었다고 하네요
  • 로크네스 2013/02/20 23:29 # 답글

    확실히 스웨덴판이 더 삭막하고 조용한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애비보다는 이엘리가 더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고, 오스칼 같은 경우는 거의 설원 위장색처럼 보일 정도로 새하얗기도 하고...
  • 레비 2013/02/21 09:48 #

    전 이엘리는 뭔가 좀 무섭게 느껴지더라고요..; 처음보았을땐 나이도 왠지 많아보였고..ㅎㅎ
    오스칼의 피부색은 정말!! 놀라운 정도였습니다 ㅋㅋ 정말 북유럽에 어울리는 위장색같은 새하얀 피부였어요. ㅎㅎ
  • 마음속의빛 2013/03/24 22:45 # 삭제 답글

    스웨덴 작품은 예전에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왠지 모르게 보기 어렵더군요.
    몇 년 시간이 지나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네요.

    당시에는 어렵게 느껴졌던 내용인데 새삼스레 볼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다니..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 보는 차이에 따라 엔딩의 느낌이 달라진다는 건
    이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함이라 생각되네요.

    p.s 끝이 정해져 있는 사랑에 대한 글쓴이님의 글은 왠지 모를 아쉬움을 갖게 하네요.
    어떤 책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우리가 하려는 모든 사랑은 알고보면 새드엔딩이다.
    끝을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으니 사랑을 위해 끝을 생각하지 말라.
    뭐 이런 식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모든 인간의 사랑은 끝을 생각해보면 새드엔딩...ㅠ.ㅠ
  • 레비 2013/03/25 03:13 #

    덧글 감사합니다 :) 전 스웨덴 작품을 먼저 보고 미국판을 보았어요 ㅎㅎ
    감독도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에 대해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음을 의도했다고 하네요 ㅎ

    ps도 감사합니다 ㅎㅎ 제가 너무 멋없게 생각한것 같기도하네요 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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