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Melancholia, 2011 Flims









나는 이 영화를 한문장으로 요약함에 있어서 종말이나 죽음에 대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우울의 두가지 대칭적 모습이라고 쓰고 싶다. 저스틴이 보여주는 내적 우울과 클레어가 보여주는 외적 우울이 영화의 전후반, 완전히 대칭적 모습을 하고 있는 영화로 보였다. 물론 이 영화는 말이 많다. 그에따라 해석의 여지도 많을 수 밖에 없다. 고로 나는, 이 글에서 내가 본 영화만을 말할 생각이다. 오해를 사기전에, 이 점을 미리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덴마크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 3부작' 중 두번째에 위치해 있는 <멜랑콜리아>는 2009년작 <안티크라이스트>과 그의 차기 예정작인 <님포마니악> 사이에 있는 영화다. 이 세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라스 폰 트리에의 페르소나라는 샬롯 갱스부르가 출연한다. 그녀는 1부와 2부로 나뉘어있는 이 영화 후반부의 주인공 클레어다. 또 다른 주인공 저스틴역은 커스틴 던스트가 열연했다. 96년 <쥬만지>에서의 그 꼬꼬마 소녀가 어느새 이정도의 수준 높은 연기를 보여줄지, 솔직히 말해서 <스파이더 맨>시리즈때만 해도 몰랐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전후반부로 나뉘어져 파트 1과 파트 2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파트 1의 제목은 '저스틴'. 파트 2의 제목은 '클레어'다. 이 두 자매의 이름은 그대로 각각 따로 전후반부의 주인공이 된다.

이 외에도 영화에는 짚고 넘어갈만한 조연들이 있다. 사실 영화의 후반 파트 2는 단 네 명의 배우들로만 구성되지만, 결혼식 시퀀스가 전부인 영화의 전반 파트 1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영국의 베테랑 배우 중 하나인 존 허트가 그녀들의 아버지로, 첫째딸 클레어의 남편이자 처제인 저스틴의 결혼식을 위해 많은 부분 헌신하지만 보답받지 못하는 존 역은 키퍼 서덜랜드가 맡았다. 저스틴의 결혼식장에서도 그녀를 사업상 명목으로 괴롭히는 탐욕스러운 고용주 잭 역의 스텔란 스카스가드와, 저스틴의 신랑 마이클 역의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스웨덴이 자랑하는 두 부자배우다. 영화보단 미국 드라마에 더 자주 얼굴을 비추는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며칠전 강남대로 캘빈클라인 건물옥외광고의 거대한 화보 사진으로 마주쳐 날 놀라게했다. 그의 아버지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굿 윌 헌팅>의 랭보 교수, <캐리비안의 해적 2 : 망자의 함>에서 올랜도 블룸의 아버지 빌 터너, <맘마미아!>에서의 소피의 세 아버지 중 한명인 빌로 등장한 검증된 조연배우. 최근엔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살인마로, <토르>와 <어벤져스>에선 에릭 셀비그 교수로 자주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고 있다.





멜랑콜리아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뒤러의 동판화 '멜랑콜리아 1'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고보니 그 그림 안에서 멜랑콜리아라는 단어를 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영화는 적잖은 미술 작품들에 대한 메타포를 심어놓고선 정작 그 그림만은 넣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그 그림의 존재는 영화 제목과의 유사함을 빙자한 우연인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은 채 전반적으로 은근하게 깔려있는 영화의 주제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전자에 한 표를 들고 싶다. 감독도 관객들이 그 그림을 떠올리는 것을 구태여 막진 않았지만, 영화의 제목이 그 그림의 제목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뒤러의 동판화가 예술가의 고뇌와 이상에서 오는 '필수불가결한 우울'이라면 영화에서의 멜랑콜리아, 저스틴이 겪는 그것은 말그대로 어떤 목적이나 신념을 추구하는데에 따르는 우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영화일수록 해석하는 말들은 다양해진다. 세간에서 이 영화를 압축하는 문장들은 많다. '종말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든지, '죽음에 대한 시선'이라든지.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한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정작 종말이나 죽음은 뒷전이고 그저 두가지 형상을 가진 우울의 반복이라고 말이다. 제목인 멜랑콜리아는 그래서 파트 1과 파트 2에서 두 번,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재생된다. 파트 1에서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을 우울하게 만드는 '내적' 증상으로서. 그리고 파트 2에서는 클레어(샬롯 갱스부르)를 우울하게 만드는 '외적' 요인으로서. 파트 1에서의 우울은 주인공 내부에 있고, 파트 2에서의 우울은 주인공 외부에 있다(이 문장에서의 '주인공'은 다른 두 명을 지칭한다. 전자는 저스틴, 후자는 클레어다). 그리고 이 역시 대조적으로, 각 파트에서 우울이 존재하지 않는, 오히려 우울을 심화시키는 영역은 주인공들을 외면하고 소외시킴으로서 그것을 부각시킨다. 파트 1에서는 결혼식이라는 상황, 그리고 파트 2는 종말을 부정하기 바쁜 남편 존(키퍼 서덜랜드)과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 눈을 가려줘야하는 아들 레오(카메론 스퍼), 그리고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더 두려운 여동생 저스틴. 이 세명의 가족 구성원이 클레어에게 안겨주는 '어디에도 기댈 곳 하나 없는' 상황이다. 고로 정리하자면, 파트 1의 우울의 근원은 저스틴의 내부에 있고, 결혼식이라는 외부는 이를 심화시킨다. 파트 2의 우울의 근원은 클레어의 외부(우주로부터 다가오는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종말의 행성)에 있고, 그녀가 의지할 곳 없는 집안 분위기라는 내부적 상황은 이를 심화시킨다. 내가 이렇게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자신할 순 없다. 하지만 내가 본 영화 <멜랑콜리아>는 이렇게 두가지 상황의 대조적인 우울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던 근거는, 소거된 외부 세상과 제한된 공간에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구종말'이라는 범우주적 소재가 있음에도 지구 전체를 조망하지 않는다. 저스틴과 클레어에게 할당된 공간은 오직 저택 하나이다. 파트 1에서는 저스틴의 결혼식의 무대가 되었고, 파트 2의 클레어에게는 아예 외부로 벗어날 수 없는 집이자 공간이다. 물론 외부세계에 대한 언급이 대사로나마 영화에 있으며 결혼식 하객들은 파트 1의 마지막 외부세계로 벗어나간다. 파트 2에서도 존은 저택이자 호텔의 운영을 위해 마을로 나가 물건들을 사오는 장면이 있긴있다. 하지만 카메라가 직접적으로 저택을 떠나는 적은 한번도 없다. 즉 영화에서, 길 대신 마치 저택이 있는 곳이 섬인 마냥 끝없이 펼쳐진 바다로 추정되는 물을 마주하고 있는 이 신비로운 모습의 저택은 저스틴과 클레어의 내적 공간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영화들에서 '물'은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저스틴은 파트 1 첫 장면에서 신랑 마이클과 함께 지나치게 긴 리무진을 타고 저택으로 '들어가다가' 난관에 봉착한다. 결국 이 둘은 걸어서 저택까지 가게 되고 이로인해 결혼식은 시작부터 꼬이게 된다. 그런데 파트 2의 시작 역시 저스틴은 외부 어딘가로부터 저택으로 '들어온다'. 파트 1이 끝나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니 사실 마지막 씬만 아니라면 파트 2가 파트 1보다 더 먼저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정도다. (저스틴의 우울증은 파트 2의 초반부에서 더 심화되어 있다) 그런데 파트 1에서도, 파트 2에서도 우리는 이 저택에 이상하게 감금되어 있는 두 여자를 볼 수 있다. 파트1에서 저택으로 들어온 저스틴이 우울을 겪자 그의 어머니는 '나가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녀는 하지 못한다. 결국 망쳐진 결혼식 끝에서 직장상사도, 믿었던 아버지도, 심지어 신랑조차 모두 저택 밖으로 나가지만 그녀 혼자 나가질 못한다. 파트 2에선 어떠한가. 저스틴의 애마는 외부로 나가는 다리 앞에서 늘 멈춘다. 하지만 우울이 클레어에게 변이되었을 때, 클레어가 아들 레오를 데리고 탈출하려는 골프카트차 역시 같은 지점에서 멈춘다. 그녀는 걸어나가려 하지만 그녀가 헤매다 돌아오는 곳은 19번 홀. 18번 홀까지 있다는 골프장에서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다. (IMDb에 따르면 감독은 19번 홀을 '림보limbo'라고 표현했다. 낯익은 단어가 아닌지.)




이쯤되면 우주에서 다가오는 종말의 존재,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행성은 영화의 주연이 아니게 된다. 물론 지구상의 생명체나 인간이 몰살당하는 역대 수많은 '종말 영화'들에 비해 지구가 산산조각 박살나버리는 식의 종말의 제안은 확실히 신선하긴하지만 어차피 영화에서 지구 전체의 안위는 관심사가 아니다. 박살나버리는 것이 지구이든 저택이든 크게 차이는 없다. 즉 이것은 크게 보아 종말과 세상과의 대립이 아니라, 개인과 우울의 대결이다. 파트 1이 파트 2보다 앞서 배치된 이유를 나는 여기에서 찾는다. 파트 1에서 저스틴이라는 캐릭터가 어떤 우울을 겪었는지를 우리는 보았다. 하지만 파트 2에서, 파트 1에서의 저스틴의 우울을 클레어가 바톤을 이어받는데 반해 저스틴의 우울은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다가오면서 점차 완화되어 간다. 두 문단 앞에서 말했지만 또 한번 말해서, 클레어에겐 우울의 원인이 되는 그 행성을, 외부에서 오는 우울이라고 한다면, 파트 1에서 자신의 내적 우울이 외적 행복과 충돌되어 문제를 일으킨 저스틴에게는 이를 오히려 내외적으로 합치시켜주는 존재이다. 행성의 존재가 없을 때(아직 지구로부터 아주 멀리 있었던 파트 1 때- 저스틴은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 혼자 그 행성을 발견하고 미소짓는다)는 내적 파장을 겪던 저스틴이 다가온 외부의 파장과 공명하면서 역으로 안정을 되찾는 과정은 파트 2의 후반부에 잘 드러나있다. 행성이 마침내 도래했을 때, 이제 저스틴과 클레어는 자리를 바꾼다. 클레어는 견딜 수 없어하고, 저스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달래며 마지막을 맞는다. 영화가 반드시 어떤 교훈이나 메세지를 남겨야한다고 믿지는 않지만, 굳이 이 영화 <멜랑콜리아>에서 그것을 찾고자한다면 이 지점이 아닌가 싶다. 내외적 측면에서의 개인 심리적 파장의 합치. 그것을 겪은 자는 안정을 획득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불안해하고 우울해할 수 밖에 없다. 파트 1에서의 저스틴을 보고 우리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파트 2에서의 클레어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 파트 2에서의 클레어를, 예정된 죽음 앞에서 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당연한 모습으로 보기 쉽다. 하지만 그 종말을, 죽음이 아닌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우울의 요인으로 상정해본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저스틴과 클레어가 각기 다른 상황하에서 발현시킨 우울의 모습과 해소를 대조하면서 우리가 우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일종의 편의적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스틴이 제시했던 슬로건대로 세상은 nothing으로 돌아갔지만 우울한 저스틴에게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을지도. 종말에 대한 병적인 불안증세를 보인 클레어에게 그런 방식의 내외적 합치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저스틴에게는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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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3/02/15 19:0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2/15 20:1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2/18 10:4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2/18 20:2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4/01 17: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4/03 14:4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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