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2003 Flims









음란하군요.

요하네스 베르메르(콜린 퍼스)의 그 그림을 본 아내 카타리나(에시 데이비스)가 분노와 슬픔이 한데 섞인 표정으로 울먹이며 말한다. 아내인 자신이 아닌, 보잘것 없는 하녀의 초상화 속에 자신의 귀에 있어야 할 진주 귀고리가 그려져 있음을 발견했을때. 남편의 정신적 외도를 알면서도 막을 길 조차 없던 자신과, 남편의 관심을 서서히 독차지해가는 매혹적인 하녀를 동시에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그림그리는 것을 막을 순 없었던 아내는 슬픔을 참다못해 괴성을 지르며 그림을 찢어버리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아내의 대사에서, 그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서슴없이 말해온 그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보고 느꼈던, 전부 다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나머지 퍼즐 한 조각을 비로소 찾은 느낌이었다. 음란하다니. 신비롭고 아름답고 처연하고 순수하지만, 내가 어딘가 이상하게 야하다고 느낀 그 그림에 대한 감상을, 영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의 화가이지만 그에 대해선 실제로 알려진바가 많지 않다고한다. 그에 따라, 그의 작품들에 조차 별다른 비하인드 스토리가 남겨져있지 않은 상태. 주로 후원자에게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는 화가라지만 이 작품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모델인 '소녀'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설은 얼마든지 상상력의 여지로 남겨져 있었다. 오늘날까지 단 한번도 네덜란드 국외로 반출되어 전시된 적이 없다는, 북구의 모나리자, 신비한 표정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그리하여 마침내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로 이야기를 가졌다. 일반적인 미술사적 해석에 따라 진주 귀고리의 상징성과 머리의 푸른 터번 때문에 결혼을 앞둔 새색시의 초상화로 간주되어온 이 그림의 주인공은, 베르메르가의 하녀 그리트(스칼렛 요한슨)가 되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베르메르 저택의 하녀로 들어간 그리트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꼭 빠짐없이 이름을 올려 온 스칼렛 요한슨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금발머리를, 이 영화에선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갈색머리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주요한 소재중 하나는 예술이 아니라, 신분차이를 뛰어넘은 금지된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하녀라는 하층계급에 속해있으면서도 상위계급인 주인(베르메르)의 예술세계를 흠모하고, 안주인의 경계와 그 집 자녀들의 시기를 받으면서도 넘지 말아야할 선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역할을 해야했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서의 스칼렛 요한슨의 표정은, 그녀에게 유명세를 안겨다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의 얼굴보다는 그보다 이전, <호스 위스퍼러>때 보았던 내적 당황과 갈등을 안고있지만 가능한 꾹 참고있는 듯한 표정이다. 콜린 퍼스가 연기한 베르메르는, 베르메르라는 신비에 쌓여있는 화가를 콜린 퍼스가 연기했다기보다, 베르메르라는 화가가 콜린 퍼스로 인해 재창조된 기분이다. 과묵하고 말없고 표정의 변화가 최소한인 콜린 퍼스 특유의 우직한 남성 연기는 이 영화에서 화가 베르메르로 다시 드러난다.







영화는 대사가 많지 않다. 러닝타임도 길지않은 90여분이다. 게다가 적잖은 씬들이 수채화와 빛을 차용한듯 영상은 흩뿌옇다. 대사없이 흐르는 '그림'같은 장면들이 많은 이 영화는 베르메르가 활동하던 네덜란드 델프트의 시대상과, 한 화가의 가정풍경을 재현한다. 아직은 파산당하지 않은채 부유함에 기대어 살고있는 아내와 장모의 저택. 그러나 그림을 의뢰받아 그리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가야하는 가장인 화가. 어린 많은 자식들과, 그 대가족을 유지시키기 위한 하녀들. 그리트가 일하는 '하녀들의 공간'과 잔치가 벌어지는 유리창 안쪽의 공간은 극명하게 구분된다. 반 루이벤(톰 윌킨스)은 예술과 돈이 동시에 존중받는 이 시대상의 구조 정점에 서있는 자이다. 돈이 있고, 그 돈으로 예술을 부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그리고 예술적 감각보다는 성적 욕망이 앞서는 탐욕스러운 남자다. 그는 베르메르에게 원하는 그림을 그리게 만들 힘이 있지만 그가 그리트를 탐하기 시작하면서 베르메르는 그녀만을 모델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트와 베르메르의 사랑은 그 끝을 알 수 없고 경계선조차 모호하다. 게다가 '과연 이들이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호감이라도 있는 것인가'를 알아차리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니, 심지어 그리트가 처음 흠모하던 것은 베르메르라는 화가가 아니라 어쩌면 예술 그 자체일 수도 있었다. 베르메르를 만나기 전, 그리트가 먼저 마주친것은 그의 화실과 그의 그림이었다. 빛이 들어오는 정도를 보고 더 나은 채광을 생각하고, 그림속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베르메르는 물감을 구하는 일 등을 맡기며 마음을 열어간다. 그 역시, 그의 그림은 이해할 생각보다 보석에 더 관심이 있을 뿐인 자신의 아내로부터 얻지못한 감정을 그리트에게 느꼈다. 하지만 이 둘은 주인과 하녀. 신분의 격차가 뚜렷하고 넘어선 안되는 선을 가진 사랑이다. 이들은 어떠한 사랑의 고백이나 속삭임조차 하지 않는다. 단 한번의 키스씬은 커녕, 스킨십이라고는 진주 귀고리를 위해 그녀의 귀를 뚫어주는 베르메르의 손길이 우리가 기억할만한 전부다. 그 장면, 그리트는 예의 고개를 살짝 떨구더니 베르메르 쪽으로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돌려 짧은 찰나 마주본다. 입술과 입술이 닿기 딱 좋은 장면과 구도와 순간. 하지만 콜린 퍼스는 특유의 경직된 표정을 그 순간에도 잃지않고 프레임 밖으로 일어나 사라진다. 이 장면을 나는, 그림이 공개되는 순간보다 더한 이 영화의 진정한 하일라이트로 꼽고 싶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소녀의 귀를 뚫어주는 이 말없는 장면이, 얼마나 에로틱한 장면이 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오히려 그리트는 푸줏간에서 일하는 청년 피터(킬리언 머피)와 평범한 연애를 하기도 한다. 그 청년 앞에서의 그리트는 여느 사랑에 빠진 소녀와 다를바 없다. 사랑을 말하고 정을 나누고 함께함에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베르메르와 그녀의 사이는 결코 그럴 수 없다. 이쯤되면 그리트와 베르메르의 관계는 사랑만으로는 형언되기 힘든, 어떤 정신적 교감마저 깃들어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신분 차이에 의한 둘 사이의 한계와 거리감은 사회적으로, 위아래 양쪽에서 모두 그리트에게 경고한다. 위에선 반 루이벤의 입을 통해, 아래에선 피터의 입을 통해서. 결국 그리트는 신데렐라가 아니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완성되지만 그림은 그리트를 탐했던 후원자 반 루이벤에게로 예정대로 돌아간다.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집으로부터 쫒겨나고 이후 그리트의 삶에 베르메르는 더 이상 없어보인다. 그리트와 베르메르와 아내 카타리나와의 긴장감 넘치는 삼각관계는 한 점의 그림을 낳은 이후 해체된다. 여전히 삶의 많은 부분을 미스테리로 남겨둔 화가답게, 영화 속 베르메르 역시 그리트가 집을 나온 이후 어떠한 암시조차 없으며 그리트 역시 베르메르의 그림, 그리고 그 그림속 하나의 소녀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후 그리트에게 전해진 선물, 진주 귀고리 한쌍은 베르메르와 그리트 사이에 잉태된 하나의 상징이 된다. 조개가 오랜 시간 품었다 세상에 내놓는다는 진주라는 보석이 갖는 의미도 이와 일견 상통한다. 한마디의 고백도, 성적 접촉도 없이 그림 한폭으로 승화된 사랑의 결정체로 말이다.






















덧글

  • bijou 2013/02/11 08:13 # 답글

    베르메르 작품 좋아합니다
    그래서 살짝 봤는데 재미 있더군요
  • 레비 2013/02/11 14:21 #

    저도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좋아해요! 책을 먼저 읽고, 나중에 영화를 봤는데 역시 괜찮더라고요 :)
  • bijou 2013/02/11 15:35 # 답글

    개인적으로 책은 별로였지만 그림은 맘에들었어요
    그에 반해 영화는 소설에 있는것을 재구성해서 약간 다른감이 있었죠
  • 레비 2013/02/11 16:00 #

    맞아요. 책과 영화는 조금 달랐죠 :) 베르메르의 그림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책에 있던 내용을 조금 더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기 편하게 바꾼듯했어요. ㅎ
  • 사라다 2013/11/29 03:05 # 삭제 답글

    원작을종이닳도록돌려읽고 영화는딱한번봤는데ㅜ베르메르같은남자와 뜨거운 계몽 ㅡ정신적사랑을하는것은 평생에 앎과 동질감욕구의목마름이있는 여자라면 누구나꿈꾸는일일테지만 그것은얼마나허무한일입니까 베르메르는 그림속에 그리트를가두고 완성을위해 그녀의귀를뚫게하고 직장잘리게하고기타등등 파멸시켰습니다암튼 나쁜남자입니다ㅜ몸만아닐푼이지 손댄것이나다름없는데 그러나동시에 어떤사람도줄수없었던 자유를 주었습니다귀고리를 유산으로넘기면서..그둘은 모델과 화가로서만허락된시간에 사랑을햇습니다 색계나 우행시처럼 종착역도없고 둘중하난 파투더멸이지요ㅜ아마 현실엔없기때문에 비극성 순수함이더 커져보이는거겠죠 그러나 누군가나에게 구름엔 회색만있는게아니다 하고 새로운세계를보여준다면. 파멸이더라도 알면서도 가고싶어질테죠 ㅜㅜㅡ. .귀에피가나는걸참듯이요..
  • 레비 2013/12/01 01:36 #

    저도 원작소설을 읽어보았습니다 :)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 지금 제 아이폰 잠금/배경화면이기도 하죠 ㅎㅎ 정말 이렇게보니 색계와도 비슷하네요. 하지만 베르메르와 그리트의 선을 끝까지 지키는 욕망은 그래서 더 슬픈 비극이 예정되어있는것 같아요 ㅎ 이미 귀를 뚫는 장면이 순수성을 잃는 이미지이긴했지만.. 여기서도 콜린 퍼스의 연기는 잘 어울렸던것 같아요 :)
  • 2013/11/29 03:15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비 2013/12/01 01:38 #

    사랑에 가치를 부여하는건 정말 힘든것 같아요. ㅠ 전 자기파괴적인 사랑도 가치가 있다곤 생각하지만 제가 경험하고싶진 않네요 ㅎㅎ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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