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지, Damage, 1992 Flims






12살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중년의 남자가 그 소녀와 함께 있고싶어 그녀의 어머니와 결혼을 하고 그 감정을 끝까지 어쩔줄 몰라했던 97년 영화 <로리타>. 제레미 아이언스는 주인공 험버트를 연기하며 이 문제작에서 특유의 허망한 눈빛으로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인 사랑의 감정을 가진 남자를 연기해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보다 5년 앞서, 제레미 아이언스는 어린 소녀를 탐하는 것보다 더한 금단의 사랑을 해봤다. 나는 <로리타>의 주인공으로 제레미 아이언스가 캐스팅된 이유가 영화 <데미지>에서의 그의 캐릭터, 그의 연기가 큰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그만큼 <데미지>에서의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주인공 스티븐은 <로리타>에서의 험버트로 이어질 정도로 둘다 비정상적인 사랑, 하지만 밀려오는 감정을 어쩔줄 모르는, 올곧고 강직해보이는 그의 외모와는 정반대로 한번 느낀 사랑에 모든것을 내던질 정도로 무서운 감정을 경험한다. 94년 국내 개봉당시 내용의 파격성 때문에, 그리고 외설적인 성애묘사 때문에 여러번 검열과 삭제를 당하고도 개봉이후 논란이 되었던 영화. 프랑스의 루이 말 감독의 영화 <데미지>다.







아들의 약혼녀와 사랑에 빠진 중년 남자의 이야기는, 12살 소녀와 사랑에 빠진 중년 남자의 이야기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버린다. 참 짓궃게도 제레미 아이언스는 영국 꽃중년 배우다운 외모에 한치의 빈틈도 없어보이는 차가운 인상을 갖고있지만 그는 유독 비정상적인 사랑에 빠져 결국 그것을 잃거나, 배신당하거나, 성취하지 못하는 비운의 남자들을 연기해왔다. 그의 초기작중 하나인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메릴 스트립과 함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그 영화는 존 파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소설을 대신 읽고 짐작해보건데, 제레미 아이언스가 맡았던 주인공 역시 멀쩡한 약혼녀를 두고 남성에 대해 증오심을 품은 여자를 갈망하다 파멸하는 역할이다. 86년 영화 <미션>으로 명성을 얻고, <다이하드3>에서는 악역 사이먼을 맡기도 했지만 그는 <데미지>, <로리타>에선 각각 아들의 연인, 12살 양녀 딸과 사랑에 빠지는 역을 거쳐 급기야 <M 버터플라이>에선 여자인줄 알았던 중국인 남자 경극 배우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한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그의 얼굴은 오히려 이렇게 내면의 갈등과 클라이막스에서의 충격을 더 극대화한다. 표정이 없기에 더 슬퍼보이는 얼굴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제레미 아이언스다.







<데미지>를 화제로 만든 또 다른 캐스팅은 바로 프랑스 국민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다. 워낙 출중한 여배우들을 많이 보유한 프랑스지만 그중에서도 줄리엣 비노쉬가 가진 '프렌치'한 이미지나 분위기는 이 전형적 '영국신사'스러운 제레미 아이언스와의 연기호흡으로 영화자체를 캐스팅만으로도 화제에 올려놓았다. 게다가 두명 모두 '무표정'일때 더 많은 감정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배우들. 90년대 전성기를 달리던 두 배우가 포르노를 연상케하는 노골적인 섹스신을 보여주는 것 부터가 큰 주목을 끌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시나리오였다. 영국 국회의원인 스티븐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는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가정적으로도 모두 안정적이고 인정받는 중년남자다. 기자인 아들 마틴(루퍼트 그레이브스)에게 새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파티에서 그녀를 소개받기로 한다. 파티가 열리고, 스티븐은 본능적으로 그 사람들 속에서 아들의 새 여자친구를 발견하고 눈을 떼지 못한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안나 바튼(줄리엣 비노쉬)는 '이 남자친구의 아버지'로부터 단 몇마디의 인사와 눈빛교환으로 그의 사랑을 감지한다.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영화 시작 단 5분여만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며느리가 될 여자와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까지 말이다.






윤리적으로 접근한다면 이 영화는 지탄받아 마땅할지 모른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따라 '비윤리적 막장 드라마'가 될 수도 있고, '상식으로조차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의 비극적 스토리'가 될 수 도 있는 영화다. 영화에는 다소 안나가 남자를 홀리는, 또는 스티븐을 유혹하는 이미지로 비춰져있지만, 그녀의 과거 이야기도 한꺼풀씩 드러나면서 그녀가 '연인 이외의 가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악의적인 팜므파탈적 행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릴적부터 근친에 대한 상처가 있는 그녀는 자살한 오빠에 대한 죄책감이나 트라우마로 연인의 아버지인 스티븐과의 밀애를 지속하고자 한다. 스티븐에 비해 수동적인줄로만 알았던 안나가, 스티븐이 멀어지려하자 아예 방을 구해 열쇠를 보내면서 적극적으로 다시 그와 계속 만나고자 함으로부터 그녀 역시 스티븐을 유혹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녀도 스티븐에게 사랑에 빠졌다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둘의 사랑은 병적인 사랑이다. 둘 다 모두 그래선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생각과 윤리관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밀려오는 사랑의 감정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생각만으로는 막기에 역부족이다.






이것이 비상식적인 관계에 포커스를 맞춘것이 아니라면 스티븐과 안나의 관계는 금지된 사랑, 금단의 사랑 쯤 위치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븐은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들, 딸, 그리고 그가 이룬 모든 사회적 위치나 성취등을 모두 저버릴 각오가 되어있다. 심지어 안나와 함께하기위해 그는 이 모든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너무나 맹목적이어서, 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다소 허황되게 들리기까지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사랑에 눈먼 젊은 20대의 치기어린 호언장담이 아니라 이런 위태로운 게임을 계속하고자 하는 중년남자의 몸부림이기에 더이상 장난스러운 말이 아닌 또 다른 무게감을 갖는다. 하지만 안나는 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그는 스티븐을 몰래 만나는 중에도 아들 마틴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약혼 선언까지 한다. 안나는 마틴을 사랑하지만 스티븐과도 밀애하고 싶어한다. 스티븐은 모든것을 던져 버려서라도 안나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아들이 사랑의 라이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마틴은 안나가 자신과 있을때만 사랑스러운 면을 보여준다면서 아버지의 속사정도 모른채 자신과 그녀의 관계를 자랑하기에 바쁘다.







어릴적 안나가 다른 남자와의 '정상적인' 관계를 보고 자신을 사랑하던 친오빠가 자살했다는 충격을 그녀는 스티븐을 통해 보상받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진심으로 스티븐과 결혼이라거나 공개적인 연애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서 정상적인 연애(마틴)과 비정상적인 밀애(스티븐)를 모두 유지하고 싶어했다. 그것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여느 여성과 다를바없는 사랑을 하는 길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아들과 아버지와 동시에 연애를 하겠다는 발상은 보통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은근히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의 편을 들어준다. 이럴수도 있다- 가 아니라 이들이 '알면서도 당하는' 이런 무기력함에 동정심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스티븐과 안나는 어느쪽이 피해자고 가해자라고 할 수도 없을만큼 서로 빠르게 탐닉했고 어느 한명도 먼저 멈출 수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둘 다 모두 사랑으로부터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가해자가 되는 관계는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을때 시작된다.







영화의 후반부 모든 것을 잃은 스티븐에게 아내는 울며, 그런 관계가 계속 될줄 알았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조차 제레미 아이언스의 표정은 일그러지지 않는다. 사랑의 피해자에게 자기변호가 무슨 소용일까. 영화는 둘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없다시피 생략해놓고선, 보기만해도 위태하고 아슬아슬한 관계를 영화 내내 보여준다. 그 둘의 관계가 막 들킬것 같아 아슬아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여금 "이래선 안되는데."라는 생각이 들게만든다. 하지만 둘의 밀애를 계속 보다보면 곧 모든 이들의 평화를 위해 아들 마틴에게 들키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발견하게 된다. 영화 <데미지>가 말하고픈 것은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타당성이나 그에 대한 옹호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불시에 찾아왔을때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이 아닐까 싶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사회적 시선과 윤리와 인륜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그런 불가사의한 힘을.

















덧글

  • 닥슈나이더 2013/02/05 13:37 # 답글

    머릿속엔 실락원이 떠오르네요......
  • 레비 2013/02/05 15:51 #

    앗 ㅋ 처음엔 밀턴의 실낙원 말씀하신줄알았어요 ㅎㅎ 일본 영화 말씀하신거 맞죠? ㅎㅎ 제가 그 영화는 본적이 없어서 덕분에 찾아봤네요 ^-^
  • 2013/02/07 14:4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2/07 20:3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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