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2008 Flims










영국이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맡긴, 대니 보일이 연출한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퀴즈쇼를 가장한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주인공 자말(데브 파텔)이 어떻게 상금 6억원 퀴즈쇼의 마지막 최종 단계에 도달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주어지는 4개의 보기. 마지막 보기인 It is written을 국내개봉당시 영화관에선 어떻게 자막처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It is destiny로 바꾸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영화는 현재, 퀴즈쇼의 마지막 한 문제만을 남기고있는 청년 자말의 시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속임수를 썼다고 확신하는 퀴즈쇼의 진행자(아닐 카푸르)에 의해 경찰에 연행된 그는 심문받는다. 뭄바이 경찰 수사관(이르판 칸 - <라이프 오브 파이>의 그 파이 아저씨)은 자말을 추궁하면서 의사나 변호사같은 똑똑한 사람들도 도달하지 못한 마지막 단계에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자란 자말이 속임수를 쓰지않고 척척 맞춰 올라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말은 '실은 모든 문제의 답을 알고 있었다'면서 그가 1단계부터 하나하나 답을 알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지나온 삶을 회상한다. 영화는 이렇게 퀴즈쇼의 단계를 따라가면서 자말의 삶을 되짚는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퀴즈쇼는 더이상 퀴즈쇼가 아니다. 한 빈민가 소년의 인생이 퀴즈쇼의 각 단계별 문제로 재구성된다. 문제가 운이 좋게 그의 인생을 따라갔다기보다 그의 인생이 퀴즈쇼에 반영되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슬럼가에서 형 살림(마드허 미탈)과 함께 자란 소년 자말이 어머니를 잃고, 고아로 살다가 아이들을 앵벌이시키는 백인들로부터 탈출하기도 하고, 어릴때부터 함께 지낸 첫사랑 라티카(프리다 핀토)와 헤어지기도 한다. 타지마할등을 전전하다가 라티카의 소식을 들은 자말은 뭐에 홀린듯 그녀를 찾아헤매고 형 살림이 살인을 저지르는 댓가로 그녀를 구해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번 살인을 저지른뒤 조직에 들어간 형으로부터 멀어진 자말은 형과 라티카와 모두 헤어진다. 퀴즈쇼에 등장하는 문제들은 자말의 이런 삶 구석구석에 우연처럼 스며들어있다.








운명은, 그것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온다. 그 마지막 전화찬스가 사회자가 전화를 끊으려는 그 순간에 받을 수 있는 것도, 무려 세번이나 헤어지고도 다시 만나는 것도, 소년원 출신의 같은 앵벌이 친구를 만나 라티카의 소식을 전해들을수 있던것도, 영화는 거의 모든 우연들로 가득차있다. 자말이 퀴즈쇼에서 정답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것도 그의 인생에서 심어져있던 모든 우연들의 산물이었다. 도망치다 우연히 마주친 신의 분장을 한 아이의 손에서 발견한 활,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건네준 지폐에 그려져있던 프랭클린. 소년원에서 연습한 노래의 시인. 그 어떤 것도, 자말이 퀴즈쇼를 대비해 배우거나 공부한 것은 없다. 그의 인생이 하필 그 퀴즈쇼에 반영되었던 것일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우연이다. 하지만 우연이 이끄는 비현실성이 결국 그를 이끈것은 운명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에서 그의 힘으로 이룬 것은 거의 없다. 그는 형의 손에 이끌려 소년원을 탈출한 덕에 눈을 구했고, 형의 권총 덕에 라티카를 다시 구했으며, 다시 만난 형의 희생 덕에 라티카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잠시 자리를 맡아달라는 전화교환수의 부탁 덕에 그는 형의 전화번호를 찾고 재회 할 수 있었다. 그가 노력해서 얻은 것은 없다. 그는 그저 그때그때 운명이 시키는대로 어쩔수 없이 움직였을 뿐이다. 어린 라티카와 도망치려했을 때도, 그녀가 다시 잡혀가는 순간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가 했던 유일한 자발적 의지의 행동은 퀴즈쇼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부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라티카가 어디선가 보고 있을 것이라는 목적이 있었기에, 출연 자체로, 아니 한문제씩 더 맞추어 방송시간을 늘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렇게해서 그는 처음으로 운명을 자신의 통제하에 둔다. 운명에 끌려다니기만 하던 소년은 그렇게 거짓말 같은 행운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퀴즈쇼가 내포하는 우연성 때문에 이 영화를 '될 놈은 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속 자멜은 엄밀히 '될 놈'은 아니었다. 우연을 가장한 행운들이 아니라, 행운을 가장한 우연이라고 보는게 맞는 것 같다. 나는 사실 마지막 퀴즈에서 그가 당연히 틀릴 것이라고 보았다. 재미있게도, 자신의 지나온 삶의 기억덕에 계속 문제를 맞춰오던 그는, 마지막 두 문제에서 더이상 그가 살아온 인생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제인 크리켓 선수의 이름. 하지만 자신을 시기하는 퀴즈 진행자의 방해 공작으로부터 오히려 답을 역추리해낸다. 삼총사 한명의 이름을 묻는 마지막 문제는 자신의 최종 목적인 라티카와의 전화통화 이후 운명에 던진다.







그전까지의 모든 문제를 자신의 지나온 과거로부터 답을 얻어냈다면, 한 문제는 그제서야 비로소 현재의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자신을 불행하게 해온 불운과 방해에 대해 저항하고 맞서서 답을 추리해낸다. 진행자가 던져준 오답을 피해간 것은 답을 모르는 자멜에게 있어서 저항과 자기의지였다. 그리고 마지막 퀴즈. 6억원보다 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한 자멜에게 정답과 오답은 큰 의미가 없었다. 라티사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는 어떠한 힌트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라티사 그녀 자신이, 자말이 기억해내지 못했던 삼총사의 마지막 한명, 아라미스였다는 것이다 (라티카를 빗속에서 처음 만났을때 자말과 살림의 대화에서 포르토스와 아토스의 이름은 등장하지만 나머지 한명의 이름만 기억하지 못한다). 라티사는 아라미스라는 답을 자말에게 알려주진 못했지만 그녀가 직접 전화를 받음으로서 자말에게 아라미스라는 정답 자체가 되어주었다. 정답을 얻은 자말은 겉보기엔 행운에 의지하는듯해 보이지만 사실 더 이상 그 마지막 퀴즈를 틀릴리 만무하다. 그렇게해서 그는 마지막 퀴즈마저 통과하는 것이다.


인도의 세계적 영화 음악 작곡가, A.R 라만이 단 20일 안에 모두 작곡했다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각종 영화제의 음악상을 휩쓸기에 충분했다. 나는 뜬금없게도,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정작 영화가 모두 끝나고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단체 군무씬이었다. 영화가 이미 스타일리쉬한 편집과 영상으로 좀 뮤직비디오스럽게 찍어놓았다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아예 뮤직비디오를 찍어놓았을 줄이야. 'Jai ho!' 라는 이 경쾌한 곡은 북미 시장에선 푸시캣돌스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고.







그 마지막 보기가 It's destiny가 아닌, 굳이 It's written으로 적혀있다면 이것은 운명론뿐만 아니라 미리 어딘가에 쓰여있다는 식의 '예정론'이 될 것이다. 자말의 라티카와의 사랑도 쓰여있는 운명이었다면 자말이 살아온 그 불행한 삶도 예정되어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런 운명론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화신과 같은 자말이 마지막에 당도하는 곳은, 이미 정해져있는 운명을 정면으로 대항하는, 인생역전의 기회라고도 할 수 있는 백만장자 퀴즈쇼의 마지막 문제이다. 대니보일은 자말이 지나온 삶을 회상하면서 답을 맞춰온 그 퀴즈쇼의 마지막 문제를, 하필 그 마지막 문제만 온건히 행운에 맡김으로서 사랑과 운명을 동시에 획득하고 지배하게 만든다. 그것도 지금까지 자말의 인생을 짓누르고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던 가난, 빈곤, 계급등으로부터 한방에 탈출할 수 있는 거액이 걸려있는 그런 기회를 말이다. 그가 마지막 문제마저 운에 맡기고 적중하는 모습은, 우리들에게 극적인 희열을 줄 수는 있지만 그 모든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불가항력적 해피엔딩이다. 불운한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한 여자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망을 잃지 않았기에 그의 노력을 갸륵히 여긴 신이 2천만 루피로 보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대니 보일은 첫 시퀀스에선 질문을, 마지막 시퀀스에선 답을 보여줌으로서 운명론을 비꼬는 블랙코미디를 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 자체가, 첫 장면에서 보여준 문제의 답을 영화 마지막에 갖고 있다고 우리에게 은근히 말하면서 시작하잖는가.


















덧글

  • 細流 2013/01/30 14:30 # 답글

    멋진 분석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정말 인상깊게 봤던 영화였는데 문득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두 형제가 어릴 때 배우던 '삼총사'를 미처 세 번째 총사인 아라미스가 나올 때까지 배우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렸는데 그게 하필 마지막 문제로 나오다니! 싶더라고요. 이 문제에선 자말은 정말 찍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대답을 했는데, 그 순간에 저는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오히려 맞출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라미스는 여자가 아니에요.ㅠㅠ
  • 레비 2013/01/30 16:24 #

    헷 지적 감사합니다 :) 전 왜 여지껏 삼총사중 한명에 여자가 있다고 믿어왔을까요 ㅋㅋ 뮤지컬도보고 관련 영화들도 봐놓고 ㅎㅎ

    영화초반에서 삼총사가 한번 언뜻보이고 다시 총사들의 이름이 지나가지만 아라미스을 기억하지 못할때, 왠지 저것이 복선이 되겠구나 싶었는데 마지막 문제일줄은 몰랐어요 ㅎ 누군가는 낮은 단계의 문제들은 인도와 관련된 문제들이도 높은 액수로 갈수록 서구와 관련된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서구우월주의를 찾으시는 분도 있더라고요. ㅎ
  • 잠본이 2013/01/31 22:00 # 답글

    국내 자막에서는 '정해진 운명이었기 때문에'로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론 '각본에 그렇게 되어 있었으니까'라는 블랙코미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OTL
    엔딩의 댄스가 유쾌했죠.
  • 레비 2013/01/31 22:37 #

    아하 예상과 비슷하게 나왔었군요 :) 저도 다 보고나니 결국 '모든 것은 운명대로-' 라는 메세지의 이 영화가 각국 영화제에서 대단히 호평을 받았던 것이 의아할 정도더라고요. 영화자체는 나무랄데없이 재밌었지만... 엔딩시퀀스의 주제곡 댄스도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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