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Babel, 2006 Flims









(몇년전에 읽었던 책 제목을 패러디하여 쓰자면) 그들은 한 자루의 총에서 시작되었다.


영화관에서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보다가 오랜만에 잊고 있던 영화 하나가 떠올랐다. 여러가지 시공간을 캐릭터를 매개로 하여 묶는 <클라우드 아틀라스>와, 무관한 캐릭터들을 우연한 사건으로 묶는 이 영화 <바벨>이 각 이야기가 서로 독립되어 옴니버스처럼 펼쳐진다는 공통점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알레한드루 곤잘레스 이냐루트 감독. 감독의 이름은 생경하지만 그의 영화 <21 그램>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제법 있을지도 모른다. 숀 팬 주연의 이 철학적 스릴러 위에 흘렀던 신비롭고 과묵하지만 금새 터질것만 같은 분위기가 이 영화 <바벨>에서도 계속된다. 브래드 피트가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를 거절하고 출연한 영화.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보다 2년 먼저 부부를 연기한 영화. 4개의 각기 다른 국가, 다른 세계에 살고있는 인물군들이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연결되지만 이것은 그 연결과정을 거꾸로 추적해 올라가는 스릴러가 아니다. 오히려 등장하는 순서를 꼬박꼬박 지키며, 그것도 시간적 순서마저 지켜가면서 각기 다른 인물군들이 겪는 드라마를 써내려간다.


영화는 총 4개의 이야기가 순서를 지키며 각각 6번의 시퀀스를 가진다. 그러니까 영화 전체를 24등분하고 각 이야기는 순서를 지킨 4번의 로테이션이 한 묶음으로 6번 반복된다는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순서대로 모로코, 멕시코, 미국, 일본이라고 태그 붙일 수 있다. (이야기의 장소가 아니라 각 주인공들이 속해있는 국가다) 이 순서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어김없다. 다시말해 첫 시퀀스는 모로코이고, 총 여섯번을 돌아, 마지막 시퀀스는 일본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첫번째 이야기. 모로코의 사막지역, 어느 유목민의 집에 아버지가 누군가로부터 한자루 소총을 사다 두 아들에게 준다. 총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동생 유세프와 그의 형은, 아버지가 집을 비운동안 자신들의 생업이자 기르고있는 양떼를 위협하는 자칼을 쏘라고 총을 받은 것이었다. 3km까지 발사된다는 총의 성능을 의심하던 형제는 시험삼아 먼 도로에서 다가오던 여행자 버스에 대고 총을 발사한다. 버스가 정지하고, 아이들은 사색이 되어 달아난다.


두번째 이야기. 미국 샌디에이고에선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라는 이름의 멕시코인 보모가 어린 미국인 아이 둘을 돌보고 있다. 여자아이 데비(엘르 패닝), 남자아이 마이크(나단 겜블). 딱 보기에도 부유하고 유복해보이는 집에 남매와 보모만 있다. 아이들의 아버지로 짐작되는 남자에게 안부전화가 오고, 아이들을 묻고 아울러 비밀을 당부한다. 이들 부부는 지금 모로코 여행에서 사고를 당했다. 아멜리아는 아들의 결혼식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도 고향인 멕시코로 잠시 다녀오는걸 허락받지 못한다. 미국인 아이들이 하룻밤을 혼자 남게 되어서다. 결국 대신 돌봐줄 사람을 구하지 못한 아멜리아는 데리러온 조카 산티아고(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차에 데비와 마이크 두 아이마저 함께 데리고 멕시코로 향한다. 하룻저녁이면 다시 샌디에이고로 돌아올 계획을 갖고서. 국경을 넘으며 뒷좌석의 남자 아이가 말한다. "엄마가 멕시코는 위험하댔는데." (+ 이 영화 <바벨>에서 케이트 블란쳇의 어린 딸 역할이었던 엘르 패닝은 2년 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선 케이트 블랏쳇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다. 흥미롭다. 한번은 딸로, 또 한번은 어릴적 모습으로.)


세번째 이야기. 미국에서 온 리차드(브래드 피트)와 수잔(케이트 블란쳇)은 지금 모로코 여행 중이지만 이 부부 사이엔 뭔가 불편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 서로를 아직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있는듯 하다. 하지만 여행자 버스안에서 그녀가 그의 손을 먼저 잡았을때, 창문으로 갑작스럽게 총알이 날아들었고 수잔이 어깨에 총상을 당한다. 병원조차 없는 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리차드는 급한대로 인근 유목민 마을에 들어가지만 이 미국인 부부에게 그곳은 낙후되고, 부족하고, 어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싶은 공간일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인 관광객 버스는 이들 부부를 남겨두고 떠나고, 리차드는 아내 수잔이 치료를 어서 받아야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간절하게 미국대사관이 보낸 헬기를 기다린다.


네번째 이야기. 일본의 여고생 배구선수 치에코(키쿠치 린코)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장애아다. 그녀는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야스지로(야쿠쇼 코지)와 둘이 살지만 이 부녀의 심적 간격은 넓고 깊다. 치에코는 섹스경험이 없는 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겪고 있으며,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일탈과 반항으로 해소하려한다. 하지만 여성적으로 매력적이지 못한 치에코는 번번히 만나는 남자들을 유혹하는데 실패하고, 급기야 아버지가 모로코에 두고 온 총에 관련한 조사를 위해 찾아왔던 젊은 형사를 집안에 불러들여 유혹하려한다.







각 네 개의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순서대로 네 번째 이야기를 보여주고 다시 첫 번째 이야기로 돌아오는 식을 여섯 번 반복하며 서사한다. 그리고 관객 공개되는 시간차가 있긴하지만 각 이야기들이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지는 금세 알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모로코 소년이 장난삼아 쏜 총알이 세 번째 이야기의 수잔 부인을 맞췄고, 그로인해 리차드와 수잔 부부가 모로코에 발이 묶인 며칠사이, 그들의 아이들인 데비와 마이크는 두 번째 이야기의 아멜리아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었다. 그럼 네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거의 후반부에 등장하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중반부터 알 수 있지만) 영화의 시작, 모로코인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선물한 그 총은 치에코의 아버지 야스지로가 모로코에 사냥 여행을 갔다가 친절한 모로코인 가이드에게 선물로 주고 온 것이었다. 일본인에게 총을 선물 받은 가이드가 유세프의 아버지에게 총을 팔았고, 그 총이 결국 수잔을 쏘았으며, 수잔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늦어지자 어쩔 수 없이 멕시코 국경을 넘었다. 네 가지 이야기는 이런 우연과 우연으로만 연결되어있을 뿐, 각 캐릭터들이 영화 도중 서로 만나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럼 이런 칼로 자른 듯 한 시퀀스의 구분과 흐름으로,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함일까. 작은 우연이 지구 반대편에서 비극을 부르는 ‘나비효과’적 이야기? 아니면 사소한 우연이 도미노가 무너지듯 다음 에피소드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파장일까? 나는 하고많은 국가들 중 하필 선택된 저 4개의 국가들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순서대로 1번은 모로코, 2번은 멕시코, 3번은 미국, 4번은 일본이라고 부르자. 1,2번과 3,4번을 묶어 본다면 영화는 4등분이 아니라 2등분 될 수 있다. 모로코와 멕시코를 묶고, 미국와 일본을 묶어보는 것이다. 그럼 전자는 제3세계국가, 후자는 제1세계 국가로 분류될 수 있다. 국제정치학적 의미로 분류해도 마찬가지다. 반공국가인 미국과 일본, 그리고 개발도상국인 모로코와 멕시코. 동시에 이 그룹의 나눔은 많은 것을 구분한다.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국민들의 경계규모, 국가간 빈부격차, 사회 복지수준 등. 제3세계 국가군(모로코와 멕시코)과 제1세계 국가군(미국과 일본)은 경계를 이룬다. 실제로 영화를 보다보면, 모로코의 모습과 멕시코의 모습을 소리를 소거한 채 음악만을 배경으로 풍경을 비추는 장면들이 제법 있는데, 가히 아름다운 모습들이 아니다. 데비와 마이크, 미국인 두 아이가 산티아고의 차 뒷좌석에 타 처음 와보는 멕시코를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내다보는 장면에서 이런 경향이 드러난다. 미국과 대조적인 지저분한 거리풍경, 비위생적인 음식들, 대낮 거리의 창녀들. 나는 감독이 이런 장면들을 사용해서 고의적으로 두 세계의 경계선을 그어 놓으려했다고 믿는다.







자 그럼 이 두 개의 군이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흘러가는지가 더욱 흥미로워진다. 두 개의 군은 서로 정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제3세계군의 시작은 행복하고 제1세계군의 시작은 불행하다. 유세프와 형, 그리고 그의 가족은 빈곤해보이지만 얼굴에 불행이 그늘져있지 않다. 형제는 티격대긴 하지만 양을 치는 한가로운 일상을 보낸다. 아멜리아도 마찬가지다. 미국인 부부의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16년간 키우며 미국에 터전을 일구었고, 멕시코 고향 동네에선 아들이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며 마을사람들의 축제는 흥겹다. 하지만 미국인 부부 리차드와 수잔은 모로코 여행자체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 후반에 나오지만 이 부부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와 깊은 상처는 아이들까지 딸린 부부관계를 위협할 정도다. 그들의 여행 첫 장면은 절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치에코와 야스지로, 이 일본인 모녀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없는 이 결손 가정은 반항적인 10대 딸과 그런 딸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아버지로 구성되어있다. 고로, 제3세계군은 물질적으로 빈곤하지만 정신적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제1세계군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두 가정은 직관적으로 봐도 부유한 집에서 살고 있다) 정신적으로 불행하다. 







그러나 영화가 흘러가면서 이 두 세계는 자리를 맞바꾼다. 유세프 형제는 미국인 관광객을 죽였다는 혐의로 경찰에게 쫒기고 결국 비극에 도달한다. 어린아이가 실수로 쏜 총알 하나를 결국 형의 목숨으로 갚아야했다. 모로코 경찰들은 ‘미국인’ 관광객이 ‘테러리스트도 없는’ 모로코에서 총격당했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용의자들을 몰아간다. 아멜리아도 행복에서 불행으로 자리옮김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행복한 아들의 결혼식 축제를 즐기고, 무사히 샌디에이고로 돌아가려는 도중, 술에 취한 조카 산티아고가 미국 국경에서 미국 경찰과 마찰을 빗고 홧김에 사막으로 차를 몰아 도주를 감행한다. 아멜리아는 자식처럼 미국인 어린 아이들을 사막 한가운데에서 구하려 애쓰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불법입국자라는 죄목과, 경찰의 수갑과, 국외추방이다. 두 제3세계군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경찰들은 강압적이고 권위적이다. 이들은 모로코인과 멕시코인들 보다 미국인을 우선시두고, 그들에 비해 멸시, 무시하는 인상이다. 하지만 제1세계군에 등장하는 공권력은 다르다. 미국인 리차드는 수술이 시급한 수잔의 목숨을 구하기위해 어서 헬기를 보내라고 미국대사관에 소리치고 무능한 현지인들을 윽박지른다. 야스지로에게 총기에 대해 묻기 위해 찾아온 일본 경찰의 태도는 총기를 판 모로코인을 구타하며 심문하는 모로코 경찰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리차드와 수잔은 오히려 총을 맞고 모로코의 외딴 마을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그런 극한의 상황에 처하고서야 비로소 서로에 대한 용서와 이해를 얻는다. 무사히 헬기를 타고 마을을 떠나는 그들은 제3세계에서 다시 그들이 속한 제1세계로 돌아옴에 안도하는 인상이다. 일본인 모녀도 마찬가지다. 오해와 불신으로 가득한 그 둘은 포옹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최종적으로, 영화 <바벨>에서 제1세계는 행복하게 끝나지만, 제3세계는 불행하게 끝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원래 물질적으로도 풍족한 제1세계는 관계를 회복하고 행복마저 얻지만, 빈곤하게 살던 제3세계는 소통을 단절 당하고 비극까지 맞이한다. 너무하지 않은가? 나는 이 반전도 없이 흐르는, 일방적이고도 너무 뚜렷해서 거스를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영화의 전개가 불편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편한 점은, 꼭 잘사는 제1세계라고 해서 벌 받듯이 비극으로 끝나야하고, 못사는 제3세계라고해서 보상받듯 해피엔딩을 가져가야 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영화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격차와 간극을 비교시키면서 인류의 불평등한 행복을 지적하는 것일까. 이 점이 나를 불쾌하게,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뭔가 석연치않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마지막 스크립트가 엔딩 크레딧 직전에서, ‘어둠 속의 밝은 희망’을 말하려는 듯 하지만 결국 제3세계는 구원받지 못한다. 






이 영화에선 총 여섯 개의 언어가 등장한다. 다국적 로케이션에 당연히 촬영도 각기 다른 국가와 문화권에서 찍어야했고, 그러다보니 스탭들끼리도 다른 국적,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심지어 출연하는 몇몇 배우들은 영화가 끝까지 완성될 때까지 서로 만나본적조차 없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예가 '창세기'에 있었다. 성서에 등장하는 바빌로니아의 바벨탑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제목은 <바벨>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각기 다른 문화와 세계가 겪는 소통과 언어의 단절, 그리고 그 오랜 단절이 야기한 문명의 상하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가 아닐는지. 세계가 영어를 널리 쓰는 이유는 미국이 강대국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어서이고, 중국어가 떠오른다는 소리는 곧 중국이라는 나라가 부상한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같은 인간이 주고받는 말이지만 언어의 차이는 거의 모든 것의 차이를 촉발한다. 수잔의 피격 사건은 세계적인 관심을 끌며 지구 반대편의 일본에까지 그녀의 다행스러운 소식이 전해지지만, 같은 시간 모로코 어느 돌산에서 경찰의 총에 죽은 유세프의 형을 세상은 모른다. 리차드는 다른 언어로 둘러싸인 모로코에서 아내 수잔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지만 동시에 답답한 의사소통에 한계를 느끼고, 함께 온 미국인 관광객들은 모로코 현지인들을 마치 다른 종족을 쳐다보듯 경계하며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한다. 리차드 부부의 어린 아이들은 평생 가볼까말까한 모로코에 대한 어떤 감정을 가지며 자라고 교육될 것이다. 유세프는 비록 실수이긴 했지만 형을 잃고 어쩌면 남은 그의 인생마저 잃고 말 것이다. 소통의 단절은 이렇게 다음 세대로 전이되고 반복된다. 이 영화에서 제3과 제1, 두 세계군의 사람들은 끝내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아멜리아가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멕시코를 가야한다지만, 제1세계인 미국의 어린 자녀들의 우선시를 강요받는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려할 때 좀 더 즐기다가라는 아들 부부의 말에, “마이크가 내일 축구 연습 있어서 오늘 밤에 올라가야한다”는 아멜리아의 대사는 왠지 안타깝게 들린다.





이 영화 <바벨>에서 유일하게 교감을 나눌뻔한 두 세계군은, 다친 수잔을 마을로 데리고 와 끝까지 곁에서 통역과 간호를 도와주는 한 여행가이드와 리차드의 관계이다. 수잔의 곁을 자신과 같이 떠나지않고 지켜준 이 모로코인 가이드와 리차드의 관계에서 두 세계가 그래도 교감을 이루는가 싶은 찰나, 감독은 헬기를 타고 떠나는 리차드가 마지막 작별 포옹을 하고나서 생각났다는 듯이 지갑에서 돈을 잔뜩 건네주는 장면에서 다시 둘의 손을 끊어버린다. 가이드는 두 손 저으며 그 돈을 거절하고 리차드는 몇 번 권하다가 인사로 대신하고는 헬기에 타버린다. 나는 이 둘의 마지막 장면마저 이렇게 만든 감독이 야속했다. 이 장면 때문에, 리차드는 끝까지 이 가이드를 돈으로 고용한 사람이 되었고, 인본주의는 실종됬다. 그 모로코인 가이드는 수잔을 그저 자신과 같은 한 인간으로서, 그것도 도움이 필요한 인간으로서 성심을 다해 도왔던 것이었을텐데 말이다. 참으로 먹먹한 영화다.













덧글

  • 2013/01/27 05:4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1/28 03:3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1/28 04:1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4/07/08 12:08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비 2014/07/12 13:13 #

    감사합니다 :) 치에코가 그렇게 말한 것을, 전 (영화를 본지 꽤 지났지만) 형사에게 고의적으로 숨겼다고 생각했어요. 농아이기때문에 잘못 알고있었다-고도 생각했었는데요. 영화를 본지 너무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안나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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