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아이 러브 유, New York, I Love You, 2009 Flims








이 영화가 맨 처음 세상에 공개된 것은 2008년 캐나다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였다. 그당시엔 두 개의 에피소드가 더해져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케빈 베이컨을 캐스팅해 찍었던 스칼렛 요한슨의 감독 데뷔작이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극장판에선 제외된 두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원래는 전부 13개의 에피소드였지만 극장 개봉시 2개가 삭제되어 모두 11개의 에피소드로 꾸려진 이 옴니버스 영화 <뉴욕, 아이 러브 유>는 <사랑해, 파리>의 공동제작자였던 엠마누엘 벤비히의 또 다른 프로젝트다. <사랑해, 파리>로 파리를 배경으로 유수의 감독들을 불러다 단편 영화들을 받아 모아 만든 영화를 선보였다면 이번엔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서 다시금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자 그럼, 열한개의 에피소드들을 따라가 보자.









첫 번째 에피소드는 내가 가장 자주 ‘즐겨보는’ 에피소드다. 옴니버스의 유쾌한 시작. 중국 출신의 감독 강문이 연출한 이 이야기에는 2008년 영화 <점퍼>의 남녀 주인공 커플이었던 헤이든 크리스텐센과 레이첼 빌슨을 다시금 만나게 해준다. 앤디 가르시아가 으레 그 위엄 넘치는 중후함으로 소매치기 청년 벤(헤이든 크리스텐센)을 농락하는 모습은 한 장소안에서 벌어진 짧은 영상이지만 한 편의 액션영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 정확히 말하면 도둑과 불륜남이지만 –의 팽팽한 신경전이 거침없는 템포로 그려져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인도의 여류 감독 미라 네이어의 작품. 최근 개봉작 <라이프 오브 파이>에도 출연한 이르판 칸이 다이아몬드 가게 주인으로, 그런 그에게 결혼반지를 흥정하러 온 고객이자 새신부 리프카는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했다. 뉴욕이 배경이 되는 이 옴니버스 영화에 각기 다른 두 문화가 마주하는 순간이 전혀 뉴욕스럽지 않은 분위기를 내지만 그 또한 다민족 다문화가 섞여있는 뉴욕의 한 단면이 아닐까. 삭발한 나탈리 포트만의 모습은 <브이 포 벤데타>에서도 봤지만 신비로운 아름다움까지 뿜어낸다. 주로 종교적 이유에 기반한, 소수문화와 소수민족의 비주류 풍습들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응당 힘들지만, 두 사람이 아무말 없이 껴안는 순간에는 이해 그 이상의 교감이 있다.







귀여운 세 번째 에피소드는 일본 감독 이와이 슌지의 필름. <러브 레터>등으로 순수한 로맨티스트스러운 모습을 보여온 그가 찍은 이 단편은, 얼굴도 모른채 전화와 SNS로만 소통하던 젊은 남녀의 아기자기한 첫 만남과 시작이다. 영상 음악을 작업하는 데이빗(올랜도 블룸)은 직업상의 이유로 그를 돕고 응원하는 카미유(크리스티나 리치)라는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그는 그의 꼬임에도 만나주기는커녕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죄와 벌>같은 두꺼운 책을 읽게 권하고 자꾸 포기하려고만 하는 데이빗을 결국 직접적으로 돕기 위해 마침내 그의 앞에 선 카미유. 아역시절 <아담스 패밀리>나 <슬리피 할로우>부터, <몬스터>, <페넬로페>등에서 다양한 변신을 보여주었던 크리스티나 리치는 아마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한번의 씬으로 역대급 귀여움을 보여준게 아닐지 개인적인 사견을 덧붙여본다. 또한 이와이 슌지는 일본 감독답게, 올랜도 블룸의 방 벽에 붙여있는 데스노트 포스터부터, 재패니메이션을 군데군데 심어놓은 센스를 보였다. 아울러 이 영화가 2008년에 촬영되었음을 감안했을 때, 올랜드 블룸이 사용하는 아이폰은 꽤나 신선하게 보인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두 개로 잘려져, 영화 전체의 배치 안에서 따로 떨어져 있다. 프랑스 배우이자, 샬롯 갱스부르의 남편이기도 한 이반 아탈이 연출한 이 작품은 뉴욕의 밤 거리에서 담뱃불을 주고받는 두 남녀쌍의 각각의 대화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 조각은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채 눈앞의 여자와 어떻게든 하룻밤을 보내보려 꼬시는 에단 호크와 그런 그에게 최후의 한방을 먹이고 유유히 사라지는 매기 큐, <비포 선라이즈>에서, 비엔나에선 그리도 낭만적으로 말하던 에단 호크의 모습이 겹쳐진다면 조금은 서글플 만큼, 구차한 화법을 구사하며 여자를 꼬셔보려 하지만 그래도 왠지 밉지는 않다. 두 번째 조각 역시 길거리 담뱃불 교환으로 시작된다. 업무상의 전화에 치어있는 중년 남자 크리스 쿠퍼와, 그런 그에게 담뱃불을 빌미로 유혹적 접근을 시도하는 여자 로빈 라이트 펜. 이 권태로운 부부의 일탈적 놀이는 <사랑해, 파리>에서도 왠지 본 듯한 이야기지만, 끝까지 보다보면 좀 더 담담하고 어딘가 처연하기까지 하다.







영화보단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더 유명한 브렛 레트너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전형적인 10대 청춘 로맨틱 코미디 같은 분위기지만 그래서인지 더 귀엽다. <스타 트렉: 더 비기닝>과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에서도 볼 수 있는 안톤 엘친이 졸업파티를 앞두고 파트너가 없는 어리숙한 소년역을, 올리비아 썰비가 반전있는(?) 소녀역을 맡았다. 그저 동화같은 소소한 이야기. 제임스 칸이 소녀의 아버지 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이 영화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앤디 가르시아와, 과거 저 유명한 <대부>시리즈에서 서로 아버지(소니 코르네오레)와 아들(빈센트)역이었다.








알렌 휴즈 감독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는 지난 하룻밤을 잊지 못하는, 이성적으로는 서로에게 멀어지려고 애쓰지만 마음은,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다다가는 젊은 남녀의 독백을 번갈아가며 들려준다. 이야기보단 서로의 나래이션에 의한 심리 전개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단편이다. 거스 역의 남자는 브래들리 쿠퍼. 리디아 역의 여자는 드리아 드 마테오이다.








가장 환상적인 분위기의 에피소드는 일곱 번째이다. 영국의 감독이자 각본가인 안소니 밍겔라의 유작과도 같은 이 에피소드는, 안소니가 기획 중 자신이 이 단편을 마무리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그가 죽기 전 마지막 대화에서 인도 출신의 감독 세자르 카푸르에게 맡아줄 것을 부탁했고, 그가 2008년 사망한 이후 세자르가 이어받아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안소니 밍겔라에 대한 추모는 이 영화 엔딩 크레딧 가장 처음에 볼 수 있다.) 트랜스포머의 윗위키, 샤이아 라보프가 아주 의외의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였고, 이 젊은 배우의 변신은 줄리 크리스티(이자벨 역)와 존 허트(호텔지배인 벨홉 역)라는 노련한 두 명배우와 멋진 앙상블을 이뤄냈다. 전성기가 지나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오페라 여가수 이자벨은 뉴욕의 어느 호텔로 돌아와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장애가 있는 벨보이로부터 알 수 없는 따듯한 감정을 느끼고 오히려 그를 걱정해주고 그녀는 그로부터 배려 받고 위로받는다. 자살하려는 그녀를 대신해서 죽은듯한 소년은 마치 유령처럼 사라졌지만 오래전 자신이 그 호텔에 왔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늙은 지배인의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자신이 좋아하던 꽃을 구해다 놓아준 그 소년의 정체가 마치 이 호텔이라는 장소가 아니었을지. 세상 누구로부터 이젠 기억되지 못함을 슬퍼했지만 정작 그런 그녀를 기억해준 호텔이 그녀를 위로하고 자살을 막아준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난 이 에피소드에 대한 해석에는 여전히 확신과 자신이 없다. 국내 개봉 당시 이 영화의 홍보지에는 나이 차이를 초월한 사랑이라고만 적혀있었다고 한다...)







여덟 번째 에피소드는 배우 나탈리 포트만의 감독 데뷔작이다. 그녀는 연출뿐만 아니라 이 단편의 각본까지도 맡았다. 메시지는 의외로 명료한데, 흑인계인 남자가 이혼하고 따로 사는 아내가 없는 낮에만 어린 딸을 데리고 놀다가 다시 저녁이 되면 딸을 아내에게 보내는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그런 그를 향한 주변의 시선은 그가 아버지가 아니라, 남성 보모라는 편견. 그는 불쾌해하면서도 엄마가 없는 자신의 딸을 걱정한다. 에피소드 마지막에 우리에게 알려주는 아버지의 직업은 발레 댄서. 여성적 활동이라는 편견이 지배적인 발레를 하는 남자였던 것이다. 이것으로 이 에피소드는 이 사회가 가진 통념을 은근하게 조소한다. 놀랍게도, 이 아버지를 연기한 남자는 실제 남성 발레댄서 카를로스 아코스타다. 쿠바 출신의 그는 인종적 편견을 깨고 현재도 왕성히 활동 중인 실제 발레리노계의 톱스타라고 한다.









아홉 번째 에피소드는 <사랑해, 파리>에서 크리스토퍼 도일이 연출한 ‘차이나타운’편에서 사용되었던 음악을 그대로 가져와 뉴욕 차이나타운에서 다시 재현한다. 유독 전지현 닮게 나온 서기가, 자신을 모델로 꼭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늙은 화가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알 수 없는 이끌림에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쇠약했던 그는 이미 죽고 없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다 눈동자만을 완성시키지 못한 화가의 그림을 가져와 자신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서 눈 부분만 잘라내어 그림에 붙여주는 것으로 화가의 제안을 이루어준다. 마치 화룡점정을 연상케 하는 이 이야기는 파티 아킨이라는 독일 감독이 맡아, 엇갈린 감정의 아쉬운 매듭을, 둘이 공유하는 예술의 완성이라는 매개로 대신 보여주었다.








열 번째 이야기는 미국의 조슈아 마스턴이 연출한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투닥거리고 티격대지만 그 저변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끈끈한 사랑이 깔려있어, 보면서도 내내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 에피소드다. 거친 말도 서슴치 않지만 그 또한 그들만의 정이 아니었던지. 바다가 보이는 해변에서 말없이 할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무런 대사도 없지만 그것만으로 이 단편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해버린다. 하지만 역시 극의 분위기를 잃지 않으려는 듯 그들은 금세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어떤 장황한 수식이나 설명 없이도 오랜 부부의 사랑을 정작 사랑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도 표현해냈다.






마지막 에피소드 겸, 영화 중간중간 뉴욕을 자신의 캠코더에 담는 여자의 이야기는 랜들 발스마이어 감독의 연출 하에 구성되었다. 에밀리 오하나는 영화 속 뉴욕의 모습들을 마지막 엔딩 시퀀스에서 총정리하듯 상영한다. 그는 극중 중간중간에 서기와 에단 호크와도 스쳐지나가는 등 어쩌면 이 영화의 화자 역을 맡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낭만의 도시 파리가 아닌 이번엔 뉴욕. 조금은 몽상적이고 예술적 향마저 풍겼던 <사랑해, 파리>에서의 에피소드들보다, 이 아메리카식(을 표방한) 에피소드들은 좀 더 로맨틱하진 않아도 더 현실적이고 도시적이다. 파리의 부정적인 사회면까지 비췄던 <사랑해, 파리> 보다 <뉴욕, 아이 러브 유>의 이야기들은 조금 더 세련된 편집을 가미해, 완전히 각개의 에피소드들의 나열이었던 전자보다 더 유기적으로 연결해놓아 보는 이들의 재미를 조금 더 배려한 모습이다. 예를들면 에밀리 오하나가 연기한 ‘조’라는 여성 캐릭터는 뉴욕으로 온 비디오 촬영자. 이 이야기들 모두에서 등장하진 않지만 설정상 이 옴니버스 전체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모습을 한 채 이들 모두의 영상을 자신의 캠코더에 담았다. (IMDb에 따르면, 에밀리 오하나는 <상하이, 아이 러브 유>의 캐스팅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그의 역은 여기서도 역시 ‘Main Recurrent Character’라고 표기된 걸로 보아 차기작에서도 비슷한 역을 계속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몇몇 에피소드들의 각각의 주인공들은 짧게나마 서로가 서로를 스쳐가거나 마주친다. 에단 호크와 에피소드를 이뤘던 매기 큐가 다른 에피소드의 크리스 쿠퍼와 잠깐 마주친다거나,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마저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헤이든 크리스텐슨과 다른 에피소드의 브래들리 쿠퍼가 함께 택시에 타는 유머스러운 상황으로 꾸며놓은 식으로 말이다. 영화는 도시의 명소들이 스토리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했던 <사랑해, 파리>와는 달리 장소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고 보다 더 이야기에 치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옴니버스 영화는 이렇게 작은 단편들을 구경하는 소소한 재미를 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꼭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늘 수위에 꼽는 영화 <뉴욕, 아이 러브 유>다.



+
이 영화 <뉴욕, 아이 러브 유>의 총 상영시간은 1시간 43분인데, 143이라는 숫자는 I LOVE YOU를 뜻하는 채팅 은어(숫자)라고.















덧글

  • 2013/01/23 11:54 # 답글

    언제 본 건지 잊었지만, 생각이 났네요. 이 영화 참 좋았어요. 저는 여러 에피소드들 중에서 노부부 이야기가 참 좋았어요. 일부러 예쁘게 꾸미지도 않았고 노쇠함은 걸음걸이마다 풍겨오는데도, 투닥투닥하는 그 대화가 어찌나 정답던지. 저게 평생을 함께 한 사람이 누리는 사랑이고 축복이구나 싶었었거든요. 원나잇스탠드의 인연을 찾아헤매는 에피소드도 좋았고. 나름 해피엔딩이었던 것 같고. ^^ 유난히 소녀처럼 나왔던 서기의 민낯이 떠오르는 에피소드도 흥미로웠고. 아, 다시 찾아봐야 할 듯...
  • 레비 2013/01/24 03:02 #

    아 노부부 에피소드가 제일 좋으셨군요 ! +_+ 다정하기보단 오히려 투닥거리는 대화가 참 매력적인 이야기죠 ㅎㅎ 계단을 올라갈때도, 길을 건널때도 그리 티격대지만 함께 바다를 보는 그 짧은 순간은 아무 대사없이 그 순간 '진짜 모습'을 보여주다가 또 다시 그 분위기는 깨지고 걸어가죠 ㅎㅎ

    브래들리 쿠퍼가 나온 그 에피소드도 정작 둘이 함께 만나는 엔딩보단 그 길까지 닿기위해 회상하고 추억하는 독백들이 더 좋았어요 :) 정말 하나하나의 에피소드가 버릴게 없는 옴니버스죠!

    +

    닥터엘님께서 덧글 달아주셔서 놀랬어요. 저 사실, 한번도 엘님의 이글루에 덧글단 적은 없지만, 제가 이 이글루스에서 블로깅을 시작하게된 일종의 계기(?)나 동기가 된 블로거셨거든요. 엘님의 모든 포스팅들이 다 제 이야기처럼 읽힐만큼 제 연애사가 다난다사하진 않지만.. 그냥 엘님께서 그 사연들에 답장하는 방식, 내용이 정보를 넘어서, 좋은 지혜가 되었답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정작 제가 블로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나서 깜박 잊고있었기 때문이에요 ^^;;) 아무튼 깜짝놀랐고, 반갑습니다. 닥터엘님 :)
  • 2013/01/24 15:30 # 답글

    ^ㅅ^ 우연히 들어왔다가 글의 감성주파수가 맞아서 링크 하였지요. 저도 레비님 답글 읽으니까 막막 반갑네요. ^ㅁ^/////
  • 레비 2013/01/24 15:46 #

    저도 덕분에 다시 몇년전처럼 엘님의 이글루를 구독할 수 있게되었어요 :) ㅎㅎ 감사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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