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2008 Flims



몇년전, 신촌 버티고 타워에서 진행중인 전시, 아니 체험 프로그램인 "어둠속의 대화"에 가본 경험이 있다. 대여섯명 정도의 임의의 그룹으로 안내자의 진행을 따라 한시간여가량 눈을 떠도 보이지않는 어둠 속에서 시각장애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당시 여자친구의 간절한 요구로 반쯤 시큰둥하게 끌려갔었던 곳이있지만, 지금은 내게 잊지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둠에 삼켜지다라는 표현을 직접 느껴보았고, 시각의 부재가 단순히 불편함이나 혹은 감각 일부의 장애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결핍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미 유명한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과정, 혹은 그렇게 제작된 영화들은 대중의 흥미와 관심이 미리 검증된 탄탄한 각본이라는 일종의 보장을 제공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이 독자들에게 선사했던 상상력이라는 부분을 스스로 제한시킨만큼 그것을 대신할만한 신선한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원작을 따라가지 못한 불명예스러운 필름으로 남을 위험 부담도 함께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 소설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점은 그 부담감을 가중시켰을지언정 덜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포르투갈의 세계적인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95년도 작품 <눈먼 자들의 도시>를 브라질 출신의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2008년 내 놓은 이 동명의 영화는 미국, 캐나다, 일본의 합작으로 그렇게 제작되었다. 하지만 결과물은 기대 이하였다. 나는 예전 어딘가에서 이 영화를 말하면서 소설에 의해 집어삼켜져 버렸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소설을 영화로 바꾼 사례들은 저 유명한 <반지의 제왕>시리즈나 <해리포터>시리즈부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공원>, 스티븐 킹의 <그린 마일>,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셀 수도 없이 많다. 국내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었던 일본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와 <상실의 시대> 등도 모두 영화화 되었다. 이는 아마도 문학이 영화에게 매력적인 각본이 되어주기 때문인듯 싶다.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의 이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대단히 단조로웠고 별다른 변주를 찾을 수 없었다.







소설은 관념적이고 영화는 시각적이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감독들, 혹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보통 선택의 기로에 선다. 원작을 최대한 살리고 따르되 텍스트로는 맛볼 수 없었던 시각적인, 소설은 보여줄 수 없던 영화만이 할 수 있는 특징과 장기들을 구현해보이는 것이 그 첫 번째 길이다. 그러나 텍스트로만 구성된 소설을 영화적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소실되는 관념성들을, 시각적으로 바꾸며 최대한 유지하고 보존하기란 분명 힘든 일이다. 두 번째 길은 원작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은 채 감독의 역량을 한껏 발휘하여 원전을 신선하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도 원작과 전혀 다른, 혹은 어설프게 비슷한 아류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여전히 위험 부담이 존재한다. 내가 조심스레 추측해보자면 메이렐레스 감독은 아마 첫번째 길을 따르려 했던것 처럼 보인다. 아니, 원작 자체가 난해하고 완성도가 높으므로 그런 선택을 불가피하게 따라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마저도 뜻대로 되지 못함에 있다. 소설이 담고있는 당위성이나 연계고리들을 해치지않고 그대로 옮기고자 노력하면서 영화는, 영화가 영화로서 소설보다 나은 위치에서 취해야했을 장점과 승부수를 스스로 포기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소설과 비교하면서 이 영화를 폄하하는 것은 이쯤으로 해두자. 나는 지금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니까.









이 묵시록적인 이야기는 그 원인도 설명도 충분히 던져주지 않은 채 일단 시작하고 본다. 소설에는 구체적이지 않던 '처음으로 눈이 머는 자'가 일본인으로 그려진 것은 이 영화의 제작에 일본도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어느날 한 남자가 눈을 뜨고 있지만 모든 것이 희게 보이는 정체불명의 실명증세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병원체도,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백색실명은 전염병이 번지듯 빠르게 퍼져나가고 어떠한 대비책도 없이 사람들은, 전 세계는 속수무책으로 한명한명 시야가 하얗게 변해갈 뿐이다. 이 영화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논리로 파악하려 애쓸 필요없이 어떤 상징이나 은유로 보는것이 보는 우리들에게도 속 편한 이야기이다. 누군가는 이 '현상'에 정치적 우화를 담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는 종교적 메세지를 읽으려한다. 해석의 문제다.


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제시할 수 있는 물음은 크게 두 가지이다. "왜 모두 눈이 멀었는가"와 "왜 한 명만은 눈이 멀지 않았는가"이다. 과학적인 설명, 논리적인 설명은 앞서 언급했듯 일찌감치 포기하는게 좋다. 다만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에 새로 첨가된 대사들이나 설정들이 있다. 보통은 이런 차이점이, 소설을 각색하며 만들어진 영화가 자신의 메세지에 좀 더 힘을 보태기 위해 넣은 요소일 확률이 높고, 바로 이것이 해석의 열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마크 러팔로)는 첫번째로 눈이 먼 남자를 진찰한 그날 저녁, 아내(줄리안 무어)에게 자신의 짐작을 말하면서 '친숙한 것들을 인지하는 능력이 갑자기 결여되 보이지않는 것처럼 느끼는 병', 즉 실인증(agnosia)이 아닐까-하고 말한다. 그때 의사의 아내, 세상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않게 될 이 여자는 그 단어가 불가지론(agnosticism)과 비슷한 어원을 가진 게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내 살짝 핀트가 어긋난 이 둘의 문답은 금새 끝나고 다음 씬으로 넘어간다.


불가지론이란 신의 본체는 알 수 없다고 주장했던 중세의 신학 사상에서 유래된 철학적 관점으로, 인간이 지적 직관과 이성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를테면 '신의 본질'과 같은)은 인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세상과, 자연과, 그외 초월적인 영역은 비록 무한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능력과 지력은 한계가 있고 유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혹은 인간은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인식할 수 있다는 관점, 사유와 관념의 한계를 넘는 영역에 대해서는 인간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철학자들의 주장이 주로 불가지론들이 가지는 공통분모다.







비록 소설은 이 백색실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진않지만, 이 영화는, 적어도 영화가 이 현상에 대하여 실인증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주인공 의사의 입을 통해 던지고 다시 그것의 어원이 불가지론과 이어짐을 굳이 언급했다면, 이 무차별적 백색실명을 불가지론의 범인류적 확장과 전염으로 본다한들 무리수라는 질타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줄리안 무어,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않을 의사의 아내는 그 단어를 듣고 "이 단어는 '무시'나 '믿음 결핍'과 관련이 있어요"라는 부연설명을 더한다. 영어로 '보다'와 '알다'의 단어는 같이 쓰일만큼 인간에게 보는 행위란 단순히 오감 중 어떤 하나의 영역을 뛰어넘는, 지적 영역과 인식의 확장과 그 한계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즉 시야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시력의 상실뿐만 아니라 보는 행위를 함으로서 가능한 인식과 새로운 정보의 흡수가 두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 믿음의 결핍. 그 믿음의 대상이 자신과 같은 인간이든, 신이든간에. 사실 양쪽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영화에는 눈이 다 함께 멀어버림으로서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동시에 어떠한 구원도 없는 신에 대한 원망을 눈을 가린 신상(神像)들로 대신해 보여주었다. 누가 천으로 신들의 눈을 가려놓았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을 최종적으로 '볼 수' 있는 건 의사의 아내뿐이다.






물론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인간 군상들을 보여줌으로서 인간다움, 인간성에 대한 조명과 일깨움으로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작가가 <눈먼 자들의 도시>의 후속작으로 발표했던 <눈뜬 자들의 도시>의 이야기까지 더불어 고려해본다면, 이것은 무능하고 비인간적인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각성과 자기반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소설이 아닌, 소설을 각색한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이 먼 사람들은 시각의 상실로서 순식간에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처하고 이들은 격리 수용된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을 치료 하거나 실명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그들을 일단 수용소에 밀어 넣고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은 ‘아직은 눈이 보이는’ 사회와,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군인들이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가슴 어딘가를 더욱 불편하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의사로 대표되는 눈이 멀고 집단수용당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이들은 사회의 부당한 억압과 처우에 변변히 항의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다. 심지어 그 내부에서 총을 든 ‘같은 처지의’ 세력이 부정을 저지르고 파렴치한 행위들을 자행해도 눈이 먼 이들은 희망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그 몸으로 그저 참고 버티려한다. 그들의 잃어버린 시야는 시각뿐만 아니라 처지에 제대로 분노하고 저항할 생각조차 가져가버린 것일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볼 수 있다. 한강에 괴물이 출몰해 사람들을 해치지만 국민들을 보호해야할 국가는 괴물을 처치하려고 군대를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을, 그 괴물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는 목적으로 군대를 투입한다. 그리하여 괴물은 한강대교들을 타고 다니며 자유롭게 한강변에서 서식하지만, 오히려 그 괴물을 직접 잡아보려 한강에 숨어들어간 강두(송강호)네 가족들이 정작 군인들에게 쫒기는 신세가 된다. 나는 이 점을, 내가 영화 <괴물>을 보면서 가장 어색하고 이상한 점이라고 느꼈다. (사실 이제는 그것이 봉준호 감독이 <괴물>을 통해 말하고픈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다. 개인 단위의 비극에 무관심하고 안일하게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에 대한 풍자와 비판. 혹은 반대로, 개인의 비극 앞에선 정부에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고 보상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우리 국민성에 대한 반성.) 괴물이 등장한 것은 범국가적 차원에서 다뤄져야할 사건이지만 강두네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은 가족과 개인사로 치부되고 결국 영화는 그들만의 사투로 그려지는 영화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드러나는 정부의 대처와 당한 사람들의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눈이 먼 사람들은 시각을 잃었다는 무력함 앞에 사고하는 힘까지 덩달아 잃어버린 듯 하다.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단연 줄리안 무어의 연기이다. 그녀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한 붉은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면서까지 이 흩뿌연 영화에 녹아들었다. 어딘가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듯 한 눈빛 연기와 그녀의 그 태생적 녹색 눈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시선’을 가진 여주인공에 더 없이 최적의 캐스팅이었다. 의사의 아내 역인 그녀는 유독 혼자 눈이 멀지않은 어떠한 암시도 이유도 없었다. 그냥 혼자 눈이 멀지 않는 행운이 닥쳤을 뿐, 그리고 사실 그 다름이 그녀에게 어떤 무기이자 동시에 발목을 잡는 요소가 되는지를 따라가기만 해도 흥미로운 영화가 되기엔 충분하다. 통제불능을 넘어서 생지옥으로 하루하루 변해가는 수용소에서 눈이 먼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지만 그 모든 것을 보고도 들키지 않게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연하고 인내의 한계까지 다다르기에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한편으로는, 그녀는 모두가 불인식의 상태에서 혼자 지각하고 깨어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지각을 멈춘 사람들로 가득 찬 시스템 안에 함께 갇히지만 그녀가 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혼자 모든 이들의 눈이 되어 현 상황에 대한 저항을 주도하거나, 그들을 일깨워 ‘눈 뜨게’ 해줄 수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과 같이 ‘눈이 멀지 않는’ 군인들의 조롱을 대신 받아주는 일을 했을 뿐이다. 영화는 어쩌면 자각하지 못하는 자들 속에 외로이 무기력함을 체감한 ‘눈 뜬‘ 아내를 데려와, 보지 못하는, 다시 말해 자각하고 깨어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만 무지의 사회와 군중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인간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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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2/11/08 10:3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1/09 05:0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1/10 12:5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1/11 19:2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1/10 15:5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1/11 19:3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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