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하루, My Dear Enemy, 2008 Flims















착잡, 설렘, 쓸쓸, 오묘, 기대, 불편, 긴장, 어색, 익숙함.

재회. 그것도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과의 재회는 이토록 한마디로 정의가 어려운 감정들을 가져온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풋풋하고 설렘가득한 새로운 인연의 만남이 아닌, 이미 한번 사랑을 했고 지금은 식어버린, 혹은 절정을 지나쳐온 미지근해진 관계의 만남은 기억과 얼룩, 그리고 추억이 복잡하게 섞이는 자리가 된다. <비포 선셋>, <냉정과 열정 사이>, <노트북> 등, 재회는 그 시작부터 이미 과거와 사연을 가진 관계라는 점에서 많은 영화들의 좋은 소재가 되어왔다. <여자, 정혜>, <러브 토크>, <아주 특별한 손님>의 감독이자,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을, 정작 대사를 아끼고 배우들의 무언의 연기를 빌어 표현해 온 이윤기 감독은 이 영화 <멋진 하루>에서도 말을 많이 하진 않는다.








어느 토요일 하루. 헤어진 남자에게 빌려주었던 350만원을 받기위해 1년만에 나타난 여자, 희수(전도연). 그리고 1년만의 재회를 반가워하면서도 당장 없는 돈 350만원을 '만들기'위해 그런 희수를 데리고 그 어색하고 불편한 하루를 시작하는 남자, 병운(하정우). 쌀쌀한 계절만큼 매섭고 차가운 희수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날이 잔뜩 서있지만, 넉살좋은 남자 병운은 그런 희수를 데리고 서울의 곳곳을 떠돌며 돈을 빌린다. 그렇게 이 두 남녀의 하루는 그들의 지난 연애사를 되감기도, 헤어져있던 1년간의 시간을 서로 알아가기도하면서 짜증을 불러오기도하고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까지 당한 옛 연인을 오랫만에 다시 보는 희수의 시선은 따듯하긴 커녕 동정심마저 없다. 하지만 "네가 그럼 그렇지." 라는 체념은 이내 그날 하루 돈을 빌리러 다니는 사람들을 곁에서 직접 보고듣게되면서 자신의 옛 연인이었던 남자를 다시 바라보게된다. 결혼도 못하고 일자리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집도 없이 경마장을 전전하는 병운이 못마땅하지만 그런 그에게 신뢰를 보이는 사람들을 희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액수가 적든 크든, 병운을 위해 돈을 선뜻 빌려주는 여자들을 보면서 350만원을 떼인 자신이 누구보다 불쌍한 처지라고 느낀 희수는 차츰 변해간다. 이 영화는 옛 연인이었던 두 남녀의 재회에 다시 로맨스가 꽃피는 영화가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충분히 알고 더 이상 기대조차 하지 못한다고 단정짓던 남자의 모습을 1년뒤의 하루짜리 만남에서 재고하게 되는 과정이다.






병운과 희수의 이 로드무비는 경마장을 시작으로 잠수교를 지나, 옥수동, 청파동, 이태원 골목, 한남동 KFC, 종로 뒷골목, 그리고 저녁의 내방역까지 이어지는 서울에서의 하루이기도 하다.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주상복합 주택, 여성 사업가의 옥상 골프장에서 바이크족 사촌의 집. 그들의 동선에는 잔잔한 영화 분위기와 더불어 구석구석 다양한 얼굴의 서울 풍경이 놓인다. 하루를 함께하며 병운에 대한 무조건적인 악감정에 혼란을 겪는 희수의 변화는 그래서 이 영화 <멋진 하루>의 주된 감정선이다. 처음에는 자는 사이라서 저리도 쉽게 돈을 빌려주겠거니 했던 희수의 편견은 찾아가는 여자들마다 병운에게 믿음을 보내고 그가 어떤 남자인지 다시 보게끔 희수에게 말없이 채근한다. 말쑥하고 멀쩡해보이는 젊은 신혼부부의 진짜 모습을 직접 보고, 어렵지만 꿋꿋하게 살고있는 병운의 동창 이혼녀, 정학 당해 병운이 데리러간 여학생 등이 말하는 그의 숨겨진 면들은 희수를 흔든다. 사촌들앞에서 모욕을 당해도 허허웃고 넘기는 병운에게 화가 나는건 희수 자신이다. 스페인에 막걸리 장사를 하겠다는 허황되보이는 꿈을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하고, 꿈속에서는 표도르에게 위로받는 남자. 이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온 듯한 희수에게 병운은 여전히 답답하고 한심해보이는 남자일지언정 이젠 더 이상 미워할 수 없는 'Dear Enemy'가 된다.





전도연과 하정우. 두 배우의 연기는 연기라고 부르기 의심스러울만큼 너무나 자연스럽다. 전도연씨는 화낼때 실제로도 정말 그렇게 짜증낼 것만 같고, 하정우씨는 만나보면 정말로 그렇게 능청스러울 것만 같다. 영화의 둘의 연기교감은 그래서 마치 실제로 알고지내던 두 남녀의 일상 같다. 사람들은 이 영화속 하정우의 연기, 그의 넉살좋고 유머러스한 캐릭터에 주로 주목하지만 나는 전도연의 연기도 단순히 짜증만내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진한 화장 뒤에서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가끔 병운의 행동에 허탈하게, 혹은 여전히 벽을 쌓은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어이없어하며 웃는 장면들. 그리고 병운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며 조금씩 흔들리는 내면을 최대한 병운에게 들키지않으려 애쓰는 듯한 연기는 너무 좋았다. 아 나는 왜 이 영화를 세번씩 보고도 세번 모두 희수의 입장에 몰입하여 병운를 매번 볼 때마다 때려주고 싶은걸까. 이 영화를 보던 내게 동생이 다가와선 "요즘 저런 능청스러운 남자가 인기야." 라고 하자 "여자에게 인기있는게 저런 능구렁이같은 남자라면 난 그냥 혼자 살란다." 라고 답했다. 확실히 매력있어 보이긴 하는데 저렇게 팔랑팔랑 가벼운 캐릭터가 되긴 싫구나.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5분, 내방역에서의 둘의 헤어짐의 시퀀스를 가장 좋아한다. 희수의 자동차가 지하철 역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이젠 병운이 내려야할 타이밍까지, 둘 다 조금의 미련이 있으나 없는척 인사하고 마치 내일 다시 볼 사람인듯양 헤어지는 장면의 표현들이 크게 와닿았다. "우리 다시 볼 수 있을까?" 는 그 둘 사이에 없다. 사실 채무자와 채권자로 만나 하루종일 돈을 빌리고, 받아내려고 둘의 동행은 아름다웠다고 하기에도, 아름다울 수도 없는 하루였다. 그렇지만 병운을 내려주고 가던 희수의 자동차가 유턴을 할때는, 설마 그럴 수 없음을 알고도 나도 모르게 설레였던게 사실이다. 시식코너에서 배를 채우는 병운을 멀리서 보고는 다시 출발하는 전도연의 1분짜리 마지막 표정변화에는 아쉬움이나 후회가 아닌, 안도감과 만족스러움이 보였다. 내가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지금 이렇게 내 생각만큼 나쁘고 한심한 놈은 아니었다는 안심일까, 아니면 이미 헤어진 남자지만 하루를 함께해 본 그의 꿈과 미래에 보내는 응원이자 안도감일까. 영화 내내 시니컬했던 전도연의 미소에는 흡족함이 베어난다.







헤어졌던 연인과 재회해본 경험이 있다. 물론 나는 350만원을 빌린 적도 없었고, 스페인에 막걸리집을 차릴 계획도 없었다. 만나고보니 둘 사이의 시간은 대략 1년여가 놓여져있었다. 먼저 찾아와준건 영화속 희수처럼 여자였지만, 다행히 다짜고짜 돈 갚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몇개월간 남미 여행을 떠난다면서 떠나기전에 오랫만에 얼굴보러왔다는 그녀는 친근하게 연락하고 나 역시 아무렇지않다는 심정에 다시 만났지만 정작 희수처럼 불편함을 느꼈던건 나였다. 졸업을 갓 하고도 당장 모든 진로 걱정들으로부터 떠나 훌쩍 장기간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그녀의 말은 흡사 스페인에 막걸리집을 차리겠다는 병운의 말처럼 내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희수처럼 더 이상 이 옛 연인의 행동에 뭐라할 이유가 사라진 나는, 그날 그녀의 진지한 지난 속사정들을 건성으로 흘려듣고 지나치고 말았다. 병운처럼 좋지않게 헤어졌던 것도, 친구로 계속 남아도 충분히 괜찮은 사이임을 알지만 연인이었던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내는건 내겐 아직 벅찬 일이었던것 같다. 이후 그 아이는 정말 지구 반대편으로 떠났고 예정보다 훨씬 오래 체류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는 듯하지만, 나는 먼저 연락을 해 볼 용기를 잃었다. 희수와 병운의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이 영화의 엔딩이 그래서 나는 마음에 든다. 헤어진 연인간의 재회는 딱 거기까지라는 편견 아닌 편견을 내가 갖고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다음번에 또 기회가 있다면, 내 비록 병운만큼 넉살좋진 않은 남자지만 그때는 하정우가 꿈속에서 들었던 그 대사로 담담하게 용기와 응원을 건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너 괜찮어? 너 뭐, 많이 힘들지? "
















덧글

  • 휴식 2012/10/14 12:59 # 답글

    특이한 로드무비?ㅋㅋ라고 생각했던 영화예요ㅎㅎ 특히 하정우의 가벼운 한량 연기가 참 인상깊었어요. 저게 본모습일까 싶을정도로 ㅋㅋㅋ
    그리구 항상 궁금했던건 저 멋진하루는 누구의 입장인걸까요?.?
    전 보고나서 여운이 남거나 이야깃거리가 많은 영화가 좋은데 이 영화가 딱 그 입맛에 맞아서 좋았어요ㅎ
  • 레비 2012/10/14 14:57 #

    하정우의 저런 모습은 같은 남자가 봐도 매력적이에요 :) 마치 평소에도 저럴것만 같구요 ㅎㅎㅎㅎ 저도 누구입장에서의 멋진 하루가 되었을까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둘 중 누군가에게만 해당된게 아니라 둘 모두에게 그런 하루가 된게 아닐까 싶은 교과서적인 답 밖엔 도달하지 못하겠더라구요 ^_^ㅋㅋㅋ;; 병운은 희수와 함께해서 마냥 좋고 희수는 기대하지 않았던 병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하루였으니까요 :)
    저도 보고나서 생각해볼거리가 많은 영화들이 좋아요. 화려한 볼거리로 보는 그 시간에 즐거움을 주는 영화보다 다 끝나고나서 뭔가 남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들이 말이죠 :)
  • 2012/10/15 11:2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0/16 00:4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10/16 16:2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0/17 15:1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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