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Beginners , 2010 Flims













한 곳에 머물면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남자와, 정착하지 않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는 여자. 남자는 타인간의 관계에 대한 부질없음을 믿고, 여자는 가족과도 함께하고 싶어하질 않는다. 이 두 사람이 이제 시작해보려고, beginner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잘 될 수 있을까?











감독 마이크 밀스의 자전적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비기너스>는 이 둘이 왜 그런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영화도, 그리하여 이 둘이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려는 영화도 아니다. 영화는 주인공 남자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의 과거와 현재를 세심하게 교차시키면서, 그가 애나(멜라니 로랑)와 함께 있는 현재와 자신의 아버지 할(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시한부 여생을 지켜보는 시간을 평행선에 놓는다. 올리버의 유년시절에 보았던 그의 부모의 모습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회의감을 키웠다.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취급받던 시대, 게이임을 억누르고 결혼을 해야했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다며 결혼 한 어머니의 실패는 올리버 본인에게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 초반부터 볼 수 있는 이안 맥그리거의 허탈하고 공허한 표정의 근원은, 어떤 운명의 장난이라거나 대단한 과거사를 가진 주인공으로서가 아닌, 자라온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쌓이고쌓인 뿌리 깊은 얼룩이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후 75세의 나이에 게이임을 결국 커밍아웃한 아버지와 그의 젊은 남성애인 앤디(고란 비스닉)의 모습은 사랑에 대해서도 불신을 가진 아들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힐 뿐이었다. 하지만 올리버는 암 말기인 아버지의 임종을 위해 그의 행복을 지켜주려한다.









어려서 집을 나온 애나는 아버지를 멀리하고, 정착을 꺼리는 여자다. 직업과 돈은 충분히 갖추었지만 그녀 역시 올리버처럼 사람에게 마음을 붙잡아두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는 빈 호텔방이 자신을 반기는 것에 만족하고, 올리버는 애완견 '아더'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뿐이다. 둘은 어느 파티에서 만나고 금새 사랑에 빠지지만 둘의 연애에는 조심스러움이 묻어난다. 여느 연인과 다름없이 데이트를 즐기고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사랑은 그동안 비어있던 상대방의 마음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둘은 정말로 '한 공간에 있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렇게 그들의 용기 낸 첫 시작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고, 서로에게 힘이 든다. 영화에선 마치 여느 연인들이 싸우는듯한 갈등이나 다툼 씬도 생략한채 그저 한 집에 있다는 이유로 행복했던 지난 날들에 비해 두 남녀가 너무나 빠르게 어색해지고 멀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올리버와 애나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교감을 하는데에 얼마나 서투른 사람들이었는지를 단 몇번의 표정과 눈빛교환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둘은 헤어지지만, 평행선을 달리던 과거의 이야기, 즉 올리버의 아버지 할의 이야기도 끝을 향한다. 할의 임종 이후 앤디와 만난 올리버는 자신이 게이에 대한 편견이 없이도,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질투라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걸 인정할 수 있게된다. 떠나보낸 애나를 다시 찾으러 뉴욕까지 다녀온 올리버는 애니와 함께, 아버지가 암진단을 받고도 사랑의 감정을 나눌 친구를 찾으려 했던 구인광고를 보게 된다. 그것에는 암환자라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지난 40여년의 세월을 결혼이라는 굴레에 억압된 뒤늦은 커밍아웃을 하고도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삶을 살다 떠난 할의 모습이 있었다. 할의 사진과 광고앞에서 올리버와 애나는 두려움반 설렘반으로 또 다시 출발선에 함께 선다. 75세의 할이 그들에게 남긴것은 자신의 행복에 대한 열정, 그리고 늦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언제든지 시작하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beginner의 모습이었다.








영화는 물론 현재의 올리버가 과거의 아버지와의 일을 영화의 전개처럼 차례차례 교차적으로 그때그때 회상하는걸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편집이 관객에게 좀 더 현재 애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전진했다가 다시 어떻게 침체되고 또 다시 전환되는지를, 올리버의 구구절절한 설명없이도 비교하며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영화속 음악들은 언제 시작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잔잔하며, 캐릭터들은 침묵의 시간을 길게 갖는다. 이런 점들이 이 영화 내내 흐르는 차분하고 속삭여주는 듯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특히 개인적으로 나는, 후두염을 앓던 첫 만남의 애나가 올리버와 침묵의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너무나 좋았다. 언젠가 연인이 생기면 꼭 제안해보고 싶다. 저런 데이트를 한다면 상대방의 눈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보고 손짓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될 것만 같아서다. 또한 올리버의 스튜디오, 할의 병실과 임종을 맞이하는 그의 집 등 많은 장면들이 실내에서 찍힌 이 영화 속의 소품들은 화려하거나 눈에 거슬리지않는 잘 꾸며진 선물가게 진열대처럼 정갈하다.








이완 맥그리거의 표정은 올리버의 캐릭터에 아주 잘 어울렸지만, 할아버지 할을 연기한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연기는 그야말로 오스카 최고령 기록을 세우기에 충분했다. 그는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 모두에서 남우조연상을 비롯, 골든글로브를 포함한 다양한 영화제의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그의 게이애인 역을 했던 고란 비스닉의 연기도 뛰어났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 배우는 멜라니 로랑이었다. 분명 2009년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기억에 크게 없는데, 이 영화에서의 그녀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내가 마리온 꼬띠아르를 유독 좋아해서 그런지 그녀의 눈을 조금 닮은것 같기도하고, 프랑스 여배우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안고있는 배우다. 필모그래피를 챙겨 볼 배우가 한명 더 늘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명연기는 올리버와 할의 애견 '아더'이다. 올리버와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씬마다 이 강아지는 마치 정말 '연기'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견우주연상이 있다면 강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감성적인 눈빛 연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시작이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 사람이 겪어온 과거와 살아온 환경에 따라 누군가에겐 어렵고 힘든 일이 될수도 있고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할 수 있다. 영화속 올리버와 애나처럼, 혼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와의 관계를 새로이 시작하는 것보다 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혼자가 편하고, 혼자만의 공간을 더 아늑하게 여기는 것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할은 천성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으며, 올리버가 굳이 아버지를 따라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음의 호불호는 천성적인게 결코 아님을 영화는 올리버의 과거를 통해 나지막이 부정하며 용기를 내라고 북돋아주고 있다. 아울러 자신들의 경계선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맞닿아가며 교집합의 영역을 늘려나가려는 한 쌍의 '비기너스'를 통해 극복과 시작의 출발선에 선 모든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과거 언젠가, 어디에선가 beginner였고, 앞으로도 beginner로 서야 할 순간들이 올 때마다, 나는 이 영화가 생각날 것만 같다.






















덧글

  • 2012/10/08 15:4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0/08 22:4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날다람 2012/10/09 19:59 # 답글

    과거 그리고 시작 이런 단어들이 많이 공감가던 영화였어요. ㅎㅎ 영화 잔잔하고 연출도 되게 맘에 들었어요. 글 읽으니 또 보구 싶네요. 예전에 찾아봤을때 저 강아지 되게 연기 잘하기로 유명하다는... ;)
  • 레비 2012/10/10 02:25 #

    날다람님께서 제 블로그에 처음 방명록을 적어주셨을때 추천리스트에 있던 영화였어요 :) ㅎㅎ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 추천해주신 영화들 중 리뷰를 쓰고 싶게 만드는 좋은 영화들이 많았더군요..!

    강아지 연기 참 좋았죠? :) 정말 이완 맥그리거와 교감을 나누는 듯한 표정이었어요 ㅎㅎ 뒷이야기를 찾아보니 저 강아지가 멜라니 로랑을 촬영기간 중에 아주 싫어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이유가 이완 맥그리거와 사이를 질투해서였다고 합니다 ㅎㅎ
  • 날다람 2012/10/10 12:39 #

    그 강아지 저인가요? ㅋㅋㅋㅋㅋ 영국남자배우는 너무 분위기가 멋져요 •_•**
  • VV 2012/10/11 22:01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영화의 울림이 마음에 듭니다만. 그보다도 더 깊이있게 적으셨네요. 멜라니 로랑은 더 콘서트, 라는 러시아권 영화에 나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 거기서 그녀를 처음 봤기에 비기너스가 낯설지 않았죠.
  • 레비 2012/10/13 05:50 #

    감사합니다 :) 러시아권 영화에도 멜라니 로랑이 나온다니 몰랐네요. 전 <바스타드:거친녀석들>에서 처음봤습니다 ㅎㅎ 앞으로 찾아볼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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