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사제의 인연으로 배우 이병헌씨와 꾸준히 연락이 닿던 아버지께서 이 영화의 개봉일, 이병헌 본인과 함께 보러 다녀오시고선 그간 봐오신 그의 연기 중 최고인 것 같다고 추천하더니, 그 다음주엔 동생이 영화관에서 보고오더니 극찬을 늘어놓고 며칠뒤 여자친구와 다시 그 영화를 또 보고오더라. 이쯤되니 내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러가지 않을 수 없게 된 마당에 한국 사극에 대한 편견과 거기에 이병헌 주연의 사극이라는 잘 그려지지않는 그림은 더이상 나를 붙잡아 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저녁 약속에 이은 카페에서의 수다 도중, 충동적으로 밤 11시가 넘은 시간 영화관으로 향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가 영화를 보기전부터 가지고 있던 우려들 즉, 이병헌씨의 첫 사극 도전에 대한 불안, <나는 왕이로소이다>때문에 이미 한번 격한 실망을 겪은 '왕과 거지'식 스토리에 대한 불신, 그리고 조선시대 단 두명 '군'의 임금에 대한 다소 예측가능함에 대한 식상함 등은 완전한 기우였다. 네이버 영화 평점이 지나치게 높다는 의아함에 대한 답은 충분히 되돌려받았다.
* 이후 포스팅에는 영화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류승룡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남자 배우 중 한명이다. 그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소리 소문없이 한국영화들에서 조연으로 잠깐 잠깐 얼굴을 비추던 그는 작년 <최종병기 활> 뿐만 아니라 <평양성>,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황진이>등 사극 영화에서 자주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좋은 연기를 보이더니 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허균으로 1인 2역의 두명의 이병헌의 보조자로 열연했다. (게다가 나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부럽다) 이병헌의 연기는 두말할 것도 없다. 1인 2역이라는 설정은 그자체로 두 캐릭터 중 하나를 멍청하게 만들곤하는 일이 많았지만 영화에선 오히려 이 두 캐릭터가 한 장면안에 담기는 씬이 한장면을 제외하곤 없다. 오히려 어색하지않은 그 점이 이병헌의 두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데 일조했다. 이 두 배우, 이병헌씨와 류승룡씨, 70년생 동갑내기의 연기 대결은 어느 한쪽이 다른쪽을 잡아먹지 않으면서도 안 어울릴 수도 있는 캐릭터들을 어색하지 않게 유지해나갔다. 세간에는 이병헌의 연기에 대한 찬사가 대부분이지만 나는 류승룡씨 역시 그가 할 수 있는 선안에서의 허균을 잘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코믹함부터 전율까지 모두를 넘나드는 이병헌씨와 최소한의 표정과 대사로 감정을 표출하는 류승룡씨의 연기는 이 영화의 스토리가 다소 미진했더라도 대단히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영화 <카케무샤>처럼 시작해서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로 흘러가나 싶던 영화는 오리지날 광해가 쓰러지면서 온건히 '거지'의 입장에서 재시작된다. 그리고 가짜왕의 코믹한 연기는 근엄한 허균과 그를 뒷받치는 조내관과 도부장 등과 뒤섞이며 영화는 간신들에게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긴장감과 천하태평인 가짜왕의 몸개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간다. 점점 성숙해가면서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파죽지세의 가짜 왕이 그만 중전에게 반해버리고 마는 시점부터 나는 영화가 신파극으로 변질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진짜왕이 깨어나고 간신들의 레이더망이 조여오면서 영화는 다시 긴장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가짜왕이냐 진짜왕이냐 선택의 순간에서 영화는 편집의 기교를 부리고, 그 뻔한 반전은 알고도 당하는 반전이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후반부는 거의 계속 펑펑 울었다. (내가 심야의 영화관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옆 사람 눈치안보고 울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같이 영화를 본 일행이 영화가 끝나고 깜짝 놀랄 정도로. 하지만 찾아보니 나만큼 감동의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나 리뷰는 잘 찾을 수 없어서, 이 점은 내가 다소 감정이 과잉되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영화에는 분명 감동을 주기위한 장치들이 있지만 내가 정작 눈물 흘린 부분들은 사월이도 아니고 중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랑의 도피도 아니었다. 슬픈 부분에서 눈물이 났던게 아니라 감동과 전율의 씬, 특히나 '마지막 왕 노릇'의 아침 그가, 역사가 기록하는 중립외교를 펼치는 그 일갈에서 나도 민망할 정도로 눈물이 났다.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다. 나는 늘 영화의 그런 부분에서 눈물이 난다.) 게다가 마지막에 류승룡씨의 미소의 작별인사에서도 또 눈물. 아 이렇게 생각해보니 이병헌이 대신들에게 말할때마다 운 것 같다.
이것이 '왕자와 거지'처럼 거지가 신분상승의 판타지를 현실로 옮겨가며 아웅다웅하는 이야기라면 이런 감동의 연속은 아마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긴장감이나 박진감이 더 컷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천민 출신의 가짜왕이라는 설정은 오히려 '백성의 편'이라는데 더 유효하게 작용할 뿐 그는 정말 왕위에 욕심을 내거나 왕 놀이에 심취해버린 캐릭터로 빠지지않는다. 그가 자꾸 선을 넘는 것이 위험해보이긴 하지만, 결코 어리석어 보이진않는 이유는 초반부부터 등장한 진짜왕의 공격적 이미지와 대조되어 성군의 이미지를 쌓아가기 때문이다. 허균 역의 류승룡씨는 그런 왕을 지켜보는 조력자로서 표현이 극도로 절제된 상황에서도 무리한 감정의 오버페이스를 달리지 않는다. (이 조력자의 부족한 감성은 조내관과 도부장 몫이다) '왕자와 거지'의 설정은 마치 배트맨 시리즈의 투페이스(그 <다크나이트>의 하비덴트..) 와 같이 역사가 기록하는, 두 얼굴을 가진 임금 "광해군"이라는 왕을 살리고 표현하는데에 최적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마치 '두명의 인물'이 존재했던것만 같던 역사 속 왕을 아예 '두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실제로는 괜찮은 임금이었다가 변해버린 진짜 광해군이 가짜왕을 보고 다시 정신을 차리는 결말은 영화속 두 명의 이병헌에게 모두 해피엔딩으로 돌아갔다. 가짜왕은 왕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역시 그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고 궁을 나섰으니까. 이 영화를 통해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물론 영화 속 광해의 대사들은 지금 현재 이 나라에 살고있는 우리 국민들의 귀를 후벼주는 속 시원한 말들 일색이고, 그래서 나같은 관객들의 감동을 끌어내기에 아주 쉽고 무리가 없는 면이 다소 있다. 게다가 국내 사극 영화들이 그간 쌓아올린 길을 답습이라도하는 듯한 장면들과 전개는 다소 아쉽지만, 또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무리수와 모험 없이 눈에 잘 들어오는 영화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아쉬움들을 커버하고도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이병헌씨를 포함한 모든 주조연 배우들의 명연기다. 만족스러운 영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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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을 이토록 두서없이 이 야심한 시간에 쓰는 이유도, 내가 방금 영화관에서 나선지 몇 시간 내에 남기고 싶어서이다. 오늘밤을 자고나면 영화관에서 느꼈던 감동이나 벅차오름이 대부분 사라지고 없을 것 이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이 글은 부끄러운 리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늘 영화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논설적이고 '잘' 쓴 리뷰를 쓰는 것보다, 내가 조금 전에 느꼈던 그 감동을 조금이라도 더 사라지기전에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은 욕구가 더 크다. 이 사족은, 이것으로 이 방만한 글에 대한 변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은 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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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울진 않았지만 그 절박한 마음은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 호통치는데 그 말이 참 오랫동안 울리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중전의 오라비에게 찾아갔을때 눈물이 퐝퐝...
류승룡씨는 언제나 캐릭터를 잘살려내서 너무 좋더라구요ㅎㅎ 전 이병헌보다 류승룡씨가 더 좋습니당ㅎㅎㅎ*_*
아 ! 저도 그 장면에서 감동받았어요 ! 참다못해 "적당히 좀 하시오!" 이러고 나오는 대사들이 너무 심금을 울려서 거기서 눈물 뚝뚝.. ㅠㅠ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마음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왕의 표정과 "당연한데 뭘 고민하느냐"는 확신에 찬 언행들이 비록 연기였지만 너무 마음에 들었나봐요 ㅎㅎ
저도 류승룡씨는 아주 좋아합니다 ^-^ ㅎㅎㅎㅎ 엿먹을때 어쩔줄몰라하다 퇴청할 때 너무 웃겼어요.
이병헌 연기가 정말이지 갑이더라구요 내용도 좋았구 재미도 감동도 있었구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게 만드는 영화가 있는데 그렇지 않아서 더 좋았던것 같아요
보고 나면 먹먹해지는 느낌? 또 좋은 한국영화가 나와서 기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