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마일, 8 Mile , 2002 Flims










지난달 8월 19일. 서울 잠실보조경기장에서 Recovery 투어의 일환으로 에미넴이 내한공연을 가졌다. 데뷔 이래부터 줄곧 수많은 화제를 뿌리던 세계적 백인 랩퍼인 에미넴의 내한공연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지만 예나 지금이나 랩음악에 크게 흥미가 없는 나로선 마룬파이브나 자미로콰이 내한공연만한 구미를 당기진 못했던건 사실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2000년, 자주가던 (그리고 지금은 이미 수년전에 사라진) 레코드샵에서 18세미만 구입불가 딱지를 무시하고 구입했던 <The Marshall Mathers LP> 에미넴 1집은, 당시 하이틴팝을 즐겨듣던 내 귀엔 썩 맞지않는 앨범이었다. 하지만 그해 녹화중계로 2000년 MTV Video Music Award를 보던 나는 The Real Slim Shady의 독특한 라이브 공연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후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에미넴의 소식들은 그래미 시상식에서 엘튼 존과의 듀엣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나는 단 한번도 에미넴과 그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수년째 그의 소식은 내 반경안에 있었다. 그래서 이번 내한 공연때의 하트사건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일종의 충격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래퍼중 한명이 머리위로 하트를 그렸다니. 국내팬들의 반응이 얼마나 좋아서 그랬든지, 에미넴에게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던지간에, 하트를 그리는 에미넴의 모습은 누구의 머릿속에서도 쉽게 그려질 장면은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그 장면을 처음봤을때 나의 느낌은 대단한 위화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영화 <8 마일>을 다시 보았었다. 










이 영화를 언젠가 리뷰할날이 오면 '씨네21' 김혜리 기자님의 책 <영화야 미안해>의 이 구절을 꼭 삽입하고 싶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8 마일> 제작 소식을 듣고 러셀 크로는 커티스 핸슨에게 메세지를 보냈다고 한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에미넴 역은 누가 한다죠?"
감독 커디스 핸슨에게 <LA 컨피덴셜>로 호흡을 맞췄던 러셀 크로가 보낸 이 걱정은, 지금 보면 해학적이지만 러셀 크로는 꽤 진지했었을것 같다. 에미넴의 자전적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기는데 있어서 에미넴의 역할을 맡을 배우는 커디스 핸슨에게도 부담이자 승부수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에미넴의 역할은 에미넴에게 돌아갔고 이 세계적으로 공격적인 래퍼의 '의외의 따듯한 면'들에 대해서 감독과 배우는 일종의 타협을 피할 수 없었을테다. 하지만 이 점은 에미넴 역시 양보를 했을 것으로 우리는 영화를 직접 보고 추리해낼 수 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이것은 세상을 향해 독설을 내뿜는 에미넴의 독기 품은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무대공포증에 구토하고 상대 흑인 래퍼에게 소위 '쫄아서'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지미 레빗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커티스 핸슨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에미넴의 연기는 연기같지도 않다. 그의 대사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데, 그 와중에 마이크를 잡으면 수년째 듣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기하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에게는 대사를 읊는것보다 랩을 뱉는것이 더 자연스럽다. 에미넴의 커다란 눈과 치켜뜬 시선은 그가 겁을 먹었는지 분노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는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들만을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었고 그렇게 이 영화를 '에미넴 영화'로 만들었다.








흑인들의 세계, 그들의 랩에서 백인인 지미 레빗 혹은 에미넴은 확실히 불리했다. 심지어 디트로이트로부터 지구반대편에 살던 중학생인 나조차도 에미넴의 등장을 처음보고는 "백인 래퍼?"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으니 말이다. 그는 제강공장에서 자동차 범퍼를 나르며 일하고, 얹혀사는 엄마(킴 베이싱어)의 트레일러 집에는 자신과 나이차이도 얼마 나지 않아보이는 망나니 애인이 자신의 엄마와 동침하고 있다. 직업도 없이 도박과 남자에 빠져 어린 딸을 돌보는 일도 뒷전인 엄마만 해도 집안이 답답할 지경인데, 공장에선 상사가 눈치를 주고, 임신한 여자친구는 떠나가고, 독립 못한채 부모 집에 얹혀사는 313패거리 친구들은 입으로만 스타가 될 준비를 떠들고 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모든 삶의 길이 막혀버린 상태. 그 속에서 그의 유일한 희망은 어찌보면 래퍼로서 성공하는 첫 관문인 방송국으로 보내는 데모테이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느 뮤지컬 영화에 가깝다면, 이런 악조건속에서도 지미의 데모 녹음은 큰 반향과 히트를 거두고 성공하더라는 스토리로 나가갈테지만 지미에겐 이마저도 순순히 허락되지 않는다. 그를 방송국으로 이끌어줄 친구 윙크(유진 버드)는 지미와 사랑의 감정이 싹트던 알렉스(브리트니 머피)와 눈이 맞고, 그들의 섹스장면을 목격하고만 지미는 그 자리에서 윙크를 때려눕히고 다시 친구들과 그가 시작했던 랩배틀의 무대로 돌아온다. 그리고 일전에 모욕을 당했던 그 무대에서 그는 자신의 이런 모든 악조건들과 상황들을 분노로 쏟아낸다. 우리는 그 클라이막스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막상 이 영화를 다보고나서야 한가지 의문이 따라붙는다. 에미넴이 출연한 영화인 것은 맞지만 이것이 정녕 '에미넴의' 영화일까.






영화만큼 유명한 그의 노래이자, 이 영화 <8 마일>의 사운드트랙인 'Lose Yourself' 가 언제쯤 지미의 입에서 나올지 나는 궁금했고 적어도 쉘터에서의 마지막 결승전 무대쯤에선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곡은 그의 이어폰에서 잠시 지나가듯 나올뿐, 지미는 결코 그 에미넴의 히트곡을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에미넴은 "Lose Yourself"로 2003년 75회 미국 아카데미에서 '주제가 상'을 받는다. 그래서 <8 마일>은 아카데미 역사상 랩/힙합 음악으로 주제가 상을 받은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에미넴이 라이브로 욕설을 할 것을 우려해 립싱크를 요구했던 아카데미 측 때문에 에미넴은 시상식에 참석조차 안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혀 에미넴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이미 슈퍼스타인 에미넴이 아닌, 그리고 그의 명성에 걸맞게 그만큼 널리 알려진 그의 지난 생애를 그대로 배껴온 시나리오가 아닌 까닭이다. 이미 에미넴의 명성을 익히 알고있는 관객들은 당연히 결승전에서 승리한 마지막 씬의 지미가 그 길로 '드디어' 우리가 아는 에미넴으로 걸어나오길 기대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씬에 도달해서야말로 에미넴과 지미를 가르는 분기점이 그려진다고 본다. 그는 앞으로 함께 랩배틀을 하자는 친구의 말에 아직 할 일이 있다며 돌아선다. 우리가 아는 에미넴으로서의 첫번째 관문을 막 통과한 그에게 할일이? 그건 이제 스타가 되는 길 뿐이잖아? - 하지만 이내 아차싶다. 이 이야기는 에미넴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지미는 스타가 되는 길을 택하지않고 하다말고 온 야근을 마저하러 공장으로 돌아가며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잡으며 영화는 끝난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관객들의 기대보다 훨씬 많은 것을 판돈으로 걸어놓지 않았다. 에미넴의 자전적 굵직한 스토리들, 이를테면 어머니와의 갈등, 어린 나이에 얻은 딸, 닥터 드레를 만나는 이야기 등은 은유적으로, 그나마도 말할듯말듯 알아들을 사람들만 알아들으라는 식이다. 그래서 마지막 배틀에서 승리한 지미를 바로 지금의 에미넴으로 곧장 연결 짓게되는 관객들의 관성을 저지한다. 이 영화를 통틀어, 그가 극복하고 결국 쟁취한 그 무언가는 결국 스타로 가는 입구도 아니고, 잃어버린 연인을 되찾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과 가난에서 탈출시키는 돈도 아니다. 고작 일주일전의 모욕을 설욕하고 라이벌 패거리들에게 통렬한 복수를 한방 먹였을뿐, 그는 여전히 다음주에도 공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쉘터를 찾아 도전자들과 랩배틀을 벌이게 되었을 뿐이다. 그들, 313 패거리들은 여전히 부모의 집에 얹혀살며 고물자동차를 몰고 다닐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미는 이미 우리가 다 알고있는 성공한 래퍼가 아닌, 디트로이트 뒷골목의 어느 백인 청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 마일>은 스타비히클로서는 성공적인 영화가 되었다. 이런 '뻔하게 될 뻔한' 영화를 뻔하지 않게 만든건 감독 커티스 핸슨의 공이 크다. 그는 에미넴의 자서전을 써줄 생각이 없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아마 에미넴도 그런 그의 의도에 보조를 잘 맞추었을것이고 그래서 이 영화 <8 마일>은 에미넴의 이야기에 지미 레빗이라는 백인 청년의 이야기를 덧 씌워,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되었다. 에미넴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에미넴 뮤지컬도 아닌.

마지막 배틀에서 그는 자신이 상대로부터 공격 받을것이 뻔한, 자신의 치부를 오히려 먼저 다 쏟아버리고 역공을 함으로서 상대의 입을 봉해버린다. 역이용한 것은 오히려 상대의 유복했던 과거사다. 제목 '8마일'은 디트로이트의 부유층과 빈민가의 경계가 되는 거리 이름이며 영화속 대사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흑인들은 백인인 그를 엘비스라고 놀리며 8마일 너머로 꺼지라고 말하지만 지미는 오히려 자신이 있어야할 곳이야말로 8마일 이쪽이라는 것을, 그의 비참한 처지와 하루하루의 고달픈 삶으로 증명해보인다.







사실 지미 레빗이 에미넴이 아니든, 얼마만큼 이 영화가 진짜 에미넴을 닮아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속에는 슈퍼스타가 된 백인 래퍼의 성공기가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시궁창 같은 현실속에서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투쟁과 자신의 컴플렉스이자 약점들로부터 극복하고 복수하는 어떤 희열이 있을 뿐이다. 에미넴의 음악, 그의 랩은 세계적으로도 그 공격적임에 명성이 높지만, 영화속 지미는 그런 환상을 깨버린다. 그는 어린 여동생을 보살피고 (심지어 자장가를 불러주고) 반쯤 제정신이 아닌 엄마를 걱정하고, 총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쏜 친구를 걱정하는 등 패거리안에서도 가장 어른스럽다. 현실속의 에미넴에 대한 어떤 어둡고 다가가기 힘든 환상이 깨어지는 그 순간,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영화는 인간적인 에미넴에 좀 더 다가간다. 영화를 다 보고, 에미넴의 하트를 다시 보았다. 어쩐지 그제서야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덧글

  • 서주 2012/09/10 07:16 # 답글

    와.. 안 본 작품인데 정독하다보니 한 편 본 기분이에요.
    이런 내용이었구나.. 특히 결말이 굉장히 마음에 드네요. 과정이 허술해도 매조지가 이런 스타일이면 매우 만족하곤 합니다ㅎㅎㅎ 근데 기승전도 좋아...

    힙합/랩, 늘 틀어놓진 않아도 제법 좋아하다보니 에미넴도 적잖게 들었는데 이 영활 굳이 보지도 않고 리뷰도 피했던(?) 이유는.. 아티스트의 사생활, 진짜 내면을 알게 되면, 엿보게 되면 저로선 그게 그의 예술을 감상하는 데에 바로바로 영향을 끼치더라구요. 작가, 음악가, 화가 모두.. 물론 예술가를 이해해야 예술도 더 깊이있게 감상할 수 있지만 때론 편견이 되기도 하는 터라 그냥 에미넴의 음악을 들으며 여백은 청자의 상상력으로 채웠었는데 읽고 나니 보고싶어지네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 레비 2012/09/11 23:46 #

    감사합니다 :) 사실 이미 성공한 스타의, 그것도 팝스타가 직접 출연하는 자전적 영화는 하나같이 망하는 징크스가 있었는데 그것을 멋지게 극복한 감독의 센스가 돋보였어요 ㅎㅎ

    확실히 영화속 지미는 기존의 에미넴의 이미지와 많이 다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주님의 생각도 이해가 충분히되네요 ㅎㅎ 하지만 에미넴의 성장배경에도 크게 벗어난 왜곡도 거의 없다봐도 무방하기에 에미넴 팬으로서도, 한 인생역경 드라마로서도 어느쪽으로도 추천할만한 작품입니다 :D
  • 마이 2012/09/12 14:49 # 답글

    우와 레비님이 이 영화를 쓰실 줄이야 ㅎㅎ 전 개인적으로 에미넴 팬이기 때문에 열심히 읽었습니다 - 저도 이 영화를 그래서 자서전"격"인 영화라고 썼던 적이 있는데 - 여기서 만나게 되니 괜히 반갑네요 ^^

    ...특히 "따뜻하다"라고 표현하신 부분. 전 에미넴을 "따뜻하고 강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주변에서 '그 무서운 애가 뭐가 따뜻하다는거야?'라고 핀잔을 줘서 - 왠지 공감대가 형성된 거 같아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히히
  • 레비 2012/09/13 15:04 #

    앗 좋아하시는 영화였군요 ㅎㅎ 에미넴 팬이셨다니 ㅎㅎ 처음엔 저도 그저 에미넴의 자서전 같은 영화일거라고만 생각한채 보기 시작했어요 :) 에미넴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대충은 알고봐서 그러려니 했는데 갈수록 감독의 연출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겉보기엔 독설가이지만 속은 따듯한 인간적인 면의 에미넴이 담겨있어서 드라마로서도 완성도가 높았구요 ㅎㅎ( 브리트니 머피를 다신 못보게되서 슬프지만요 ㅠ )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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