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로봇, I, Robot, 2004 Flims










어느 다큐멘터리에서였는지 책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접하고 한동안 흥미와 충격을 동시에 받은 경험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인간을 닮은 로봇에 흥미로워하고 재미를 가지다가도 그 어느 한계를 넘어 지나치게 인간을 닮으면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애완용 강아지 로봇은 이미 일본등에서도 센세이션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외에도 대부분의 '로봇 답게 생긴' 인공지능 로봇들에 대해선 위화감을 느끼지않지만 유독 외형이 사람을 닮을 수록 우리는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군사용 로봇들이 효율성을 떠나서 인간을 닮아가려는 까닭이 적군들에게 '로봇이 아닌 같은 인간'을 죽인다는 감정을 더 심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글을 읽었을때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충분히 그럴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영화 <아이, 로봇>을 처음봤을때, 영화속 로봇 '써니'를 보고 든 감정은 사실 그런 혐오감이었다. 희뿌연 금속 피부로 둘러쌓여있는 마스크에 지나치게 섬세한 표정들은 실제로 보면 대단히 끔찍할 것 같았다. 로봇은 로봇답게 생기기를 바라는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고있는 공대생으로서 과연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간을 닮은 로봇은 원래의 목적인 그 친화감보다는 거부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인간이 창조한 로봇이 감정을 가진다는 설정은 이미 수많은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들에서 다루어졌다. 게다가 그 로봇들의 반기, 인간과의 충돌과 갈등은 진부한 소재임에 분명하다. 2032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제페니메이션 <이노센스>를 비롯하여 영화 <바이센테니얼맨>, <에이 아이> 등에서도 감정을 갖는 로봇들은 등장했었다. 미래세계의 로봇들을 말하는 영화는 대체적으로 두갈래 길을 택해야했던것 같다. 로봇이 갖는 감정에 촛점을 맞추어 '인간미'를 가져버린 로봇이 느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 고민을 바탕으로 로봇과 사람의 경계를 되묻거나, 아니면 그 로봇들의 반항이나 반란을 인간과 충돌시켜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경고를 날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 <아이, 로봇>는 감정을 가진 로봇의 고뇌를 붙잡은채 윌 스미스를 액션 배우로 내세워 볼거리까지 놓치지않으려 했던것 같다. 결과적으로 나는 호불호가 많이 갈렸던 윌 스미스의 캐스팅은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투박한 미래사회에서 로봇을 불신하고 오직 자신의 육체적 본능을 믿는 근육질의 흑인 형사는 이런 로봇에 의해 점령당한 미래 사회에 분명 잘 어울리는 투사다. 






SF계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홉 종류의 로봇에 대한 단편을 모은 소설이 바로 1950년 작 소설 <아이, 로봇>이다. 이 소설에서 그 유명한 '로봇 3원칙'을 그는 만들어냈다. 이 영화 <아이, 로봇>에서도 주효하게 등장하는 이 3원칙은 첫째,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되고 인간이 다치는 것을 방관해서도 안된다. 둘째, 1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한다. 셋째, 1, 2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한다. - 이다. 잘 읽어보면 세 원칙이지만 철저히 우선순위가 구분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로봇 스스로의 보호는 3순위고,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1순위이다. 인간의 명령을 듣는것보다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 더 높은 순위에 있는 것이다. 영화 <아이, 로봇>이 그리는 2035년의 시카고는 이런 3원칙이 규칙을 넘어 거의 맹목적 믿음으로 지배하는 미래 세계이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로봇들은 이 원칙에 의해 모든 논리를 정하고 행동한다. 물론 이 영화의 결정적 진범을 가리는 반전도 바로 이 원칙의 헛점에서부터 온다. 인간 명령에 대한 복종보다, 인간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는 논리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누가 이 모든것의 배후이냐는 반전은 사실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다. 







어느 로봇의 '논리적인' 결정에 의해 죽음의 목전에서 어린 소녀 대신 구출된 형사 스프너(윌 스미스)는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로봇 불신론자다. 하지만 미래의 시카고는 그런 그가 살아가기에 불편한 사회가 되어있다. 그의 할머니는 가정용 로봇을 사들여 팬케이크를 만들고, 경찰인 동료들은 로봇은 절대 인간을 해치지않는다고 신봉한다. 하지만 컨버스 스니커즈를 신고, 구형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자동차 운전도 자동이 아닌 직접 손으로 하는 것을 더 신뢰하는 미래사회의 스프너는 그 캐릭터 자체로 미래화된 사회속의 반항아이다. 그런 그에게 굴지의 로봇 제조 기업 USR에서 자살한 박사 래닝(제임스 크롬웰)은 수수깨끼같은 유언을 남기고 그는 래닝 박사의 죽음을 로봇에 의한 타살이라는, 그 시대에 그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결론을 가진채 수사해 나간다. 기존의 로봇들보다 더 높은 지능을 가진 NS-5의 출시를 앞두고 있는 기업의 사장 로버트슨(부르스 그린우드)는 스프너를 위협하고 견제하지만 그는 로봇 심리학자인 수잔 캘빈(브리짓 모나핸)과 비밀을 파헤치려고 필사적이다. 래닝 박사의 방에서 발견되 가까스로 체포한 NS-5 로봇은 자신의 이름을 '써니'라고 밝히는 등 감정을 가진 로봇임이 드러나고 래닝 박사의 행적을 추적하는 스프너는 그가 남긴 메세지를 헨젤과 그레텔처럼 역으로 쫓아간다.







로봇이 감정이 없으며 비인간적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스프너는 로봇에 대한 불쾌감을 가진다. 왜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었는지조차 화를 내는 그에게 감정을 가진 '써니'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스프너는 끝까지 로봇에 대한 불신을 놓지않는다. 이 영화는 스프너와 수잔의 시선에서 로봇을 신봉하는 미래사회속에서 차차 로봇을 의심하고 위험한 존재로 보는 시각을 관객들에게 유도해나간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스프너를 공격하는 로봇들과 급기야 인간들을 집에 구금하는 로봇들의 반란씬에서 이 영화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식상하지만 절정에 달한다. 이런 말 안듣는 로봇들 속에서 감정을 가진 '써니'의 존재는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허문다. 써니는 이미 로봇의 존재이지만 3원칙이 아닌 감정을 가지고 있고 스프너와 신뢰의 윙크를 주고받을 수 있게되자 그때 이미 인간에 한발짝 다가간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자신보다 수잔을 구하라는 스프너의 명령에 로봇이고서는 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다. 그것은 스프너에게 있어서 과거 소녀에 대한 트라우마를 깨주는 써니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끝까지 찝찝함을 남기는 까닭은 써니의 꿈속 모습과 마지막 장면들이다. 잘못된 로봇들의 반란과 그것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흑인 형사와 생각하는 로봇의 우정이야기라면 뻔한 히어로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인간이 아닌 로봇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고 로봇에게 영혼이 있다고 여러번 말한 래닝박사의 시선에서 본다면 이 엔딩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 이 영화가 지나치게 완벽해져가는 로봇들은 반드시 경계해야한다는 미래에 대한 엄중한 메세지가 아니라 3원칙이라는 제어장치가 있고도 인간을 공격한 로봇들의 행동들을 이해하고자하는 시도였다면 어떨까. 래닝박사는 영화속에서 감정을 갖는 로봇, 이를테면 '써니'의 존재가 마치 돌연변이같은 식으로 묘사했지만 이것은 모든 NS-5의 정신적 중추였던 '비키'가 일으킨 진화와도 같은 맥락이다. 써니가 로봇들의 폐기장과 다름없는 창고지역의 언덕에 서서 다른 NS-5들을 내려다보고 그들이 올려다보는 마지막 엔딩씬은 한 혁명가의 모습과 다름아니다. 스프너는 써니와 헤어지기전, 자유를 주고 하고싶은대로 하라고한다. 로봇에게 자유의지를 준 인간은 로봇의 감정과 생각을 인정했다는 뜻이된다. 그렇게 하고싶은대로 하려는 써니가 도착한 곳은 자신과 다른, 아직 감정이 없는 로봇들이 폐기처분되어 기다리고 있는 그곳이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3부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9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 <애니매트릭스 The Animatrix>가 2003년 공개되었었다. 다양한 감독들이 매트릭스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각자의 짧은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엮어낸 이 에피소드들은 키아누 리브스가 총알을 피하던 그 시간, 그 공간에 다른 곳에서 있던 또 다른 저항군들을 말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강력히 추천해주곤 했다. 이 옴니버스를 보고 나면 매트릭스의 세계관이 명확하게 이해가 된다. 특히 이중 두 편, '두번째 르네상스 PART 1 & 2' 는 워쇼스키 형제의 각본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이 이야기야말로 매트릭스의 세계가 '어떻게해서' 탄생했는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설명서와 같다. 완벽한 디스토피아로의 진행과정이 드러나있는 이것은 워쇼스키 형제의 설정집과도 같은데, 놀랍게도 이야기의 발단부는 이 영화 <아이, 로봇>과 매우 흡사하다. 평화롭게 3원칙을 지키며 인간들을 돕던 로봇들중 역사적인 한개의 로봇이 감정을 가지고 인간에게 반항을 하였고 그로인해 로봇들은 폐기처분당하고 살아남은 로봇들은 따로 모여 그들의 국가를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이때까지만해도 로봇들과 인간들은 평화로웠다. 다만 이후 로봇들에게 전쟁을 건 인간들이 패배하게되면서 로봇들에게 지구를 빼앗기고 그 이후 매트릭스의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아이, 로봇>에서의 써니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점,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씬처럼 인간들로부터 유배당한 로봇들이 그들끼리 뭉치는 장면이 이 영화가 마냥 해피엔딩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는게 아닐까. 미래의 인간들이 로봇의 반란을 겪고 그들을 두번다시 쓰지않을거라고 기대하긴 힘들다. 반면, 한번 인간의 감정을 맞본 로봇들이 진화를 멈추거나 그들이 완벽함을 더욱 개발하는데에 주저할거라는 생각도 하기 힘들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써니'를 자유롭게 풀어주었지 않았던가.


결국 감독이 말하는 것이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본듯한 더 암울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당장 급한불은 끈 시점에서 끝이 난다. 다만 이것이 이제 더 큰 불을 불러올지, 스프너와 써니의 동료애처럼 공존으로 나아갈지는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말한 이 영화는 로봇은 무조건 악하다고 끝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그들의 효용성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아직 오지않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논하는 것은 현재를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로봇과 인간을 다루는 영화들이 말하듯 영화 <아이, 로봇>도 로봇과 인간의 경계, 생각하는 로봇, 감정을 가진 로봇을 등장시키며 SF적 유토피아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경고를 던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연으로 등장해, 반항하는 로봇들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다 윌 스미스의 보호를 받은 철없는 소년으로 나오는 배우는 3년 뒤, 우주에서 온 로봇들을 부리며 지구를 구하는 <트랜스포머>의 주인공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가 된다.

















덧글

  • 셍나 2012/08/18 00:41 # 답글

    아직 나오진않았지만, 사고를 하는존재라는게 어떻게 보면 두렵지요.

    아이로봇 어떻게 보면 그러한 두려움의 표출이었을지도요
  • 레비 2012/08/18 18:07 #

    전 사실 생각하는 로봇이라는 것들이 경외롭기보다 두려운 감정이 더 커요 ㅎ
    이 영화도 그런 경고를 담고있는 것 같아요 :)
  • 루얼 2012/08/18 03:45 # 답글

    예전에 케이블에서 자주 해줘서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 레비 2012/08/18 18:08 #

    찾아보니 케이블TV에서도 자주 방영하는가 보더라고요 ㅎ; 전 왜 한번도 못봤을까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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