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The Pianist, 2002 Flims











영화가 주인공에게 던져주는 시련을 그들이 상대하는 법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맞서 싸우거나 혹은 피하고 달아나거나. 하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곤했던 저 헐리우드의 영웅들은 주로 전자를 택했다. 현실에서 우리가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끌어내는 것은 달아나는 것보다 늘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픽션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고난과 역경에 맞서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극복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주곤 했다. 하지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그런 '영화속 영웅'들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그는 조국 폴란드와 유태 민족이라는 자신의 동포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침탈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는 법을 모른다. 아니, 방법은 알지만 그 용기를 내는 일,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돌 하나 던질줄 모르는 소심하고, 순박하고, 대의보다는 당장의 삶의 연명에 본능을 느끼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 영화에서 비겁하고 소심한 주인공 때문에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며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모습이야말로 두바이 타워를 맨손으로 오르는 톰 크루즈보단 현실의 우리와 더 닮아있기 때문이다. 액션 배우들처럼 우리가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을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대신,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는 바로 우리 그대로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생생하게 연기했다. 전쟁의 화염 앞에 두려워하고 총구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살기위해 발버둥칠 우리 진짜의 모습을 말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을 시작으로 전쟁 전후 까지를 배경으로 가지는 이 영화는, 2000년에 타계한 폴란드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자전적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삼는다. 역시 같은 폴란드인이자 독일군의 폴란드 침략을 직접 경험해본 기억이 있는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을 맡아, 이것은 한 유태인의 눈으로 바라본 홀로코스트에 대한 적나라한 필름이 된다. 따라서 영화에서 보이는 독일군은 하나같이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잔혹하고 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배경과 설정을 갖는 영화인 만큼 그런 나치 독일이 유태민족과 폴란드에 가한 잔인성이 부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스필만은 폴란드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연주를 해온 유명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전쟁의 포성에 그의 피아노 연주는 이내 묻혀버리고 그는 50만의 유태인 중 하나가 되어 유태인 격리 수용지구, 게토로 가족들과 강제 이주당한다. 늙은 부모를 비롯, 6명의 대가족인 그들은 점점 악화되어가는 상황속에서도 독일이 패망하고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희망을 갖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태인에 대한 나치 독일의 박해는 심해져간다. 눈앞에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혼자가 된 스필만은 이후 게토와 폐허가 되어가는 폴란드 바르샤바 시내를 전전하며 독일군의 눈을 피해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피신과 도주를 계속한다.










독일의 부당한 유태말살 정책앞에 그는 대단히 무력하다. 심지어 당연하다싶을 정도의 개인적인 분노마저 영화속에는 잘 잡히질 않는다. 독일의 바르샤바 점령직후 도로타와 간 카페에서 유태인 출입금지 표시를 보고도 그냥 다른데로 가자고 하는 것은 도로타가 아닌 스필만이다. 집에 돈이 부족해 피아노를 팔아야 할 때에도 부당한 가격에 분노하는 동생들보다 무심하게 팔아넘겨버리는 스필만은 나치에 분노를 표출하는 남동생과 비교되며 대단한 민족적 사명보다는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 싶은, 자신의 안위가 더 급한 전형적인 소시민이다. 게토 밖 은신처로 그녀를 도와준 야니나 부인와 함께 게토안의 실패한 유태인 저항을 두고 대화하면서, 그녀는 이제 비로소 폴란드인들과 함께 유태인이 싸워야 한다고 의욕있게 말했지만 정작 스필만은 그런 동포 유태인들의 희생을 보고도 얻은게 무엇이냐고 말할 뿐이다. 야니나 부부가 발각되고 다른곳으로 도망치라는 말에 스필만은 그냥 계속 있다가 창밖으로 뛰어내려 죽을 각오를 한다. 하지만 정작 독일군 트럭이 은신처 건물 앞에 주차했을때, 뛰어내릴 의자까지 가져다 놓고도 그는 창문으로 뛰어내림에 각오가 대단히 부족해보인다. 물론 정말 스필만을 잡으러 온 트럭은 아니었지만 독일군의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해도 그는 뛰어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옮겨다니는 스필만의 은신처에 있는 창문은 아주 주효한 미장센이다. 스필만은 창문을 통해,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인들이 맞은편 집에서 휠체어를 탄 유태인을 떨어뜨려 살해하고 일가족을 쏴죽이는 것을 보았으며, 게토의 유태인들이 독일군에 저항하고 그들이 포격에 진압당하는 것을 보았고, 전쟁 후반부에는 역으로 레지스탕스들이 독일군 경찰서와 병원을 테러하는 장면을 본다. 이 모든 사건들과 스필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창문이다. 그는 그렇게, '현장'에서 늘 관찰자의 입장으로 있어왔다. 사실 그가 정의감이나 분노에 불타 한번이라도 그자리로 뛰쳐나갔다한들 그가 독일군에 희생되었을 것은 불보듯 뻔하다. 그는 가족들이 죽으러 가는 열차에 올라타고 있을때도, 게토의 담을 넘어오던 유태인 아이가 눈앞에서 숨이 끊어졌을때도 분노에 소리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울음을 삼키는 전형적인 소심한 한 남자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서 <브레이브 하트>에서의 멜 깁슨이나, <킹덤 오브 해븐>에서의 올랜드 블룸 같은 영웅의 모습을 기대해선 안된다. 딱 한번, 나치의 노역 현장에서 채찍으로 맞아가며 일을 할 때, 그는 아는 얼굴을 만나고 게토 내 유태인들의 저항군에 참여하려고 한다. 실제로 밖에서 들여오는 감자나 빵 속에 총이나 폭탄을 숨겨 들어오는 일을 도우면서 이제서야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스필만이 나치를 향한 분노의 복수를 시작하려나 싶은 찰나도 곧, 한번의 적발 위기 앞에 다시 소심해져버린 그는 게토 밖 폴란드 바르샤바에 살고있는 과거의 지인과 어렵사리 연락을 하여 결국 노동 현장을 빠져나가고 만다. 영화에서 그가 가장 용기를 냈던 그 순간은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가버리고, 이후 그의 행적은 오직 생존에만 집중되어 있다. 특히 두번의 은신처를 바꾼 뒤 스필만을 도와주던 사람들마저 피난을 가버린 바르샤바에 홀로 남은 그는 이후 패전중인 독일군의 무차별적 학살을 피해 다시 게토로 숨어들어 이후 목숨을 연명하는 긴 묘사 장면들은, 신사적 이미지의 말쑥했던 한 음악가가 지저분하게 수염이 자란 한 거지의 모습이 되어가는 과정을 아무 소리나 대사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스필만이 독일군 장교 벨름 호젠펠트 앞에서 혼을 담은 연주를 하는 그 장면은, 그 모든 것을 겪고도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피아니스트로서의 영혼의 발현이자 자신과 조국의 슬픔과 한을 담은 선율일 뿐, 영화는 그 장면들보다 더 슬프고 긴장감 넘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로만 폴란스키는 내러티브를 낭비하지 않은채 두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고스란히 유태인의 비극을 전한다. 투쟁이 아닌 참상에 대한 영화인 까닭에 이 영화<피아니스트>에는 극복의 감동이 아닌, 동정과 연민의 전율이 흐른다. 











주연배우 애드리언 브로디는 선한 눈매와 큰 키로 어딘가 불쌍하지만 신사적인 이미지의 피아니스트로 잘 어울렸다. 키 185cm인 뉴욕 출신배우인 그는 이 영화로 2003년 프랑스 세자르 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에서 모두 남우주연상을 받는다. 기다란 얼굴과 코가 인상적이었던 그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몇달전에 봤던 <미드 나잇 인 파리>의 살바도르 달리 역으로 출연했던 적이 있어서 깜짝 놀랬다. 그때 그 달리의 캐스팅을 보고 정말 닮았다면서 혼자 웃었는데 바로 이 배우였다니. 피아노를 마지막으로 연주해본게 몇달이 지났는지 가물가물한걸로 봐서 정말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었구나 싶었다. 게다가 영화속 스필만처럼 고전 클래식을 연주해본 것은 그보다 훨신 더 오래 지났을터이니 군제대후 제대로 연습하지 못한채 집에 방치되있는 내 피아노에게 미안하다. 방학을 맞이해서 다시 악기를 다루고 싶긴한 마음에 이것저것 다른 악기들에 눈을 돌리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피아노라도 제대로 다시 연습해봐야지.

누군가들은 이 영화가 동포의 참상을 외면하고 홀로 살아남으려 애쓴 비겁한 도망자의 생존기이기 때문에, 세간에서 평하는 만큼, 그리고 5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비롯하여 영국과 미국 아카데미와 프랑스의 세자르 영화제에서까지 많은 상들을 휩쓴 이 영화에 대한 높은 평가를 이해하지 않으려하는 경향이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기록영화에 가깝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보이는 극적인 전개나 스팩터클은 물론 부족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가슴을 뒤흔드는 감동이 부족하다는 평은 무리가 있다. 영화속 스필만은 당연히 영웅이 아니며 또한 그럴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전쟁의 포화에 당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 박해와 공격을 정면으로 받는다면 당신은 정말 영화에서 봐온 것처럼 총구앞에 벽돌을 들고 싸울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살아남기위해 구정물이라도 마실것인가. 역설적이게도, 현실은 영화같지 않으며 이 <피아니스트>는 더 영화같은 생존에 대한 집념의 기록이기에 감동적일 수 있는 것이다.



















덧글

  • 명품추리닝 2012/06/30 15:20 # 답글

    언제나 친절한 영화리뷰 잘 보고 있어요.
    피아노를 다시 연주하시다니, 반갑네요.^^
  • 레비 2012/06/30 20:46 #

    감사합니다 :) 그러고보니 명품추리닝님 피아노 연주하셨죠 ! ㅎㅎ
    당장 연주하고 싶은 곡들 악보 사서 출력해놓았어요 ^^
  • 2012/07/01 02: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비 2012/07/02 13:53 #

    보셨군요 :) 아무래도 전쟁의 참상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보니 피아니스트의 심금을 울리는 연주나, 학대받던 유태인들의 반란같은 반전은 기대하기 힘든 영화였죠 ㅎ 사실 처음 포스터와 제목만을 보고 봤던 영화인데 그 둘이 전혀 매치가 안되서 내용을 쉽게 상상도 못하고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ㅎ 보면서도 설마 이런 내용일지는 짐작도 못했구요 ㅎ 정말 한편의 적나라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고서예요.

    이자벨 위페르의 그 '피아니스트'가 하필 둘다 동유럽(아마도..?)쪽의 영화고, 무엇보다 국내 개봉이 서로 거의 겹쳤던걸로 알아요. 아마 한달 이내차이였나 아니면 같은 계절이었나, 그래서 그 당시 저 역시도 극장가에서 2편의 '피아니스트'가 있어서 영화평을 읽기에도 혼란스러웠습니다 ㅎㅎ 그런데 두 영화는 내용적인 면에서 완전 다른데, 그 친구분과 대단히 혼란스러우셨겠네요 ㅎㅎㅎ

    저야말로 늘 좋은 피드백 감사드려요 ^-^

  • 누누슴 2012/07/03 20:43 # 삭제 답글

    우왕!!! 오늘은 피아니스트닷 ㅋㅋ
  • 레비 2012/07/03 23:47 #

    ㅎㅎ 만족스럽게 읽어셨으면 좋겠어요 :) ㅋㅋ
  • 영화팬 2012/07/14 22:28 # 삭제 답글

    혹시 피아니스트 영화 있으시면 보내줄 수 있나요??ㅜ
    찾는데 너무 없더라구요,,ㅠㅠ
  • 미끄럼틀 2012/09/09 00:28 # 삭제 답글

    저는 정말 아름다운 피아니스트 영화인줄 알았어요. 보고나서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포스팅 중간에도 나오는 장면.. 엎드려있는 사람들 총쏘는 장면에 대한 충격은 특히 심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도 독일군장교 군복걸치고 있어서.. 마지막에 죽는줄 알고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던지 ㅠ 그리고 실존인물이었다는 점에서도 한번더 충격을 받았죠. 여러모로 저에게는 [충격]이라는 단어를 안겼던 영화였어요
  • 레비 2012/09/11 23:48 #

    허헛; 제게도 그 장면은 말씀듣자마자 바로 기억날정도로 강하게 남아있네요. 마지막 한사람을 쏠때 총알이 다 떨어졌는데 장교는 태연히 엎드려있는 사람 머리위에서 총알을 다시 장전하지요? 그때 누워있는 사람은 도대체 제정신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라면 미쳐 발광이라도 했을텐데 말이에요. ㅎㅎ 마지막 장면에서 막 안타까워했던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ㅎㅎ 잘 버텼는데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죠 ㅋ
  • 행인 2012/10/13 23:27 # 삭제 답글

    사슴같은 스필만...초등학교때에 보고 지금와서 이 리뷰를 보니, 스필만이 무력하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껴봅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영혼이 적응해 나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혁명일 수 있을텐데요. 브로디 특유의 코 맹맹하고 울음을 삼키는 듯한 연기가 인상적인 영화였어요..
  • ㅎㅎ 2013/01/22 17:58 # 삭제 답글

    잘 읽었어요! 블로그에 퍼가겠습니다^^
  • 레비 2013/01/23 02:36 #

    감사합니다 ㅎㅎ 하지만 제 블로그는 아마 마우스 왼쪽 클릭이 안되서 퍼가는것이 힘드실텐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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