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 Flims










영화를 보면서 얻는 즐거움 중의 적지않은 수는 우리가 그것이 현실에서도 일어날지 모른다고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과 설렘에 있다. 나의 일상에서도 일어날지 모른다고 믿는 그런 기분좋은 상상. 비단 영화 속 이야기 뿐만아니라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해주는 영화는 그래서 더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가슴 속에 빠르게 흡수된다. 비현실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영화는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다. 지나치게 현실적이면 영화로서의 재미나 흥미가 떨어지고, 비현실적이면 관객들은 허무 또는 황당해한다. 그래서 잘 만들어진 영화라 하는 것은 이 두가지 요소의 적당한 배합분율을 알고있는 영화가 아닐까. 달달한 사랑이야기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많은 부분에 '대리만족'도 그 중 포함된다고 믿는 내게, 세상의 모든 우연한 만남들은 우리가 현실에서도 종종 경험하게끔 해주는 몇 안되는 영화적 장면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속이든 현실에서든, 만남이란 두 인간의 접점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자, 그 서로가 가지고 있던 모든것들을 맞춰보고 공유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만남에 대해 기대하기도, 걱정하기도, 경우에 따라선 두려워하기도 하고, 또는 흥분되고 설레여하기도 한다. 여기 세상의 수많은 만남들과 다름없이 우연히 마주친 한쌍의 남녀가 있다. 마드리드에서 연인과 이별하고 출발 하루 남은 비행기를 타기위해 떠나는 기차안에 있던 미국 남자 제시(에단 호크)와, 개강에 맞춰 파리로 가고있던 소르본느 대학생인 프랑스 여자 셀린느(줄리 델피)는 그들의 '우연한 만남'에 주어진 이 하루를 아름다운 도시 비엔나에 새겨놓는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다.










한 독일인 부부의 시끄러운 말다툼을 피해 기차안에서 자리를 옮기는 그런 우연이 없었더라면 제시와 셀린느는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그렇지않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그런 우연들로 지금 대다수 주변의 사람들과 첫만남을 가지지 않았던가. 이 영화를 허무맹랑한 원나잇스탠드로 말하길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단지 몇 분의 말 몇 마디로 하룻밤을 남녀가 보내기로 약속하고 낯선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는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흔치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일견 타당한 주장이기는 하다. 하지만 제4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최우수 감독상을 받은 이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소재뿐만 아니라 그 구성에서부터 독특한 영화다. 영화는 굉장히 아름다운 영상이나 사랑의 장면들이 직접적으로 묘사됨도 없이, 뚜렷한 클라이막스조차 없이 흐른다. 설정이 비현실적이라하더라도 영화를 채우는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들, 행동들은 오히려 여타 다른 로맨스 영화들에 비해 우리네 현실속의 그것들과 전혀 괴리감이 없다. 나는 이 영화의 가치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본다. 사실 사랑을 말하는 세상의 수많은 영화들에 비해, <비포 선라이즈>는 대단히 밋밋하고 심심한 영화다.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는 처음만난 자리에서 남녀가 나눌수 있는 거의 모든 대사들이다. 사랑과 섹스뿐만 아니라 종교, 사회, 가치관, 심지어 환경문제까지. 현학적이고 현실적인 여자와 순진하고 치기어린 남자의 첫만남은 단순히 대화가 잘 통해서- 로 시작했지만 이들은 서로의 모든 것들을 비엔나 거리를 거닐며 알아가고 사랑에 빠진다. 이들에게 주어진 단 하루는 이들이 사랑에 빠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너무 빠르다고? 하긴, 소개팅을 나가도 애프터, 삼프터라는 말이 보편화되어있는 요즘의 잣대로 이 영화를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그렇게 하룻밤의 꿈으로 끝날만큼 가볍지는 않다.










이 영화는 오롯이 대사로만 이루어져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둘의 데이트 코스는 지금은 영화이름을 딴 비엔나의 특정 관광코스가 되었을 만큼 유명해졌지만 어디까지나 이들은 낯선 도시를 그들의 대화무대로 삼고 걸어갈 뿐이다. 이 영화에서 비엔나라는 도시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다. 영화가 다 끝났을때, 그들이 잠시라도 머무르고 대화했던 장소들을 제시와 셀린느가 더이상 없는 비엔나의 아침위에 카메라는 아쉬운듯 혼자 다시 훑는다. 마치 그들의 자취가 희미하게 남아있기라도 한 양. 셀린느와 제시의 주고 받는 문답들은 감독의 의도하에 편집없는 롱컷이나 몇분씩 지속되는 대사들로 채워져있다. 그렇기때문에 관객들은 그들과 걸음속도를 같이하며 그들의 데이트를 관음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했지만, 이 둘의 하루를 천천히 그대로 따라가는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속 한쌍을, 지금 비엔나에 가면 만날 수 있을법한 한 커플로 만들어 놓는다. 대화들은 로맨틱한 대사들보단 철학적이고 시적인 대사들로 가득차 있다. 그 날이 오기전까지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던 두 남녀의 대화는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강하게 끌리기도 하고, 놀라운 배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비포 선라이즈>의 주연 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감독이 직접 캐스팅했다고 한다. 이 한살 차이 남녀는 마치 정말 그날 처음 만난것처럼 서로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어가는 개방적인 젊은 세대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이 사랑 이야기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시간에 있다. 이 둘의 만남은 전제조건부터에서 이미 제한시간이 있다. 다음날 아침, 그 둘은 불가항력적으로 헤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 둘은 그 흘러가는 시간앞에 초조하지않고 사랑에 빠짐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점점 빨라져가는 세상속에서 사랑조차 그에 발맞춰 속도를 높여가는 요즘 세상에, 뻔히 헤어질것을 알고 다시 만나기 힘들것을 알면서도 찾아온 인연을 마치 영원한 운명의 연인을 만난것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시선과 행동이 이 영화의 한장면, 한장면을 아름답게 해준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도 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로 끝나지 않을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 둘의 시한부 사랑이 짧지만 그 시간안에서 얼마큼 빛날 수 있는지를 지켜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천히 사랑에 빠지기엔 누구보다도 시간이 부족했던 이 둘이지만 둘은 끝까지 조급해하지 않는다. 밤의 한 카페에서 마치 가상의 친구에게 보내는 것처럼 서로에게 전화하는 장면이나, 아침 길거리에서 들려온 하프오르간 소리에 춤을 추는 장면, 손금을 보는 점쟁이를 바라보는 둘의 상반된 시선, 그리고 레코드샵의 청음실에서 음악을 배경으로 서로를 수줍고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1분 여간의 씬 등 영화는 길에서 놀이동산으로, 강변에서 유람선으로 계속 장소를 옮겨가며 둘의 하룻동안의 데이트를 그대로 필름에 옮겨담았다.









이들은 결코 첫눈에 반한게 아니다. 비록 우연한 한번의 만남 안에 사랑에 빠지지만 제시와 셀린느는 하루를 충분히 바쳐 서로를 알아갔다. 하지만 앞선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자신들의 완벽했던 하루가 '구질구질'하게 질질 끌리는 것을 경계했다. 지구의 반대편까지 날아온 제시는 셀린느를 그토록 사랑하지만 다시 만날수 있을까라고 하는 그녀의 질문에 현실적으로 힘들것 같다고 말하며 그냥 남은 시간을 충분히 즐기자고 한다. 무책임한건지, 자유로운건지 - 제시의 저런 마인드에 적응하기란 영화 내내 솔직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플랫폼에서 울먹이며 껴안은 둘은 끝내 약속을 하고 만다. 그리움과 오해만 쌓일 연락처 교환은 마지막까지 하지 않은채로. 그리고 6개월 뒤에 만날 것을 약속한 이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정말 6개월 뒤에 만났을지에 대한 해답을 관객들은 9년 동안 기다려야했다. 그 이야기는 2004년 영화, <비포 선셋>의 이야기를 위해 남겨둬야겠다.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줄리 델피의 이것.

" You know, I believe if there's any kind of god, it wouldn't be in any of us, not you or me. but just this little space in between. If there's any kind of magic in this world, it must be in the attempt of understanding someone, sharing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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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루얼 2012/06/22 21:06 # 답글

    아무리 딱 하룻밤 동안이라도 저렇게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상대라면 저라도 사랑에 빠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포 선라이즈랑 비포 선셋은 봐도봐도 질리지 않은데, 오늘 한번 더 보고 싶네요 ㅎㅎ
  • 레비 2012/06/22 21:39 #

    전 사실 남동생이 추천해서 보게된 영화예요 ㅎㅎ 둘다요 ㅋㅋ 보기와 다르게 로맨틱 영화만 챙겨보는 동생덕에 알게되었죠..ㅎㅎㅎ 현실에서 일어날수도 있을것같은 뭔가 판타지일거란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정말 일어난다면 참 로맨틱한 일일 것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ㅎ 주위에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영화더라구요 :)
  • minha 2012/06/24 07:45 # 답글

    몇일 전에 DVD사왔는데, *____* ..
    줄리델피가 한곡 뽑았던 waltz for a night가 먼저 좋아서 연습하고 있었어요!
  • 레비 2012/06/24 11:29 #

    저도 이건 DVD로 사둬야겠네요 ㅎㅎ
    아 그 비포선셋의 마지막에 불러줬던 곡말인가요?! 노래 제목도 따로 있었다는걸 덕분에 알았네요 ㅎㅎㅎ
    연습이시라니... 기타+보컬로요?! 들어보고 싶어요 ! ㅋㅋㅋ
  • 설링 2012/06/24 21:55 # 답글

    전 띠링띠링 손전화 거는 씬이랑 마지막에 둘이서 갔던 장소를 보여주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치만 비포선셋은 개인적으로 별루...^^; 였어요.
    조만간 3탄?도 나온다던데, 제가 흐리멍텅하게 들어서 명확히 기억이 안나네요..ㅠㅠ
  • 레비 2012/06/25 02:03 #

    마지막에 둘이 다녔던 코스를 그대로 답습하는 카메라는 정말 센스가 좋았다고 생각해요 :) 둘은 떠났지만 둘의 사랑은 마치 그 자리에 계속 온기를 두고 남아있는 것같은 느낌이랄까요 ㅎㅎ

    <비포선셋>은 제가 봤을때 거의 다른 영화로 봐도 무방할것 같아요. 스토리는 이어지지만 제시도, 셀린느도 변했고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도 <비포 선라이즈>와 다르죠 ㅎㅎ

    그런에 3탄이 나온다니 ! 흥미롭네요 ㅋㅋ 과연 어떤 내용일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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