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 2006 Flims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친구 중 한명은 향수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와인과 관련된 일을 해왔던 경험 때문에, 그리고 꾸준히 취미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각보다도 후각에 더 비중을 두고 계속 그 민감함을 유지해야하는 상황하에 오래 지내다보니 후각에 방해가 될 뿐인 향수를 안쓰는 것이 습관화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친구의 향수를 분명히 식별하고 인식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각자 고유의 자연적인 '살아있음'의 체취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않았던가. 난 바로 그 향을 분명히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그게 어떤 향인데-라고 물어올 때마다 뭐라고 뽀족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어떤 냄새' 혹은 '무슨 향'이라고 묘사하는 것처럼 연인의 체취를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야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의 난 그저, '내 여자친구의 향수'라고 혼자 이름 붙여두고 혼자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에게 있어선 이러한 난제들이 그가 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것 같다. 세상 모든 향기를 맡고, 식별하고, 기억하고, 섞고, 인식할 수 있으나 정작 '자신의 냄새'는 갖지않고 태어난 한 남자. 그렇게 고독하게 태어난 한 남자의 일대기이다. 처음엔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라는 부제 덕택에 시드니 샐던 류의 추리소설을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 이야기에선 살인자를 쫓는 추격전도, 증거도, 흉기도, 심지어 살인자를 체포하는 순간의 클라이막스도 없다. 아니, 그 모든 것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원작 소설에서는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낫겠다. 여기에서 스물다섯이라는 희생자의 숫자는 큰 의미를 잃는다. 원작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영화 역시, 그르누이의 살인의 동기만을 부각시킬 뿐, 살인의 그 세세한 장면묘사는 빠르고 짧게 지나갈 뿐이다. 오히려 살인 이후의 일련의 작업들이 - 상상초월의 '인간 향수 짜내기' - 더 세부적으로 묘사 된달까. 영화에 등장하는 그르누이 주위의 인물들 역시 살인자 그르누이보단 '냄새'라는, 그르누이와의 공통분모를 갖고있었을 뿐이며 그르누이의 바로 그 향수의 마지막 한 조각이었던 자기 딸을 필사적으로 지키려했던 앙투안 역시 허무하게 딸을 잃을 뿐, 그르누이의 목표에 아무런 방해도 미치질 못하였다. 출생부터 시작하여 마치 신이 보살펴주는 듯한 행운들의 연속으로 극적 전개를 거듭해온 그의 인생은 처형대 앞에서 그의 마지막 네잎클로버를 사용한 듯 보인다. 바로 '그 향수'로 세상을 지배하는데 성공하며 그와 함께 이 영화도 절정에 이른다.



영화<롤라 런>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독일 감독, 톰 티크베어는 뛰어난 원작 소설을 시나리오로 삼은 영화들의 망한 사례들을 경계한 티가 역력하다. 각색에만 2년을 투자했다는 이 영화는 비록 그로인해 비난을 면치못하기도 했지만 나름 하나의 뛰어난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물론 오락성에도, 그렇다고해서 소설의 원작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방향을 명확히 하지못한 점은 아쉽지만, 텍스트의 묘사들을 영상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은 소설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유혹으로서 영화가 어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올랜도 블룸을 제치고 그르누이 역에 벤 위쇼를 낙점한 감독의 판단은 절대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한다. 벤 위쇼의 신비롭고 어딘가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매력은 그르누이라는, 잔인함보다는 목적을 향한 광기에 더 가까운 캐릭터를 잘 살릴 수 있었다.















뛰어난 소설을 시나리오로 삼은 영화의 드라마틱한 전개는 나무랄데없지만 이것은 한 남자의 특별한 일대기일 뿐, 허무에 가까운 결말에서 오히려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하고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이 이야기는 '냄새'와 '살인'이라는 소재를 독특하게 버무려서 살인자 그르누이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둔 것일까 아니면 그 주위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 한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것일까. 둘 다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자는 그가 거쳐갔던 인물들의 짤막한 후일담으로 어느 정도 판단해 볼 수 있다. 고아원으로 무두질공장으로 그르누이를 7프랑에 팔아넘긴 여자, 그를 다시 주세페 발디니에게 30프랑에 팔아넘긴 남자. 그리고 그를 그라스로 떠나보낸 주세페 발디니. 향수공장의 주인남자. 등 그르누이가 거쳐간, 아니 자신들의 삶에 이 냉정하고 저돌적인 살인자의 방문을 조금이라도 허락했던 이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비참하게, 전혀 의도하지않은 방향으로 죽어간다. 하나같이 이들은 탐욕적이거나 정도를 벗어난 인물들로 암시되어 묘사되었다. 그르누이처럼 살인과 같은 중죄를 범한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상하게도 그의 조연이 되었다. 그것은 설마 이 작품이 그르누이의 살인행위를 정녕 합리화시키기 위해서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들과 그르누이의 차이점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해보기 위해 다시 첫번째 경우를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전자의 경우는 어디에 있을까.














그르누이의 시선을 따라갈수 밖에 없는 이 영화에서 우리는 살인에 대한 혐오와 잔인성보다는 자신의 목적을 향해 모든 것을 팽개치고 전념해나가는 살인자를 만날 수 있다. 세상사를 초탈하고 초월한 듯한 이 주인공은 오히려 그러한 점을 목적달성의 이점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 영화의 백미는, 처형대에서의 그의 승리가 아니라 바로 첫번째 살인 후 '사람 냄새'와의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단순히 새로운 냄새에 대한 욕구, 고민보다는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최종적 목표를 가지게된다. 바로 그 향기를 소유하는 것. 그래서 발디니에게 전설의 이야기를 듣게 된 그는 비록 가지게되면 잃고말것을 알지만 이미 한번 한 여자를 살해하고 그녀의 향기를 맛본 그를 저지할 수 있는것은 없었다. 그르누이의 삶은 분명 비참하고 지탄받아 마땅한 살인자의 삶이다. 하지만 벤 위쇼가 연기하는 그르누이가 잔인하고 냉혹한 살인마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가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성취한 모습을 세상에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다보면 그르누이의 살인 행각은 마치 어느 악취에 우리의 코가 취하고 마비되듯 갈수록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영화가 다른 여러가지 화려하고 잡다한 향수들에 의해 관객들의 '코'가 진정 '그 향수'를 맡지 못하게 될까봐 배려한듯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처형장 주위의 군중들처럼, 향수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이고 그르누이의 세상을 향한 지배도 다음날 아침이면 사라지고 만다. 영화 속 그르누이의 향수는 살인과도 같은 죄악 조차,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자 앞에 선 분노의 아버지조차 무릎꿇게 만들만큼 강력한 환상이자 허상이다. 하지만 그 향기는 마약처럼 이내 사라진다. 그르누이는 처형대위에서 자신이 향기로 지배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처음으로 그 향을 '경험'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물 흘린다. 그것은 그 첫번째 희생자가 된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그 향을 영원히 소유하려했으나 그 향에 불멸성은 없음을 깨달은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레이션에도 이어지듯 세상을 지배하는 향수를 얻게되었지만 영원히 사랑할 수도, 영원히 사랑받을 수도 없음을 알게된, 냄새가 없는 남자 그르누이는 그렇게 스스로를 한 줌 향기로 흩뿌려놓는다. 순간의 향기에 취한 세상을 지배할 수는 있었지만 영원함은 없었다. 뛰어난 텍스트를 가지고 감독이 전작 <롤라 런>에서도 보여주었던 슬로우 모션씬들의 아낌없는 활용 덕택에 흥미로운 스릴러 영화로 재탄생한 이 영화는, 원작을 사랑하는 팬들에 의해 충분히 비난받을 각오는 되어있는듯 하지만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드러난 뛰어난 각색은 칭찬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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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루얼 2012/06/19 01:24 # 답글

    전 오로지 벤 휘쇼를 보기 위해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 배우를 좋아하다보니 그가 연기한 그르누이도 그리 밉지 않더라구요. 그르누이가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줄 알았더라면 이런 사단도 나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의 향기를 영원히 내 곁에 둘 수 있잖아요...그걸 모르는 그르누이가 너무 안 됐더라구요ㅠ_ㅠ흑흑 아무래도 휘쇼가 저의 이 동정심을 이끌어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지 않았나 싶네요. 올랜도 블룸이 했으면...음......
  • 레비 2012/06/19 19:14 #

    아 루얼님은 알고계신 배우였군요... 전 몰랐어요. ㅎㅎ 그런데 올랜도 블룸이 원래 먼저 캐스팅 후보였다는걸 듣고 영화를 보다보니 자꾸 겹쳐져서 ㅠㅠ ... 이미지가 많이 비슷하지도 않은데 말이죠..
    영화 하일라이트에 그래서 그 첫번째 여인과 사랑하는 환상을 보게되는 것은 뒤늦게서야 그 점을 깨닫는게 아닐까 싶어요. 확실히 책이나 영화에서 모두 그르누이는 미운 캐릭터가 아니죠 ㅎㅎ 책도 재밌게 읽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니 영화도 마음에 들더라구요. 다만 자꾸 책이랑 비교하는 사람들에게선 혹평을 받는듯해보였어요.
  • 미카엘 2012/06/21 16:55 # 답글

    내 기억이 맞다면 첫 장면이 동네 어시장 부근이었을거야, 그르누이 탄생 장면을 담고 있던 그 장면의 그로테스크한 미학은 정녕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아. 또한 죽은 여인으로부터 향기를 가져가는 (혹은 사라져가는 향기에 대한 집착적인 행동이었는지 기억이 가물하던) 장면도 개인적으로 평하기에 압권. 앞서 포스팅에 언급한대로 텍스트를 영상으로 짜내는데 탁월했던 작품으로 기억에 남더라.
  • 레비 2012/06/22 15:11 #

    텍스트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제하고 오히려 영상으로 강조하기 유리한 부분들을 각색해서 부각시킨점은 좋은데 오히려 이 점때문에 혹평도 받고 있어서 아쉽. 감독이 작가로부터 영화제작에 필요한 허가를 따기위해 꽤 오랜시간 공 들였다는데, 작가는 과연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하구먼.
  • 누누슴 2012/06/21 23:27 # 삭제 답글

    책보고 영화봤는데 마지막 그 군중씬은 ....와하우
    위에님 댓글보고 알았는데 올란도 블룸이라니...이것 또한 와하우
  • 레비 2013/01/11 22:35 #

    안녕하세요 누누슴님 ㅋㅋ 닉네임이 인상적이네요 :) ㅋㅋ 저도 책보고 영화를 봤기에 - 이런 장면들이 어떻게 스크린에 비춰질까 하는 궁금함들이 더 컷답니다. 올랜도블룸보다 벤위쇼가 더 나은 캐스팅이라고 생각해요 ㅎㅎ
  • 그리다 2012/06/27 23:01 # 답글

    책도, 영화도 굉장히 인상깊었어요~ 프랑스에 살고 계신, 향수를 좋아하는 지인과도 이 소설로 이야기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강렬한 작품이예요ㅎㅎ

    오랜만에 괜찮은 리뷰를 읽어 기분이 좋네요:)
  • 레비 2012/06/28 00:14 #

    저도 책과 영화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 향수라는 소재, 냄새라는 매개를 이렇게 활용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시나리오와 글, 모두 대단한것같아요.

    제 글을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 initial N 2012/06/30 00:47 # 답글

    소설도 중간에 도저히 안넘어갈 정도로 지루한 부분이 있긴 했어요.
    그리고 영화를 소설로 그대로 만들었다면 그건 19금이 아니라 24금....
  • 레비 2012/06/30 14:03 #

    소설은 한 3년전쯤 읽고, 영화는 올해 본거라 잘 매치가 쉽지않기도 했어요 ㅎㅎ
    확실히 소설에 비해 캐릭터들도 많이 제하고 여러 장면들도 빼긴했죠 ㅎ 각색이 갖는 힘이 오히려 영화를 살린듯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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