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6 , 2004 Flims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숫자 2046 이 97년 이후 50년만에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는 바로 그 2046년을 의미한다는건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정치적 이야기보단 사랑 이야기를 쓰고싶었던 왕가위 본인은 이 숫자가 <화양연화>의 그 객실 번호로 읽히기를 바라는듯 하지만. 2000년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은 왕가위의 <화양연화>였다. 그리고 4년뒤,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을 들고 다시 찾아온 왕가위는 <2046>을 선보였다. 얼핏보면 <2046>은 왕가위 감독이 작정하고 만든 자신의 컴필레이션 필름처럼 보인다. '왕가위의' 양조위가 주인공 차우로 다시한번 등장하고,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수리첸의 모습 그대로 스쳐지나가며, 한편으로는 <아비정전>의 루루(류자링)가 그곳에 있다. <중경삼림>의 왕비가 또 한번 양조위의 마음을 흔들고, <화양연화>의 그 객실 2046호의 옆방, 2047호에 차우는 머문다. 누가봐도 <화양연화>의 후속작, 혹은 속편으로 읽히기 쉬운 영화였다. 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왕가위는 이를 의뭉스럽게 부정했다. 그는 외려 <2046>의 에피소드 중 하나가 <화양연화>로 구체화되었다고 말하며, <화양연화>가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면 <2046>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 라고 했다.










영화는 1966년을 배경으로 하고있지만 한편으로는 2046이라는 가상의 미래세계도 그리고 있다. 2046은 차우가 써내려가는 소설의 제목이자 그가 그리는 미래이기도 하다. 미래의 사람들이 기억을 되찾기위해 찾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공간 '2046'. 그곳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1960년의 캐릭터들이 모두 옛 사랑을 그리워하고 추억하는것만큼, 미래의 2046 역시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1960년대와 다를 바 없게 된다. (+ 국내기업 LG의 과도하고 어울리지도 않았던 PPL광고로 인해 2046의 황량한 미래사회에서 졸지에 우리는 LG의 로고를 여러번 볼 수 있다.) 영화는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두번 다시 이런 캐스팅들을 한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화려하다. 중국의 장쯔이, 공리, 류가령, 왕비(왕정문). 홍콩의 양조위, 장만옥. 대만의 장첸. 일본의 기무라 타쿠야 등 한국 배우가 빠진게 아쉬울 정도로 왕가위 감독은 동아시아권 배우들을 끌어모았다. 기존 3편의 에피소드로 나뉘어 구상된 영화라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수도 있는 영화지만 유명배우들을 차례차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운 영화다.














반가운 얼굴, <화양연화>에서 애절한 사랑을 간직하고 떠난 지순한 남자 차우(양조위)는 <2046>에 다시 돌아오지만 그는 이미 예전의 차우가 아니다. 물론 그는 과거 <화양연화>에서 수리첸(장만옥)과의 이뤄지지 못한 슬픈 사랑을 간직하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기억 장면 덕분에 <2046>이 <화양연화>의 후속작이라는 확신들이 퍼져나갔다. 드러내놓고 영화는 그 차우가 이 차우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2046>에선 더이상 2046호가 아닌 2047호에 머무는 차우는 수리첸과의 사랑에 소심하고 대담하지 못했던 그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화양연화>의 애절함을 기억하는 관객들이라면 실망을 할 수도 있을만큼 바람둥이처럼 등장한다. 콧수염을 기르고 돌아온 그는 옆방 2046호에 투숙하게된 콜걸 바이링(장쯔이)에게 관심을 갖게되고 곧 둘의 가벼운 관계가 지속된다. 하지만 바이링과 달리 차우는 그녀를 육체적 관계 그 이상으로 보질 않고 실망한 그녀는 결국 떠난다. 택시 뒷좌석 씬과 같은 <화양연화>에서 봤던 익숙한 장면들이 바이링을 통해 반복되지만 차우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첫번째 여자를 떠나보낸 차우는 이제 호텔 주인의 딸 왕징웬(왕비)와 가까워진다. 그녀는 이미 일본인 남자친구(기무라 타쿠야)가 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못한 비련의 여자다. 처음엔 그 남자친구의 편지를 대신 받아준다는 조건으로 그녀와 가까워진 차우. 이내 함께 소설을 집필하면서 차우는 그 왕징웬과 함께 했던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여름'이라고 독백한다. 중경삼림의 한쌍을 다시 보게된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나는 여기서 차우에게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한 여자만을 바라보다 안타깝게 떠나보내고 그 기억을 추억하는 것이 왕가위 영화의 전형적 레파토리였다면, 이 영화에서의 차우는 이 여자 저 여자를 옮겨가며 가볍게 사랑을 속삭인다. 감독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바뀐건가라고 의심할 정도로 그건 내게 더이상 <화양연화> 마지막 씬, 앙코르와트의 석벽 구멍 안에 자신의 사랑을 영원히 봉하려했던 차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왕징웬과의 사랑도 더 이상 이뤄지지 못한다. 그녀는 일본의 남자친구를 잊지못했고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그녀를 남자친구와 통화시켜주기도 하며 (재미있게도 차우가 그녀를 데려가서 통화시켜주는 신문사는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일했던 바로 그 신문사라는 것을 유리벽에 쓰여진 영단어로 알 수 있다. <화양연화>에선 유리벽 안에 있었지만, <2046>에선 유리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영화는 이런식으로 <화양연화>에 대한 은유를 끊임없이 가져온다.) 그의 소설 '2046'을 통해 왕징웬과 그녀의 남자친구를 가상으로 만나게 해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차우가 들어설 곳은 없었고 이렇게 두번째 이야기는 또 헤어짐으로 끝난다. 


차우는 이제 1963년으로 회상해 들어간다. 홍콩이 아닌 싱가포르로 간 그는 바로 <화양연화>가 끝나는 시점의 그다. (<화양연화>의 시간적 설정은 1962년이다.) <화양연화>에서 그는 수리첸(장만옥)에게 싱가포르로 함께 떠나자했었고, 수리첸은 거절했었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카지노에서 차우는 또 한명의 수리첸(공리)를 만난다. 모든것이 비밀스러웠던 그 새로운 수리첸은 함께 떠나자는 차우의 '이미 본듯한 사랑고백'을 슬픔속에서 거절한다. 그리고 차우는 이 수리첸에게는 포옹이 아닌 격정적인 키스로 이별을 대신한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이 영화 <2046> 가 왕가위 영화 답지않다고 생각한 내가 실수했다는걸 깨달았다. 영화의 첫 나레이션과 마지막 장면은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 즉 구멍에 기억을 봉하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가상적 목적지인 '2046'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그리움이다. 차우가 여러 여자들을 만나면서 가볍게 사랑을 말한다고 실망했던 나였지만 사실 누구보다 과거를 기억하고 잊지못한 것은 차우였다. <화양연화>에서의 수리첸을 잊기위해 야한 소설을 써서 번 돈으로 여자들을 만나고 바이링과의 관계에서도 더 이상의 무게를 두지 않는 것은 그가 한군데 마음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가정과 집이 있던 <화양연화>에서의 차우와 달리 <2046>에서의 차우는 호텔 2047호에 홀로 살며 어딘가 불안정하다. 그는 왕징웬과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음을 알고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말한다. 그의 소설 속에서 왕징웬을 대변하는 인조인간은 사랑이 지나간 다음에서야 그것이 사랑임을 인지하고 그리워하는 캐릭터다. 그것은 바이링을 상대로 가벼운 쾌락만을 추구했던 차우 자신에게 쓴 말이다. 같은 맥락으로, 싱가포르에서의 수리첸에게 과거를 잊으면 찾아오라고 한 차우의 대사 역시 사실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 된다. 결국 <2046>의 차우는 내가보기엔 바뀔만큼 바뀌었다 싶지만 결국 내가 아는 차우 그대로이다.


그런 경험들이 있다. 돌이켜봤을때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알수 없게된, 실루엣으로만 기억속에 남아있는 장면들. 이미 기차는 떠나가고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지만 누구나 과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향수는 간직하고 있다. 2046이라는 가상의 미래를 가져와 왕가위는 어쩌면 2046년, 중국과의 약속이 시간을 다한 홍콩의 변화된 모습 속에서 지금의 홍콩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생각해봤던 건지도 모른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랑을 붙잡으려고 하는 차우의 노력들은 이 영화에서 모두 공허한 손짓이 되고,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바로 그 택시 뒷좌석에서 그는 홀로 몸을 뉘인다. 저주스럽게도 그가 이번에도 귀결되는 곳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의 침잠이다. 












사실 <2046>은 왕가위의 대표작이라고 내놓을 정도로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기무라 타쿠야가 2046년에야 완성되는거 아니냐고 말했을 정도로 촬영당시부터 문제가 있었고, 애초에 화양연화보다 먼저 계획된 채 수정되 가며 완성된 영화이니만큼 옴니버스의 자취가 여전히 묻어있다. 게다가 마치 한 가수의 정규앨범이 아닌 베스트 모음앨범 같은 느낌이고 자신의 여러 영화들을 끌어모아 집대성한, 새로운 관객들이 아닌 기존의 팬들을 위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새로운 메세지를 던지려 하기보다 역시 일관되게 그가 말해오던 메세지를 이 영화에서도 계속 이어간다. 여러개의 이야기들이 축을 이루는 와중에 좀 더 차우의 캐릭터가 무게를 잡고 중심에 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왕가위의 팬이라면 모를까, 이 영화로 그의 전반적인 영화들을 모두 맛보고자하는 선택이라면 피하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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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자주빛 하늘 2012/06/09 20:30 # 답글

    사실 한 번 보고는 잘 모르겠더라구요ㅜ 화양연화의 각인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 레비 2012/06/09 20:49 #

    저도 사실 한번 보고 적은 포스팅은 아닙니다 ^^; 어려웠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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