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Black Swan, 2010 Flims











2011년 2월, <블랙 스완>에 17년전의 그 마틸다는 거기 없었다. 너무나도 강렬한 데뷔 덕에 마틸다의 이미지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던 그간의 행보에 종지부를 찍듯, 나탈리 포트만은 이제 니나 세어스가 되어있었고, 2011년 제83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이견은 없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블랙스완>은, 그러나 나탈리 포트만을 위한, 그녀만이 이끈 영화는 아니다. '20세기 폭스'가 아닌, 그 산하 에술 인디 영화 배급사인 '폭스 서치라이트'의 영화치고 화려한 캐스팅이 일단 배우들의 연기력에 대한 우려를 잠재운다. 뱅상 카셀, 밀라 쿠니스, 위노나 라이더, 바바라 허쉬. (개인적으로 밀라 쿠니스, 바바라 허쉬의 연기도 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둘다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영국 아카데미는 바바라 허쉬를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영화를 빼어나게 만드는 요소는 바로 시나리오에 있다. 이미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단일 플롯으로 끌고가지 않고 한명의 주인공(니나)위에 여러개의 시각들을 겹쳐놓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말이 많다. 니나의 내면에서 흑조와 백조로 대변되는 두 자아의 갈등, 엄마 에리카와 발레단 감독 토마스의 대비로 표현될 수 있는 소녀와 여성의 경계에 선 억압된 성적 욕망의 표출, 과거에 자신이 동경했던 늙은 여배우 베스와 경쟁자이자 닮고싶어 하는 자유분방한 동료 릴리로 대조되는 니나의 여성으로서의 지향점 등등, 이 영화는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이야기를 해석하고 이끌어낼 수 있는 영화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해석이 분분하고 통일된 영화평을 찾아보기 힘든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때 일수록 내가 취하는 자세는 간단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것까지 애써 찾으려 하지말고 일단 보이는 것부터 차근차근 눈에 담는 것 말이다.













영화의 주된 스토리는 다른 드라마나 이야기에서 이미 몇번은 봤을법하다. 발레 극단에서 단 한명을 위한 주인공 자리를 놓고 극단원들이 경쟁을 벌인다. 우리의 주인공은 재능있고 성실하지만 수완이 부족하다. 그녀는 약간의 행운과 의지로 주인공의 자리에 한발씩 다가가지만 만만찮은 경쟁자, 혹은 동료를 만난다. 그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진부하다해도 사실 변명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속해있는 뉴욕 발레단의 감독 토마스(뱅상 카셀)는 새로운 시즌을 맞이해 각색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계획한다. 그가 찾는 백조 여왕은 순수한 백조와 욕망의 흑조, 1인 2역이 모두 가능한 사람이어야 한다. 순수하고 순결한 이미지의 니나는 백조라면 적격이지만 흑조까지 연기하기엔 그녀를 억압하는 스스로의 자기통제는 지나치게 강하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다 큰 딸을 여전히 소녀처럼 다루고 키우려는 그녀의 엄마 에리카(바바라 허쉬)가 있다. 니나에게서 흑조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녀를 여왕역에 낙점한 토마스는 그녀 내면의 흑조를 깨우려 니나의 욕정을 자극하려하지만 집안에서는 엄마인 에리카가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여전히 온실 안의 화초처럼 키우려하며 그 사이에서의 니나는 혼란에 빠진다. 그러던 중, 이미 늙어 은퇴를 앞둔 단원이자 니나의 우상이기도 했던 벨라(위노나 라이더)가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여 사고를 일으키고 그 모습에서 니나는 주인공의 자리에 오르는 것, 토마스의 뜻대로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펼쳐보이는 것에 대해 망설이게 된다. 거기에 새로운 단원이자 니나의 여왕자리를 위협하는 라이벌이기도한 릴리(밀라 쿠니스)의 등장은 쉽사리 내면의 흑조를 깨우지 못하고 있던 니나에게 자극제이자 부담으로 동시에 다가온다. 토마스는 그녀에게 릴리를 자주 비교하고 언급하면서 완벽하지도, 통제되지도 않았지만 릴리의 그 자유분방함을 니나에게 요구한다. 순수한 의도로 다가온 릴리의 호의에 니나는 일탈과 욕망에 조금씩 눈을 떠가고 마침내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날, 그녀는 자기를 구속하고 있던 '그 무언가'를 죽임으로서 흑조, 즉 블랙스완을 완벽히 이뤄낸다.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핸드헬드 촬영 카메라에 있다. 영화에는 유독 주인공 니나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장면들이 많고, 그녀의 이동에 맞춰 얼굴 정면보다는 뒤통수를 화면에 잡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점은 니나의 시야를 관객들이 함께 공유하게끔 해주며, 집안이나 거리의 골목길들, 극장의 복도 등 좁은 공간에서의 긴장감을 표현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니나의 시야에 따라 카메라도 회전하며 영화 내내 불안정한 그녀의 심리상태를 관객이 함께 호흡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마지막 하일라이트인 백조의 호수 초연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시선보다는 무대위에서 직접 같이 뛰거나, 혹은 백스테이지에서의 긴박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괴기스러운 장면이 많이 없이도 영화의 분위기를 공포스럽고 어딘가 쉽게 무너질듯한 불안감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던 것은 이런 카메라 촬영 덕택이 아닐까 싶다.









첫 오디션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안고, 토마스를 찾아간 니나는 그에게서 늘 완벽해지려고 자신을 통제하지만 스스로를 풀어주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에 니나는 완벽해지고 싶어서 그랬다고 답한다. 자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관리하면서 얻어지는 완벽함. 그것이 그녀를 이상적인 백조로 만들어왔다. 하지만 토마스는 통제만으로는 완벽함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흘러가는대로 맡길 수 도 있어야 완벽함이 발현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내내 그녀에게 떨어진 지상 과제가 된다. 영화를 처음봤을 때, 토마스의 저 말은 사실 니나에게 뿐만 아니라 내게도 공허하게 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주위에서 '노력'으로 성공하는 사람과 더불어 별다른 노력 없어보여도 물 흐르듯 승승장구하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 중에는 '어쩜 저렇게 살 수가 있지' 싶을 정도의 철저한 자기관리에 오직 공부밖에 모르는 자세로 일관하며 높은 성적을 유지하는 친구가 있는가하면,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면서' 높은 성적을 유지하는 친구도 있다. 흔히 요령이라는 단어로 쉽게 치장되는 이들의 방법에는 전자들과 같은 통제력이나 완벽함은 떨어져 보이지만 자연스럽고 자유분방함이 있다. 이것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자의 경우가 잘못된 길은 결코 아니다. 다만 자신을 적당히 풀어주고 욕구를 채워가면서도 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발레라는, 연기라는 행위예술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표현력은 전자보다는 후자의 길을 택했을때 보다 더 폭넓은 범위를 수용할 수 있다. 니나는 자신이 완벽한 발레리나가 되는 길은 통제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마스의 생각은 그녀와 달랐고, 릴리를 통해 니나는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흑조와 백조라는 강렬한 대비로 인해,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니나 주변의 다양한 캐릭터들의 대조로 인해 이 영화는 종종 이분법에 대한 영화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조되는 요소들은 니나가 완벽으로 향해가는 과정에서 그녀가 중심을 잡고, 그녀의 '각성'을 돕는 요소들로서 소비되었다고 본다. 나탈리 포트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라고 했지만, 니나 세어스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영화는 맞다. 그래서 억압과 개방, 절제와 분출, 순결과 욕망은 니나를 변화시켜 나간다. 영화는 이미 직접적으로 많은 상징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검은 옷을 입은 또 다른 자기 자신과 길에서 마주쳐 지나가는 모습이나, 연습실 거울속의 전혀 다른 행동의 자기 모습 등 그녀는 공포영화에서나 볼 법한 환상들과 마주한다. 그런데 유독 그 환상들은 자기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 두말 할 것 없이 그 환영들은 그녀 내면의 흑조이자 자신의 절제력에 웅크리고 있던 욕망의 형상화다. 영화에는 발레연습실이라는 공간적 특성 탓도 있지만 거울이 많이 등장한다. 우리는 평소에 거울을 바라보면서 그 속의 내가 나와 같을 것이라는 당연한 기대를 하면서 보곤한다. 하지만 자기 내면에서 꿈틀대는 흑조를 느끼면서 니나에게는 더 이상 거울속의 자신이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영화속 거울들은 니나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순간들의 체크포인트가 된다. 거울 뿐만 아니라 그녀의 등에 주기적으로 생기는 발진같은 상처들은 결국 검은 날개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여주었고, 점차 엄마에게 반항하는 니나의 행동들도 스스로 내면의 욕구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중간중간에 니나가 욕망에 더 솔직해 질때마다 그녀의 피부가 조류의 그것으로 일순간씩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릴리와 클럽에서의 일탈을 감행할때도 등장하지만, 그날밤 상상속에서 릴리와의 섹스를 할때도 그녀의 몸은 계속 조금씩 변화한다. 물론 그날 밤의 환상으로 인해 니나는 릴리를 라이벌이자 위험 인물로 오해하지만 이것은 망상이었다. 분장실에서 죽였다고 생각한 릴리는 사실 흑조로의 변신을 마지막까지 억제하고 있던 백조의 내면이었고 유리조각은 다름아닌 그녀 자신의 배에 꽂혀있었다. 그리하여 '블랙 스완'은 백조를 죽이고 공연 마지막 악장에서 화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너도 결국 나처럼 될것이다라고 말하는 '소비되고 버려진' 여배우 베스와, 니나를 낳고 발레의 꿈을 접은채 딸에게 그 꿈을 의지하고 그녀의 방을 소녀의 방처럼 채우고 어린아이 돌보듯 키우는 엄마 에리카는 그녀의 흑조로서의 각성을 저지하는 요인이다. 반면 토마스는 니나를 여왕역에 캐스팅시키고 그녀안의 흑조를 깨우려하며, 릴리 역시 그녀의 억압된 심리를 풀어 헤쳐주려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토마스는 찾아온 니나에게 자신을 놀래킴으로서 관객들마저 놀래킬 수 있고, 그것이 단 몇명만이 가지고 있는 '초월'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걱정하는 토마스에게 말하는 니나의 대사는 "I felt it. I felt perfect. I was perfect." 다. 그녀가 행하는 예술의 완벽함에 대한 갈망과 욕망이 블랙스완으로 표출되어 자기 자신을 삼켜버릴정도가 되어버린 그녀는 토마스의 예언대로 관객들을 모두 사로잡고 그 '초월'에 다다른 것이다. 니나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녀가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니나 혼자만의 외로운 사투이기도 하며, 그래서 이 영화는 한 개인이 자신의 내면안에서 백조와 흑조를 모두 꺼내어놓는 과정을 그린 성장드라마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술에 있어서 완벽함을 꿈꾸는 옛 사람들의 상식을 초월한 노력과 결과물들을, 우리는 비단 영화속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듣고 찾아 볼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이 개인의 파멸을 야기하거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만, 그들의 행보는 완벽에 가까운 예술적 결과물로서 높게 평가되는 경우들을 우리는 신화나 전설처럼 들어 이미 알고있다. 영화 <블랙 스완>은 니나 세어스라는 그 완벽함을 향해 나아간 소녀이자 한 여자의 외로운 여정이다. 흔히 우리는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누군가를 상대로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문장은 그보다 더 자주 들었다. 남이 아닌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백조와 같은 이미 익숙하고 편해진 껍질에 쌓여있어 안주하는 자신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면의 흑조가 반드시 우리를 파멸로 이끌지는 않겠지만, 살아오면서 스스로를 구속하고 억제해온 갈망과 욕망을 드러내는 행위는 우리를 한층 더 '완벽함'에 데려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적어도 그 정도의 희생은 각오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완벽함이라는게 아닐까.


















덧글

  • 잠본이 2012/06/09 10:48 # 답글

    극장에서 보고 단순한 이야기로도 이렇게 치열하고 긴장감 넘치는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었죠.
    참 그놈의 퍼펙트가 뭐길래 사람을 저리 잡나~ 싶을 정도...
  • 레비 2012/06/09 19:10 #

    극중설정이긴했지만 완벽함을 연기하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한 나탈리포트만이 더 대단하더군요 :)
  • 2012/06/09 21: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비 2012/06/10 00:57 #

    엇 당연히 기억나죠 ㅎㅎ 사실 영화관에서 처음봤을땐 그 순간 스쳐지나간 사람이 같은 나탈리포트만일꺼라곤 상상도 못해서 '내가 잘못봤나?' 싶어서 옆에 같이갔던 여자애한테 물어봤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방금 지나간거 누구야?" 이렇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두번째 봤을땐 제대로 집중하고 봤죠 ㅎㅎ

    ㅎㅎ 비슷한 곳이라니 꽤 으슥하고 무서웠겠는걸요 ㅋㅋ? 엇 근데 이게 작년초에 개봉한 영화인데 러시아 다녀오신지 얼마 안되셨나봐요 :)
  • 이석범 2012/06/10 01:31 # 답글

    나탈리 포트만이 왜 흑조였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랄까요? 왠지 이 영화는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궁금해지는 영화라고 생각하네요
  • 레비 2012/06/10 10:13 #

    사실 영화를 처음 보기전에는 나탈리포트만의 캐스팅이 왠지 안 어울릴것같다고 걱정하면서 봤었어요 ㅎ 그런데 실제로 몇년씩 준비했다는게 괜한 말이 아닌것같더라구요. ㅎ 연기력을 폭발적으로 보여준것도 잘했지만 캐스팅 자체도 정확했던것같아요 :)
  • 2012/06/11 05: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비 2012/06/11 23:27 #

    심야로 봤다면 더 무서웠겠는걸요 ㅎㅎ; 딱히 스릴러라고 하기도 뭣한데 영화는 시종일관 음산하고 어딘가 불안하죠 ㅎㅎ 완벽히 의도한것이긴 하겠지만 약간 옛날필름의 냄새가 나는듯한 카메라에, 저런 핸드핼드 촬영과 인물들 표정에 집중한 포커스들이 전체적으로 '오래된 공포영화'의 분위기를 내는것같아요. 처음 영화관에서 봤을땐 사실 100% 다 이해는 안되서 이후 한두번 더 본 영화네요 ㅎㅎ

    위노나 라이더 좋아하시는군요 ! 씁쓸하지만 벨라 역할에는 아주 잘 어울린것같아요 :) 그렇다면 혹시 <처음 만나는 자유> 보셨나요? ㅎ 안젤리나 졸리랑 나왔던 건데..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예요. DVD로도 가지고있죠 ㅎㅎ



    +
    아 링크는 새로 바뀐 주소로 첫 댓글 남겨주셨을때 바로 후다닥 했는걸요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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