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타임즈, Three Times : 最好的時光, 2005 Flims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이름은 자주 들었지만 정작 그의 영화를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의 첫 입문작이 그 감독의 역대 영화들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옴니버스 영화라니. 이런 경우 운이 좋다고 해야하는 건지, 나쁘다고 해야하는 건지 잠시 헷갈렸다. 전자라면 이 한편의 영화로 그가 어떤 영화색을 가진 감독인지 맛볼기에 충분할 것이고, 후자라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사전정보가 빈약한 채로 이런 집대성된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겠다. 영화 <쓰리 타임즈>는 독특한 구성과 허우 샤오시엔의 특유의 짙게 색이 묻어있는 세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다. 특이한 점은 영화에 캐스팅된 남녀 주인공 단 두명이 이 각기 다른 세편의 이야기에 모두 출연한다는 것이다. 이 둘은 대만(타이완)을 대표하는 두 배우, 장첸과 서기다. <적벽대전>시리즈의 손권 역할로 그 날카로운 옆 얼굴라인이 인상적이었던 장첸은 이후 김기덕 감독의 <숨>에서도 이미 접했던 배우였다. 한때 내가 공리와 얼굴을 혼동했던 서기는 중화권 여배우들 중 가장 섹시한 외모를 가졌다는 그녀답게 이 영화에서도 에피소드마다 각각 다른 매력을 뽐낸다. 이 <쓰리 타임즈>는 중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인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2005년, 작품상을 비롯한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다. 서기는 이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지만, 이 영화는 작품상을 주성치의 <쿵푸허슬>에게 내주었다. 이 <쓰리 타임즈>는 2005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PIFF의 개막작을 맡기도 했다.











영화는 각 에피소드마다 부제가 붙어있다. 순서대로 <연애몽>, <자유몽>, <청춘몽> 이 그것이다. 부제만 봐도 각각의 스토리에 대한 힌트를 눈치챌 수 있겠다. <연애몽>은 1966년, <자유몽>은 1911년, <청춘몽>은 2005년의 대만이 배경이 된다. 거의 한세기를 두고 과거로, 미래로 넘나드는 이 '꿈'들 속에서 앞서 언급했듯이 장첸과 서기가 세개의 사랑을 연기한다. 세 편의 이야기간에 모두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배우만 같을 뿐이지 시공간을 초월하는 러브스토리는 기대해선 안되겠다. 장첸은 에피소드 순서대로, 휴가나온 군인 첸,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지식인 창, 사진을 찍는 젊은 청년 첸이 된다. 서기는 역시 순서대로, 당구장 종업원 슈메이, 유곽에 매인 몸인 기녀 아메이, 그리고 간질과 약물로 한쪽 눈을 실명한 클럽 가수 칭으로 변해간다. 두 사람을 언급하는데 총 여섯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에,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후 포스팅에선 그냥 극중 이름이 아닌 '장첸'과 '서기'로 남녀 주인공을 통일해서 언급하겠다.









첫 이야기인 <연애몽>은 세 에피소드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이자, 빠르고 직관적으로 메세지가 와닿는 이야기이다. 감독의 명성에 긴장한 채 영화를 시작했던 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던, 따듯한 미소가 지어지는 동화같은 이야기이다. 수줍어 어쩔줄몰라하는 서기와 첫 마디를 못떼고 그저 마냥 웃기만 하는 장첸의 재회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좋아 어쩔줄 모르지만 아무도 먼저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귀여운 한쌍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마지막 빗속에서 부끄럽게 손을 잡는 장면은 하이라이트. 이 둘 사이에 놓인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뚫고 장첸이 서기를 향해 찾아간다. 처음 당구장에서 마주쳤을때, 서로를 눈으로 훑는 롱테이크씬은 일품이다. 장첸과 서기의 얼굴을 카메라는 조급함없이 천천히 번갈아 잡으면서, 그들의 몸은 눈앞의 당구 게임을 향해있지만 눈으로는 서로가 안보는 곳에서 서로를 관찰하고 주시하는 그 긴 장면은, 처음 만나는 두 남녀의 '첫눈에 느끼는 감정'을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표현해낸다. 마음에 드는 이성과 한공간에 묶였을 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시선과 너무나 닮았다. 이런 롱테이크씬에 익숙치 않던 나는, 영화 시작 10분이 다 되도록 첫 대사가 나오질 않던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점이 허우 샤오시엔의 특징이 아닐까 짐작했다. 역시나 이런 대사없는 롱테이크는 일회용이 아니었고, 이 후 에피소드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영화는 과거로 날아가 <자유몽>이 된다. 일제의 아시아 침탈이 가속화되던 시대, 대만을 지키기위해 요인들을 만나고 군대를 조직하고 글을 기고하는 지식인 장첸과 그가 자주 머무는 유곽의 기녀 서기와의 이야기다. 허나 이 에피소드에서 음성 대사는 없다. 모든 대사는 텍스트로서 중간중간 화면을 끊고 보여진다. 이 점 때문에 집중과 흐름을 느끼기 어려웠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소리는 허락하되 사람들의 '목소리'를 빼버림으로서 세 에피소드들 중 가장 '과거'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60년대에 있다가 과거로 날아간,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이야기라는 설정과 이 '보는 대사'들은 잘 어울렸다. 감독은, 배우들의 입은 비록 움직이지만 소리는 들리지않는 이런 무성영화 같은 편집을 통해 말은 뱉지만 실제로 그들이 말하는 진심은 신분차이로 인해 제한적이 되어버린 상황을 표현하고자 했던게 아닐까. 자유몽에서 말하는 자유는 서기가 꿈꾸는 이상이다. 장첸은 서기를 마음에 두고있지만 그에게 우선순위는 사랑보다 국가와 사회적 대의다. 그녀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라, 유곽에 갇혀있는 그녀가 알리 없는 바깥세상의 소식들이다. 서기의 여동생이 첩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전적으로 도와준 장첸은, 평소의 신념과 다르게 행동했다는 서기의 지적에 모순되는 답변을 한다. 그리고 이 답변은 에피소드 마지막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이번에 용기를 내는 쪽은 서기이다. 그녀는 장첸에게, 신념과 반하더라도 자신의 동생을 도와주었듯이 자신을 데려가줄 수 있냐고 묻지만 대답은 없다. 서로 돌아서 비통한 표정을 짓는 둘 사이에는 시대적, 사회적 제약이 높게 놓여있다.










<청춘몽>은 세 에피소드중 둘 사이의 관계가 가장 가깝고 농밀하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두 남녀는 각자 연인이 있지만 클럽에서의 첫만남 이후 강렬하게 끌린다. 하지만 사랑에 장애물이 존재했던, 앞선 두 에피소드들과 달리 만남의 행위에 있어서 가장 자유로운 이 관계에서조차 그들은 부족함을 느끼고 서로를 그 어느 에피소드보다 더 강렬하게 갈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어떤 구속장치가 눈앞에 없기 때문에 더욱 노골적으로 이 욕망을 표현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시간적으로도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이어지고, 그 사이를 과거의 이야기들이 채워지는 액자식 구성인데다가 각자의 연인들이 등장인물로 섞여 한번에 이해가 다소 버거운 에피소드다. 











각기 다른 독립된 이야기라지만 이 세 이야기가 "쓰리 타임즈"로 묶이게 된것에는 분명 세 이야기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을 가로막고선 장애와 그 극복의 과정이다. <연애몽>에서 둘은 편지 한통과 한번의 당구게임으로 운명처럼 빠져들지만 입대를 해야하는 장첸의 상황과 다른 당구장을 전전하는 서기의 처지에 쉽게 미래를 약속하지 못한다. 그 둘 사이에 남은것은 그저 편지하겠다는 무책임하고 구속력 약한 언약 뿐이다. 장첸은 이미 이 에피소드에서 서기 이전의 다른 여자를 잃었다. 그녀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서기에게 보여진 한낱 종이쪼가리가 되었다. 하지만 휴가를 나온 장첸에게, 또 한번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없다. 장첸은 그러나 이번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서기를 찾아 이 도시에서 저 마을로, 다시 다른 당구장으로 계속 찾아간다. 그가 다음날 아침에 부대로 복귀해야하는 휴가나온 군인이라는 사실은 중요치않다. 그저 한번만 다시 만나고 다시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감정 그 하나로, 그는 자신을 기다리거나 기억이나 해줄지도 모를 여자를 찾아간다. <자유몽>에서는 반대로 서기가 장첸에게 용기를 낸다.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장첸을 통해 듣는게 전부인 묶여있는 몸이지만, 그녀는 평소의 신념과는 달리 자신의 동생의 혼사를 도와준 장첸에게 희망을 걸고 사랑을 구한다. 하지만 <자유몽>의 장첸은 <연애몽>에서와는 달리 사랑보다 사회적 현실에 더 크게 구속된 사람이었다. 1966년의 그 둘은 비록 앞으로 자주 만나지는 힘들지만 그대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면, 1911년의 둘은 전통과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솔직한 감정을 표현해내지 못한다. 반면 2005년의 그 둘에겐 장애물 따윈 없어보인다. 게다가 이번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고 앞선 두 에피소드에서 조심하고 신중했던 신체접촉이나 사랑의 표현은 <청춘몽>에서 모두 발산한다. 서로의 몸을 원하고 언제든 서로에게 다가갈수 있지만 그 둘의 발목을 잡는것은 각자의 연인들이다. 1966년에서 '시간'과 '공간'의 장애물을, 1911년에는 '사회'와 '역사'의 방해를 겪어야했던 이 둘의 사랑은 2005년에 와선 '관계'의 장애를 만난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두 젊음은 타인에게 쉽게 상처를 주고, 결국 서기의 레즈비언 애인은 자살을 결심한다.









영화 <쓰리 타임즈>는 결국 세 이야기 모두 '그리하여 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지 못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최호적시광 最好的時光' 이다. '가장 행복하고 좋은 시간'을 의미하는 이 제목은 나로하여금 또 다른 영화를 연상시킨다. 바로 왕가위의 <화양연화>에서의 '화양연화 花樣年華' 역시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쓰리 타임즈>의 허우 샤오시엔, <화양연화>의 왕가위는 둘다 중화권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왕가위는 어지러운 핸드헬드와 점프샷 등을 애용하는 대신, 허우 샤오시엔은 반대로 차분하고 느릿한 롱테이크를 자주 쓰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인 차이점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공통점은 이 두 영화들은 같은 의미의 제목을 가지고 있을 뿐 더러 그 제목은 내용의 역설이 된다는 점이다. <화양연화>에서 차우와 수리첸의 사랑은 '가장 행복하고 좋은' 시간을 갖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쓰리 타임즈>에서 100년여의 시간을 건너온 장첸과 서기 역시 행복한 사랑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첫번째 에피소드 <연애몽>을 해피엔딩으로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해봤는데, 역시 두세번째 에피소드들로 미루어 짐작컨데 완성된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그 사랑을 위해 극복해야할 장애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몽>에서의 장첸과 서기는 만남을 계속하겠지만 그 둘 사이에는 여전히 군복무중인 군인과 당구장 종업원이라는 직업적 거리감과 시간적 갈라짐이 있다.) 그래서 두 영화는 흥미롭게도 이야기는 미완성의 사랑을 말하면서 제목은 '가장 행복한 시간'을 언급한다. 그것은 어쩌면 행복은 사랑의 결과물보다 그 사랑을 하는 과정 위에 있다는 데에 두 감독이 모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허우 샤오시엔이 왕가위의 영화들 중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에 망설임없이 <화양연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¹는 멋대로 두 감독을 묶어버린 내 짧은 소견에 대한 방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주¹ . 정성일 정우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p.280.





덧글

  • 훌리안카락스 2012/05/26 18:39 # 답글

    저는 젤 앞꺼랑 뒤에께 젤 마음에 들더라구요 ㅋ 젤 뒤에꺼는 밀레니엄 맘보랑 느낌도 많이 비슷하구 ㅋ
  • 레비 2012/05/26 18:55 #

    저도 연애몽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 자유몽은 좀 지루했구요 ㅠ 밀레니엄 맘보는 역시 보진 못했지만 많이 들리네요 :)
  • 알리스 2012/05/27 23:37 # 답글

    개인적으로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을 굉장히 좋아해요. 감독님 영화들이 제게 편하게 다가오는 건 아니지만 보고나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라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카페 뤼미에르'가 가장 보기 힘들었지만 가장 좋았어요.(힘든 과제를 무사히 마치고 뿌듯함을 느끼며 극장에서 나오던 그 경험이 다시 한 번 생각나네요 ㅎㅎ) [쓰리타임즈] 영화평 굉장히 잘 읽었습니다. 레비님 영화평을 읽고나니 다시 보고싶어지네요.
  • 레비 2012/05/28 19:02 #

    허우샤오시엔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들어왔느데 정작 봐야지봐야지-하다가 보게된것은 처음 이었어요. ^_ㅠㅋㅋ <카페 뤼미에르>라니 다음번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로 봐야겠네요 :) 감사합니다 ㅎㅎ
    이 글을 쓰다가 우연히 들어간 알리스님의 블로그에서 프로필 사진보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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