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花樣年華 : In The Mood For Love, 2000 Flims









정성일 영화감독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 왕가위의 <2046>에 대한 부분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제일 먼저 읽었더랬다. 그 파트의 말미에 왕가위의 한 인터뷰가 추신으로 첨언되어 있었는데, 왕가위가 <중경삼림>이 코카콜라라면 <화양연화>는 한잔의 중국 차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영화에 대한 언급도 함께 있었지만 추려 말하자면 말이다.) <중경삼림>을 코카콜라처럼 상쾌하게 본 내게 <화양연화>는 왕가위의 표현대로 차분하고 가라앉은 맛이었다. 2000년 제5회 부산국제 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상영된 바 있으며, 같은 해 제53회 칸영화제에서 양조위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이 영화는 <중경삼림>을 통해 왕가위의 매력을 처음 느끼기 시작한 내겐 다소 무겁게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래두고 보면 볼수록 깊은 맛을 내는 한잔의 중국 차처럼, 이 영화는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DVD까지 구입하여 반복해서 보기를 여러번, 나는 깊은 향을 지닌 영화일수록 리뷰하기에는 꽤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걸 느끼면서 포스팅을 시작한다.












영화 <화양연화>는 처음 등장하는 두 문장으로 구성된 텍스트에서 사실 영화 속 이야기를 전부 말해버리고 만다. 여자는 수줍어하고 남자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 화양연화를 가장 짧고 표면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영화는 1962년 홍콩을 배경으로 갖는다. 복도 하나를 둔 두 집에 두쌍의 부부가 같은 날 이사를 온다. 두 쌍의 부부, 총 네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영화에 얼굴을 드러내는 건 한명의 남편과 한명의 아내뿐이다. 서로의 아내와 남편은 영화에서 목소리와 뒷모습으로만 존재한다. 왕가위는 이렇게 두 쌍의 부부에서 한쌍의 남녀만을 골라내면서 이야기를 집중시킨다. 스크린안에 굳이 넷씩이나 필요없는 까닭은 차우(양조위)와 수리첸(장만옥)의 모습이 다른 그들의 배우자들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차우의 아내와 수리첸의 남편은 집을 비우거나 일이 늦어져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고, 차우와 수리첸은 집의 좁은 복도와 국수집 골목 계단에서 자주 스친다. 하지만 그 둘에게 처음부터 불륜의 기운이 감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그들의 배우자들이 서로에게 정을 품었고 그들은 버림받았음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그 둘은 어떻게 시작한것일까를 궁금해 함과 동시에 그들 또한 불륜의 리허설을 시작한다. 영화는 부자연스러운 점프컷을 종종 이용하여 이 리허설과 실제 사랑의 감정의 경계를 모호하게 허문다. 차우와 수리첸에게 실연의 아픔은 더 급격하게 서로를 원하게 되는 촉진제가 된다. 하지만 결코 이 둘은 선을 넘지 못한다. 주인 아주머니의 좋지않은 눈초리에 수리첸은 차우와의 밀애에 한순간에 소극적이 되고, 차우 역시 싱가폴로 함께 떠나자는 말을 수리첸에게 끝내 용기내지 못한다. 수줍은 두 남녀는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하며 단 한번의 키스도 없이 헤어진다. 그들에게 남은것은 한번의 포옹과 한번의 오열, 그리고 택시안에서의 조심스럽게 포개어진 손길이 전부다.










왕가위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 이 영화를 두고, 이후 그의 영화들로부터 사람들이 <화양연화>의 잔상을 찾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화양연화>는 왕가위의 필모그래피에서 <아비정전>이후 10년, <중경삼림> 이후 6년, 그리고 <2046> 4년전에 위치해 있는 영화다. 그리고 2007년작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7년전 영화다. 내가 자주 멋대로 규정해버리고 인용해서 써먹기 좋아하는 - 소위 '왕가위 크로니클' 의 중심에 서있는 영화다. 언젠가 왕가위의 모든 영화를 보고 그의 영화세계를 포스팅하게 되면 꼭 언급하게 되겠지만, <화양연화>의 '수리첸(장만옥)'은 <2046>의 '수리첸(공리)'이 되고, 다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수 린(레이첼 와이즈)'이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패스트푸드점 주인이 되어 여행에서 돌아오는 페이(왕비)를 기다린 <중경삼림>의 경찰633(양조위)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엘리자베스(노라 존스)를 기다리는 카페 주인 제레미(주드 로)가 된다. 왕가위의 페르소나인 양조위는 <화양연화>에서 1962년 홍콩에서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뒤로하고 싱가폴로 떠나지만, <2046>에서 다시 등장한 그는 몇년이 흐른 뒤인 1960년대말의 홍콩으로 돌아와 사랑했던 여자를 이번엔 자신이 싱가폴로 떠나보낸다. 그리고 <2046>의 시간적 시작이자, 영화 구조상 마지막에 배치된 1963년 싱가폴에서의 양조위는, <화양연화>가 끝난 그 시점에서의 연장이자 뒷 이야기이다.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글을 쓰고 수리첸과의 기억을 묻어둔 호텔방 2046호가 4년 뒤, 영화 <2046>의 제목이 되었음은 말할것도 없다. 이렇듯 왕가위의 영화는 한편만을 따로 떼어놓고 논하기 대단히 어렵다. 그렇다고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그의 여러 영화를 섞어 말하는게 더 쉽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그의 영화세계에 대해서 자신할 정도로 알지 못하고, 그래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왕가위에 대해 좀 더 알게되면 언젠가 따로 포스팅할 날이 있을것이라 오늘도 혼자 타이를뿐이다.











영화 <화양연화>는 말을 많이 하지않는다. 대사도 적고 카메라 속의 인물은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여백이 많이 드러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백은 복도벽, 건물벽, 골목벽이다. 음악은 한층 더 절제되어 있다. 음악을 맡은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Yumeji's Theme'는 영화에서 아주 주효하게 등장한다. 한번들으면 잊기 힘들게 만드는 이 바이올린 선율은 영화속에서 대사와 겹쳐짐없이 오직 혼자 독주하며 그 위에 차우와 수리첸의 모습을 번갈아가며 잡는다. 이 영화에서 더 많은 말을 우리에게 하는 장면들은 두 남녀가 함께 있을 때보다 오히려 각자 혼자 있는 컷이기 때문이다. 이 곡이 처음 등장했을땐 차우와 수리첸은 입주자들과 함께 어울려 스쳐지나갈 뿐이었지만, 두번째 등장했을땐 밤늦은 국수집의 골목길에서 서로가 걸었던 길 위를 포개어져 지나갔으며, 세번째 이 곡이 울렸을땐 이미 그들은 서로가 각자의 배우자들에게 버림받았음을 빗속의 질척한 골목길에서 짐작해나갔다. 이 곡이 영화속에서 여섯번째 들렸을때, 그들은 호텔 2046호에서 함께 글을 쓰며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마지막 여덟번째 울렸을땐, 이별의 리허설을 마치고 택시안에 기대어 손을 맞잡고 있었다. 영화에서 이 테마곡은 차우와 수리첸의 감정변화에 맞춰 흘러나온다.











사랑을 말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 왕가위는 이렇게 극한으로 절제된 사랑을 카메라에 담으며 미완의 사랑이 가진 그 미학을 말한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시작조차 않아서 영원함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뤄진 사랑은 그 존재 자체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유한성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더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연인들에게 큰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다. 1966년의 차우와 수리첸은 각각 그들이 살던 그 집에 돌아와보지만 이미 서로는 건너방에 없다. 수리첸은 차우가 살던 옆방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차우는 수리첸이 살던 그 방문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다. 그렇게 아무도 먼저 용기를 내지못한 한쌍 남녀의 '화양연화', 즉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끝난다. 영화에서 굳이 몇년뒤인 66년 뒷이야기를 보여주는것은 62년이 배경이 된 영화의 주된 스토리가 이미 과거의 일, 즉 '기억'이 되었음을 말한다. 영화는 그 후 후반 5분여 동안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로 날아간다. 앙코르와트의 석벽 구멍에 차우는 몇분간 입을 대고 자신의 비밀을 봉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한 이 부분에서, 처음엔 왜 하필 앙코르와트 였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때 화려했던 장소였지만 지금은 쓸쓸히 폐허처럼 되어버린 이 유적지가 갖는 의미에 따른 것이었을까. 영원히 봉해버린다는 의미로 그 수백년된 유적지를 사용한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실패한 경험이 있고, 시작조차 못해본 사랑들을 각자 간직하고 있다. 시작과 끝이 있었던 지나간 사랑들 못지않게,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오래 남아있는 것은 실패한 사랑들의 기억이다. 실패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영원성이 그것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만든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런 미완의 사랑이 갖는 애절한 기억과 영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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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ex 2012/05/15 09:25 # 삭제 답글

    DVD를 빌려주던 중국인 친구가 장만옥의 옷(중국 전통옷)이 장면마다 계속 바뀌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는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의 관점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옷의 차이는 천의 무늬가 바뀌는 것이겠지만, 내 관점에서는 옷이 바뀌진 않고 무늬만 바뀌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런데, 그 부분에서 장만옥의 심정이 표현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전통옷만을 계속 입고 있다는 것은 전통적인 관점의 아내/결혼의 관념을 깨지 못하는 삶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계속 바뀌는 무늬(옷)은 그러한 삶을 바꾸고자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구요.

    오래되서 스토리도 가물가물한데, 옷에 대한 기억만 남아있네요.
  • 레비 2012/05/15 21:25 #

    저는 장만옥(수리첸)의 옷이 계속 바뀌는것에 그런 의미가 있는지까진 몰랐네요 :) 다만 수리첸의 그 고풍스러워보이는 의상이 왠지 영화내내 다소 불편? 하게 느껴질정도로 경직되어있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어쩌면 그 전통옷이 의미하는 자신이 마지막까지 붙들고있는 끈같은 의미가 아닌가싶네요. 자신도 차우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의 감정을 품지만 역시 전통적인 시선과 구속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삶이 그 부자연스러울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한 옷에 있지않나는 생각이 dex님의 덧글을 보고 들었네요 :) 옷은 그대로인데 그 옷의 무늬는 바뀐다... 흥미롭네요 ㅎㅎ

    좋은 피드백 감사합니다 :D
  • 애쉬 2012/05/17 04:58 #

    관계 없는 이야기인듯한데...

    장만옥의 치파오가 아주 고급품이라 비쌌을 거라고 중국 유학하던 친구가 말해주더군요
    그게 장면마다 바뀌니 엄청나게 제작비가 많이 든 부분이였을거라 추측하더군요

    감독이 고집한 이미지가 있나봅니다.
  • 훌리안카락스 2012/05/15 11:02 # 답글

    화양연화 뜻이 굉장히 좋죠. 글쓴이도 저도 여기 들리는 모든 사람도 지금이 화양연화였으면 좋겠네요.
  • 레비 2012/05/15 21:26 #

    감사합니다 !! :D 훌리안카락스님에게도 '화양연화'가 함께하길 바래요 :)
  • 2012/05/15 11:5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비 2012/05/15 21:28 #

    아 그래요 넷킹콜의 그 노래도 이 영화 OST에서 빛나고있죠 ㅎㅎ 저야 스페인어를 해석할정도는 못되지만 가사가 이 영화의 내용과도 오버랩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더 관객들에게 와닿는 음악이라고하네요 :)
  • 루얼 2012/05/15 12:43 # 답글

    리뷰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군요 :)
  • 레비 2012/05/15 21:28 #

    핫. 전 왕가위와 팀버튼의 팬입니다 :) 그러고보니 팬심이 묻어나는 포스팅이었군요 !!
  • Cheese_fry 2012/05/17 04:34 # 답글

    저도 화양연화 참 좋아하는데...중경삼림, 타락천사도 봤지만 역시 화양연화가 제일 좋아요. ^^
  • 레비 2012/05/19 01:50 #

    전 왕가위중엔 <중경삼림>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D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랑요 ㅎㅎ ^^

    앞으로 그의 영화들을 더 보게될것같지만 이 <화양연화>도 꽤 상위에 있을것같아요 :)
  • 애쉬 2012/05/17 05:04 # 답글

    국수 사오던 골목에서 저 테마 음악이 들리는 장면이 머리속에 무한루프로 돌아가네요
    화양연화란 말만 떠올리면 말이죠

    실패한 사랑은 어떤 것이고 성공한 사랑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 말 자체가 사랑을 과정이 아니라 결과물로 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지고자하던 것이 손에 들어오면 사람은 행복할까? 가지려고 발버둥 치며 까치발 할 때가 더 행복할까?

    인생이 당사자가 되어 보지 않고서 구경꾼으로서는 입을 못 열 답인 것 같습니다.

    레비님도 화양연화의 저 붉고 노골적(?)인 타이틀화면이 잊혀지지 않으시나봅니다. 저도 그래요 무척 놀랐어요 ㅎㅎㅎ
    거칠고 투박하게 의고전적으로 이런 걸작을 만들어 놓으시다니..... 왕감독님 깍쟁이 ㅋ
  • 레비 2012/05/19 01:54 #

    저도 그 골목길에서의 음악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음악이 특히나요 :)
    사랑을 과정으로 표현하는것을 왕가위는 특히 잘하는것같아요. 왕가위의 영화에서 사랑은 결과가 중요하게 되지않죠 ㅋㅋ 헤어짐이 꼭 실패한 사랑만은 아님을 말하죠. ㅎㅎ
    2000년대 영화이긴 하지만 왕가위 특유의 색감으로 홍콩영화의 냄새가 짙죠 ㅎㅎ 중경삼림에서 만큼의 어지러운 핸드헬드는 없어도 이 영화는 그 무언의 분위기와 여백으로 확실히 코카콜라가 아닌 중국차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
  • 누누슴 2012/06/21 22:39 # 삭제 답글

    저는 양조위의 그 눈빛을 정말 잊을 수! 가 없어요
    색,계에서도 정말....빠져버렸어요
    여기 써있는 댓글중 제 댓글이 젤 뭔가 낮아 보이는건
    그냥 느낌이겠죠.......? ㅋㅋㅋ
  • 레비 2012/06/22 15:19 #

    왕가위도 좋아하지만 양조위도 제가 참 좋아하는배우예요 :) 다만 아직 색,계는 보지 못했네요 ㅎㅎ 낮아보이다니요 ㅎㅎ 덧글에 그런게 어딨나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영화에 덧글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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