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블랙의 사랑, Meet Joe Black, 1998 Flims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전염병처럼 번지고있던 1999년의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래, 21세기를 사는 지금 무려 20세기에 중학교를 다녔던 나다. 학교는 우리집에서 뛰면 1분, 걸어으면 3분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 짧은 등하교길에는 작은 상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중엔 문방구나 이발소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점포안에는 비디오 대여점이 하나 있었다. 10년도 훌쩍 지난 지금 그 자리는 어느시절에는 부동산이 되었다가, 언제는 동물병원이 되었다가, 지금은 예쁜 알바생이 일하고 있는 테이크아웃 피자집이 되어있다. 하지만 그 비디오가게는 나의 청소년기 시절 전부를 함께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DVD가 생소하던 시절, 10대인 나는 집앞의 그 비디오 대여점에서 일주일에 몇편씩 영화를 탐닉했다. 그곳의 주인아저씨와 신작 비디오들을 이야기하고 좋았던 영화들 서로 추천하기도 했었다. 인터넷이라곤 유니텔밖에 모르던 그 시절의 내게, 좋아하던 배우의 신작 개봉 소식도 알려줬고 보고싶어했던 영화는 날 위해 따로 빼두기도 해주셨었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그리고 장르를 따지지않고 닥치는대로 보았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97년, 국내 IMF 사태로 벌어졌었던 금 모으기 운동을 한순간에 무색하게 만들었던 <타이타닉>이 극장가를 휩쓸었다. 당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비록 본인은 스스로 마음에 안든다할지라도) 그 미모덕에 같은 반 여학생들의 책받침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영화의 성공과 함께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던 디카프리오에겐 의미있는 시작점이기도 했겠지만, <타이타닉>을 몇년뒤에 본 내게는 사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매달 가져오던 카탈로그에서 턱시도에 보타이를 매고 큰 눈망울을 굴리며 서있는 한 금발의 남자를 보게된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내 기억속에서 헐리우드 꽃미남 배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남자는 디카프리오가 아니게된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브래드 피트의 첫인상이다.


<스내치>, <오션스>시리즈와 <트로이>, <미스터 미세스 스미스>, <벤자민버튼..>을 거쳐 최근 <머니볼>까지. 이제는 명실공히 헐리우드 최고의 배우중 하나가 되어있는 브래드 피트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의 자글자글한 주름속에서 꽃미남 스타의 이미지를 찾으려한다. 물론 그가 연기력도 없이 외모로만 성장해온 배우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연기력은 해가 갈수록 좋아지는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나는 확실하게 제안할 수 있다. 브래드 피트가 가장 '아름답게' 등장하는 영화는 98년작 <조 블랙의 사랑>이 아닐까하는 의견에 대한 동의를 말이다.














영화는 무려 3시간의 플레잉타임을 갖는다. 지루한 멜로영화일거라는 우려도 잠시, 시작부터 아주 판타지한 설정으로 들어간다. 영화에는 크게 세 명의 주연이 등장한다. 죽음을 앞둔 부유한 자본가인 노년의 빌, 그의 딸 수잔, 그리고 조 블랙. 빌을 연기한 배우는 다름아닌 앤소니 홉킨스다. 92년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라는, 영화사에 길이남을 악당을 창조해낸 그는 다소 앳되보이는 브래드 피트와 호흡을 맞추며 영화에 안정감을 더한다. 부유한 CEO이지만 죽음 앞에 담담하며 비열하거나 추해지지않는 1등급 인생을 살아온 한 노인을 연기하는데에 앤소니 홉킨스는 아주 노련하다. 어느날 그런 그에게 저승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사신死神은 한 남자의 몸을 빌려 노인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하필 그 몸을 빌린 남자는, 그날 아침 딸 수잔과 카페에서 만나 잠깐이지만 깊은 사랑의 교감을 주고받고 아쉬움속에 헤어졌던 남자다. 그 남자가 자신과 헤어진 직후 교통사고로 죽었음을 알지 못하는 수잔은 눈앞에 다시 나타난 그 남자를 껍데기만 같은 사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조 블랙으로 소개된 그는 세상구경을 시켜주는 조건으로 빌에게 시간을 주고 그와 남은 며칠을 함께한다. 노인의 회사에 욕심을 부리는 수잔의 애인이자 이사회중 한명인 드류, 조 블랙을 사신인줄 모르고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딸 수잔. 그리고 자신의 얼마 남지않았다는 삶의 끝언저리. 세상구경을 하고싶다고 나타난 저승사자가 하루종일 행동을 같이하는 가운데 자신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회사는 위기에 처하는 이런 설정은 얼핏들으면 참 걱정스러운 시놉시스다. 자칫 '막장'으로 흘러가거나 수습 안되는 엔딩으로 마무리될것만 같은 불안은 그러나, 영화가 주는 진한 메세지에 기우가 된다.














사랑을 말하는 영화는 세상에 넘치고도 넘쳤다. 하지만 이 영화도 단순히 저승에서 돌아온 남자와 여자의 운명적이고 안타까운 시한부 사랑이나 엇갈림을 말하려한다면 그저그런 영화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플롯말고도 인생과 죽음이라는 플롯도 갖는다. 그래서 영화는 브래드 피트인 조블랙이 얼핏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내가 본 이 영화에서는 죽음을 앞둔 빌이 주인공이 된다. 빌의 자신의 생일파티 마지막 연설에서하는 유언과도 같은 담담한 말은 감동적이다. 짧은 말을 마치고 내려와 두 딸에게 작별 아닌 작별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과, 배경에 연주되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는 유난히 잘 어울린다. 헐리우드에서 자주 악역으로 등장하는 부자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간직하고 딸에게 그것을 차분하게 권하는 노인의 모습은 그래서 마지막까지 아름답다. 

물론 조와 수잔의 사랑도 감동적이다. 드류와의 열정없는 관계에 주의를 주는 빌의 메세지와 그런 수잔이 한눈에 빠져든 조 블랙과의 사랑은 인생에서 흥분과 설레임과 정열을 갖는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한다. 미치도록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런 관계가 없던 수잔에게 조블랙은 그래서 그녀 인생의 강한 파장을 던진다. 둘은 남은 빌의 인생, 그 짧은 시간동안 정신없이 서로에게 빠져든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평생이지만,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않다고 생각하는 내게, 수잔의 심적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컷다. 한눈에 반하는 경우를 믿지않던 나지만, 동시에 인연이 언제 어디서 다가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일까. 살아있는 여자와의 사랑에 서투른 저승사자 조 블랙마저 마지막엔 흔들리며 수잔을 함께 데려가고자 한다. 영화의 판타지한 설정이 갖는 시한부 사랑이라는 한계이긴 하지만, 그녀를 두고가야하는 그의 결정은 그래도 안타깝다. 강하고 전지전능한 사신처럼 등장하지만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사랑이라는 감정에 어색하고 신기해하는 그 모습은, 역시 진실된 사랑을 모르고있던 수잔과 다름아니다. 조블랙이 그녀의 사랑을 고백받거나 그 감정을 조금씩 느끼고 배워갈때마다 그의 표정은 설레임과 황홀함에 흔들린다. 떨리는 눈과 입술과 시선 연기가 그런 마음을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불꽃놀이를 보면서 급기야 사신은 눈물을 글썽인다. 그에게도 감정이라는 생소한 느낌이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한 노인을 데려가려 찾아왔다가 되려 그에게 배워가는 젊은 모습의 한 저승사자는 영화의 이 어색할것같은 설정을 모두 커버하고도 남는다.











초현실적인 사랑을 다루는 영화는 언제나 그 비현실성에게 발목을 잡힐것을 걱정해야한다. 이 <조 블랙의 사랑>도 크게 다르지않았고, 개인적으론 조금 불만이었던 억지스러운 해피 엔딩은 나처럼 보는 사람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래도 상관없다. 이 영화는 결국 사랑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에 중요함을 두지않는것 같다. 영화에는 시간이 가기전에 열정적인 사랑을 찾아보라는 한 노인의 인생과 아름다운 마지막이 있고, 사랑에 서툴지만 그 감정을 느껴가는 어설픈 한 저승사자가 있으며, 순간의 격정적 감정에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가는 애절한 한 여자가 있다. 지난 정초, 망년회겸 스물일곱이 되던 그날, 다 함께 이십대후반에 접어들었음을 아쉬워하던 친구들 중 하나가 외쳤더랬다. "우린 이제 순수한 사랑을 할 나이는 끝났어! " 라고. 순수한 사랑이 대체 뭔지 묻고 싶었지만 겨우 참으며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친구가 말하던것은 영화에서 앤소니 홉킨스가 말하던, 그 열정적이고 집착적이며 마음가는대로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런 사랑없이는 인생을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던 바로 그것말이다. 그는 만나는 순간 전기가 통한다고 표현했다. 첫눈에 전기가 통하는 그런 사랑이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에겐 이미 찾아왔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아직 멀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런 순간이 왔을때, 사랑한다고 스스로 다독거렸던 드류라는 남자가 있었음에도 수잔이 카페에서 그를 만난것은 비록 운명적이고 우연이었겠지만, 계속 발걸음을 머뭇거리며 돌아보기만하는 실수는 하지않아야겠다. 14년전의 한 영화가 이제는 스물일곱살이 된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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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홍쎄 2012/03/25 07:20 # 답글

    한번 보고 싶은 영화네요.
  • 레비 2012/03/25 10:40 #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좀 진부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후반으로 갈수록 3시간의 플레잉타임이 아깝지않은 영화입니다 ;)
  • 블랙 2012/03/27 09:18 # 답글

    영화 상영전에 나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의 예고편을 보려고 '조 블랙의 사랑'은 덤(...)으로 본 관객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 레비 2012/03/27 10:51 #

    오 스타워즈에피소드1 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었나보네요 :) 근데 전 스타워즈를 그다지 재밌게 본 사람이 아니라 .. ㅠㅠㅋ 게다가 이 영화, 덤으로 보기엔 플레잉시간이 꽤 길었을텐데요 ㅋㅋ
  • 2012/03/27 09:5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비 2012/03/27 10:53 #

    좀 오래지난 영화라 사실 좋아한다는 분은 커녕 기억도 잘 못하는 분들이 대다수던데 그래서 반갑습니다 :) 은근히 명대사들도 많아요 :D 그쵸. 저도 언급했듯이 브래드피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아름답게 -_-ㅋ 등장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ㅎㅎ
  • 빵구할매 2012/03/27 12:21 # 답글

    왜전에 극장에서 본영화군요 ㅎㅎㅎㅎ
    땅콩잼을 정말 맛나게 먹던 어린아이같은 미소가 아직도 생생 ~~~~
    리뷰 잘 보고 가내요 ㅎㅎㅎ
    즐거운 하루 되세요 ㅎㅎㅎ
  • 빵구할매 2012/03/27 12:21 #

    이런 오타가.......ㅠ.ㅠ
    예전에 ㅎㅎㅎㅎ
  • 레비 2012/03/27 17:48 #

    땅콩잼에서 세상을 모르는 사신의 이미지가 처음나왔지싶어요. ㅎ 감사합니다 :) 좋은 저녁되세요 ㅎㅎ
  • 루아 2012/03/27 12:48 # 답글

    저는 한 사오년 전에 디비디로 보고 한눈에 반했더랬죠. 좋아하는 영화 리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만 조 블랙은 저승사자라기보단 죽음이 아닐까 해요. 저승사자면 하나가 아니라 다수인 죽음의 집행자...라는 느낌이 드는데, 조 블랙은 죽음 그 자체잖아요? 그가 이승에서 노는 동안 아무도 죽을 수 없으니. 실제로 극중에서 death라고 불리기도 하고요. 어느쪽이든 무지 매력적이긴 합니다만 ^^
  • 레비 2012/03/27 17:55 #

    오 저도 학교에서 디비디로 다시 보고싶었는데 테이프로밖에 없더라구요 ㅠ 저도 그냥 빌에게 다가온 죽음의 형상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조에게도 일부러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면을 일부러 부여한걸로봐서 전 그냥 저승사자라고 받아들였어요 ^^ㅋ 죽음 그 자체로보고 생각해도 또 색다르겠어요 :)
  • 2012/03/27 16:2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레비 2012/03/27 18:00 #

    ㅎㅎ 네 그야말로 리즈시절이었죠 ㅋㅋ 연기력은해가갈수록 더해지는것같지만 그래도 꽃미남 이미지는 이때 생긴것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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