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항구 Lifelog



인천 공항에서 파리까지 가는 비행은 뉴욕까지 가는 비행보다 2시간가량 짧았다.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의 역으로 날아가기 때문일까? 미국과 다르게도, 내가 비행하는 내내 유럽도 내쪽을 향해 다가오고있었다. 비록 마스크는 계속 쓰고있어야 했지만, 코로나로 인한 출국인 수가 격감해서인지 가로세로 최소 5칸 이내에 나 이외에 승객은 없었다.

한국시간으로 자정을 넘겨 밤 1시쯤 출발하는 비행기였으나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해도 여전히 같은 요일 밤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 5시의 파리에 그렇게 도착했다. 이렇게 큰 공항에게도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환승하러 간 터미널 앞에서 아직 문을 열지도 않고 직원들도 볼 수 없는, 처음 경험해보는 일을 겪었다. 오래된 비행에 찌뿌둥한 몸보다도 더 힘들었던건, 열두시간 내내 쓰고있던 마스크의 타이트한 끈이 내 귓등을 날카롭게 자극하고 있었다는 것. 환승하기 위한 프랑스 입국 심사소가 문을 열때까지 조금이라도 벗어두고 싶었지만 워낙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프랑스의 악명때문에 참고 있었다. 나 포함한 한국인 승객들은 환승 게이트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잠시마나 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20여분 뒤, 오전 6시가 되기전에 터미널이 셔터가 열렸고 한국에서 받아간 코로나 PCR검사 음성 확인서를 비롯해서 다시한번 기내수화물 검사와 체온 체크가 있었다. 새벽 비행기인데다가 아마도 그날 드골 공항에 도착한 거의 첫번째 비행기여서였는지, 입국심사에 소요되는 긴 기다림과 엄격한 질문따위는 없었다. 방금 막 출근한듯한 직원은 졸린 눈으로 내 비자와 계약서만 훑어보더니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들여보내주려 하였다. (코로나 음성 결과지를 확인하는것조차 잊어서 옆의 다른 직원이 알려줄때서야 황급히 내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손쉽게 프랑스 입국 심사를 통과한 나는 다시 보르도 메리냑 공항으로 가기위해 환승 게이트와 아직 오픈하지도 않은 면세점들 사이에서 장장 7시간을 기다려야했다.

코로나로 인해 비행편들, 특히 국제 노선들이 많이 줄어들고 가격도 요동치는 마당에, 한국에서 보르도로 향하는 비행편을 고르는데 선택의 폭은 많이 없었다. 인천공항에서 보르도까지의 직항은 없었고, 암스테르담이나 파리를 거쳐 최소 1번은 환승을 해야하는데 국내 항공사들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높았다. 다행히 하루에 서너편 이상은 에어프랑스에서 운영하고 있었기에 적당한 시간, 특히 화요일 오후에 도착하는 비행편을 찾다보니, 불가피하게 드골 공항에서 환승 대기시간이 7시간에 달하는 비행편을 구할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르게 드골 공항의 환승 대기시간동안 할게 너무 없었다는 것. 면세점 구경은 한시간이내로 다 끝났고 먹을 곳에 대한 선택지도 적었다. 게다가 해가 뜨면서 슬슬 프랑스 국내선을 이용하려고 터미널로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던 나는, 결국 졸음 앞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포기한채 크로아상과 커피로 아침을 빠르게 해결한 뒤 한쪽 구석 의자에 마스크를 한채로 잠을 청했다. 비행내내 잠을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지만 요동치는 기내에서의 잠과 새벽공기와 따듯한 난방 속에서 솔솔 잠이오는 것은 다른 문제. 주변 사람들을 아랑곳않고 선잠을 자다깨다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정작 파리에서 보르도까지의 비행은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워낙 심하게 춥던 한국의 겨울을 뒤로하고 와서인지, 영상 5도 내외인 보르도의 기온도 마치 가을날씨처럼 선선하게 느껴졌다. 미리 알아보고 간 보르도의 연중날씨는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고 여름도 25도 이상 올라가는 일이 없어 연평균 기온차가 한국에 비해 크지 않았다. 계절이 뚜렷하진 않아도 무더위나 혹한이 없을거라는 기대가 들었다. 하지만 겨울에 장마가 있다는, 특히 하루종일 내리진 않아도 구름이 많고 하루에도 몇번씩 비가 왔다그쳤다는 반복한다고 했다. 실제로 하늘엔 구름이 많았지만 도시에 고층 건물이 없어서 사방이 지평선처럼 탁 트여 시원했다. 고맙게도 PI가 차로 마중나와 주어, 처음 도착한 도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숙소까지의 먼 길을 다시 떠날 필요는 없었다. 차로 30여분을 이동하여 도심과 연구실 사이에 있는 트램역 중 하나에 도착했다. 3월말까지 두달여간 머무를 학교 CROUS는 트램역 바로 앞에 있었다. 얼른 장기간 머물 집을 구해야한다는 압박도 조금 있었지만 당분간은 이 어디든 쉽게 갈 수 있는 숙소를 즐기기로 했다.

고층건물이 거의 없고 마치 중세시대의 성곽에 그대로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듯한 느낌을 주는 이 엔틱한 도시와 어딜가도 흰색인 돌벽들이 첫 이미지로 남았다. PI가 설명해주기론 뉴욕같이 공원이나 나무가 많은 그린시티는 아니지만 오래된 외벽들을 그대로 간직하는 도시이고 심지어 도시 사이를 누비는 트램조차도 다른 유럽의 트램들과 달리 전선을 지상에 두지 않아 도시 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 등록되어있던 이 도시의 별칭은 Port de la Luna였다. 그러고보니 어렸을때 대항해시대 게임을 할때마다 보르도는 잉글랜드 플레이어였던 내게 아주 초반에 만날 수 있던 그런 친숙한 프랑스의 기항이었다. 그땐 내가 이렇게 이 도시에서 살아보게 될 줄을 꿈에서라도 생각할 수 있었을까-란 생각을 하니 약간 어이없기도 하고 헛웃음도 나왔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렇게 나는 이 달의 항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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